129화: 비뚤게 자란 장공주
복안 장공주는 평소와 다음 없이 새벽에 별원 측문으로 나와서 경쾌하게 보림암으로 향했다.
다만, 오늘은 그녀 뒤에 녹운뿐만 아니라 요 상궁도 있었다. 요 상궁은 장공주 뒤를 바짝 따르고, 녹운은 찬합을 들고서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걸었다.
“경성은 어때?”
복안 장공주는 길가에서 들꽃을 따서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어제 영원은 별원에서 곧장 경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성문에서 주유민을 우연히 만나서 함께 연향루에 갔고요. 고작 한 시진 정도 있었고, 주유민은 류만을 데리고 비연루로 갔습니다. 지금도 아직 비연루에 있을 겁니다. 영원은 취했는지, 묵신이 부축해서 나왔습니다. 묵신은 그를 정북후부에 데려다주고 묵부로 곧장 돌아갔고요.”
요 상궁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줄줄 이야기했다. 복안 장공주는 눈썹을 까닥이며 피식 웃었다.
“영원이 취해? 연향루에서, 주유민과 묵신 앞에서 감히? 흥. 계속해봐.”
“예. 이동은 별장에서 곧장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장씨는 진하 부두에서 나와서 장원 두 곳을 살피고 경성에 들어갔습니다. 반루부터 들리고, 힐수방에 갔다가 마지막에 복륭 전장에 갔습니다. 복륭 전장에서 나와서는 성 밖으로 갔습니다.”
“반루, 힐수방 모두 이가 산업이고. 복륭 전장은? 이가 지분이 얼마나 되지?”
복안 장공주가 요 상궁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아직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탕가를 제외하면 이가의 지분이 가장 많을 겁니다.”
요 상궁은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응. 계속해.”
“예. 문도는 배에서 내린 다음 말을 타고 경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신이 능운루에서 문회를 하는 동안 문도는 능운루 맞은편 다루에 앉아서 지켜보다가 문회가 끝나고 여염과 이신 일행이 청파루에 가는 걸 보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걸어서 밤새 경성의 모든 홍루를 둘러보고는 날이 밝을 때쯤에야 성에서 나가 산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제법 영리한 사람이네.”
복안 장공주는 한마디 평하고 계속 물었다.
“경성은 조용하고?”
“예. 대황자는 궁에서 나와서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말에 막 저택으로 들인 첩 주씨가 심장이 아프다고, 대황자가 줄곧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수국공부에서 거둔 양녀?”
복안 장공주는 들고 있던 꽃을 내던졌다.
“예. 대황자가 매우 아낀답니다. 사황자는 어제 줄곧 주 귀비 곁에 있다가 아주 늦게 나왔답니다. 삼황자는 외숙인 양설곤이 또 사고를 쳐서 강환장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며 투덜거렸답니다.”
“반편이 한 쌍이군.”
복안 장공주가 길가의 나무를 대뜸 걷어찼다.
“수국공부는 조용합니다. 운남, 귀주에 가뭄이 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묵 승상이 어제 호부, 공부상서를 불러 의논했습니다. 새벽에 흩어졌고요. 여 승상은 황상에게 불려들어가 추시 일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나와서 예부상서를 불러서 논의하느라 마찬가지로 새벽에 흩어졌고요. 계가는…….”
요 상궁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장공주를 힐끔 바라봤다.
“계부는, 계소연은 평소와 다름없었습니다. 다만 계가의 공봉(供奉: 문학 시중을 드는 관직)들이 어제 오후에 하나둘 저택에서 나오더니 새벽에야 속속 돌아갔습니다.”
“계소영은?”
“청파루에 가서 쉬자고 한 게 계소영이었습니다. 접대도 그가 했고요. 이신은 돌아가려고 했는데, 계소영이 죽어라 만류했습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요.”
“그것 좀 봐. 꿍꿍이가 있고 없고, 그렇게 다르다니까. 고서강이 내년 춘시를 주관한다는 소식을 어떻게든 계소연에게 알려. 어떤 결단을 내리는지 두고 봐야겠어.”
복안 장공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딘가 냉랭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서강을 춘시 시험관으로 만든 게 수국공부라는 사실도 흘려. 주택헌, 주 부추밀이 황상에게 한 제안이라고.”
“예.”
요 상궁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우리 사람은 몇이나 불러들였어?”
복안 장공주가 한참 만에 느릿느릿 물었다.
“아룁니다. 부를 수 있는 자는 모두 불렀습니다.”
복안 장공주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가 복륭 전장에 갔다니, 우리에게 은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지. 그럼 자네가 일단 장씨를 찾아가서 은자 좀 달라고 해 봐.”
“예.”
거의 표정이 없던 요 상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장공주가 세상일에 관심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 시간 동안 사람은 한가하게 있을 뿐 어차피 그대로이겠지만, 은자는 그렇지 않았다. 장공주에게 무슨 은자가 있을까.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아도, 움직이려고 들면 은자가 산더미처럼 필요하다. 자기가 하기 쉬운 말이 아니었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다행히 자기가 꺼낼 것도 없이 장공주가 먼저 생각이 미쳤다. 이가는 큰 부자고, 이번에 장공주가 이가를 위해 나서주었으니……. 은자가 있으면 일하기가 참 쉬워진다.
이동이 보림암 작은 별원에 들어갔을 때, 장공주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자유로운 모습으로 꼰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어제 새로운 병차가 들어왔어. 향을 맡아보니 그럭저럭 괜찮네.”
복안 장공주는 유쾌한 목소리로 이동에게 분부했다. 오늘은 뒷산에 가서 돌아다니지 않을 모양이었다.
“봉황산에서 온 신차인가요?”
이동은 앉아서 손을 닦고는 병차의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복안 장공주의 한쪽 눈썹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
“요 녀석, 안목이 정말 대단하구나. 네가 처음 보는 거,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있니?”
“그럼요. 아주 많지요.”
이동은 차침으로 차를 꺼내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본 게 몇 가지나 되겠어요. 봉황산 차는 명차라서 아는 거예요. 장사하는 집안이고, 또 집안에 차밭도 있는데 봉황산 차도 몰라보면 어떡해요.”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갸웃하고 이동을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확 바꿨다.
“어제 오가아를 뱃전 밖으로 매달았었다며? 간도 크지!”
“저 어렸을 때요, 호주에서 경성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가 저를 그렇게 뱃전 밖에 매달아서 왔어요. 나는 것 같았거든요. 지금까지도 기억하는걸요. 너무 신났어요.”
이동은 차를 찧으며 그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화를 내면 어쩌려고 그랬어?”
“화내지 않으셨잖아요. 지금 모습을 뵈니, 아무리 봐도 화난 것 같지 않으신데요.”
삐딱하게 바라보는 장공주의 시선에 이동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게다가 장공주께서도 법도를 잘 지키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하! 하긴 그래. 듣자 하니 어제 재미있게 놀았다더라? 휴. 아동, 몇 년 있다가, 강가 일을 잘 마무리 지으면, 재가하지 말고 네 어미처럼 장사나 하면서 멀리 돌아다녀. 매일 서신 한 통 써서 어디에 갔었는지, 뭘 봤는지, 어떤 좋은 걸 먹었는지, 재미있는 게 뭐가 있는지 알려주고. 내가 그 서신을 보면서 답답함이나 풀게 말이야.”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던 이동은 문득 씁쓸해졌다. 몇 년 뒤에 장공주가 살아있을까?
“알았어요.”
이동은 한참 만에 겨우 나직이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는 다리를 흔들면서 회랑 밖에 보이는 작은 세상을 내다봤다.
“아동, 난 요즘 계속 이런 생각을 해. 예전에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총애하신 게, 내게 좋은 일이었을까, 해로운 일이었을까. 언니들처럼, 철들고부터 일거수일투족 궁중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자랐으면, 평생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 황가의 비단 위 꽃으로 자라는 거라고 배우고 자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버지가 가르친 그런 것들을 배우고 자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복안 장공주의 말이 뚝 멈췄다. 장공주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차를 내리는 이동을 고개를 갸웃하고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동, 우리 아버지가 내게 뭘 가르쳤는지 아니?”
“저에게 하실 말씀이 아니에요.”
이동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황제가 자녀에게 가르치는 말은 그녀가 들을 것이 아니었다.
복안 장공주는 이동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은 쓰면 안 되는지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대답했더니, 다 틀렸대. 사심 하나 없이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장공주를 바라봤다. 미치셨나, 아니면 너무 들뜨셨나. 이런 말을 왜 내게 하시는 거야.
복안 장공주는 이동의 경악하고 황공한 표정을 보며 깔깔 웃었다.
“아버지가 당신은 마부고, 이 세상은 당신께서 모는 마차 같은 거라고 하셨어. 조정 대신은 마차를 끄는 말이고. 말 안 듣는 말은 채찍으로 때리고, 좋은 여물을 먹이고 씻기며 돌보면서 말을 듣게 달래야 한다고. 먹지도 자지도, 채찍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마차를 오로지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몰 일념밖에 없는 말은, 죽여야 한다고 하셨어.”
복안 장공주는 목을 긋는 손짓을 했다. 이동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내렸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아동, 보렴. 난 이렇게 자랐어. 또 뭐라고 하셨냐면, 여인은 두 종류로 나뉜대. 쾌락을 주는 여인, 아이를 낳아 줄 여인. 아동, 넌 어느 쪽이 되고 싶어? 쾌락? 아니면 생산?”
이동은 더는 참지 못하고 쿨럭쿨럭 헛기침했다.
“장공주…… 흠흠. 이런 이야기하지 말아요. 네?”
큭큭 웃던 복안 장공주는 이내 큰 소리로 웃더니 마지막엔 눈물을 흘렸다.
이동이 자등 산장에 돌아갔을 때, 이신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장 태태와 함께 밥을 먹고 나니, 이신과 문 이야가 찾아왔다. 이신은 피곤해 보였지만 문 이야는 원기왕성했다.
“대야 이야기부터 들을까요?”
문 이야가 장 태태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이동은 문 이야를 계속 살폈다. 그녀는 문 이야의 성격을 매우 잘 안다. 전생에 그는 강환장과 논의할 때든, 그녀와 몇 번 같이 일을 했을 때든 모든 말문을 자기가 열었다. 언제나 과감한 언사로 거침없이 말했었고, 이렇게 겸손하게 제안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장 태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신을 바라봤다. 이신이 서둘러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제 일부러 더 유의해서 살폈습니다. 다른 건 특별한 것이 없었는데 계 대랑이 조금 달랐습니다. 사실 이상한 것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뭐랄까,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오시 초에 계부에서 사람이 오자, 계 대랑이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금방 돌아왔고요. 돌아왔을 때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습니다. 기뻐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때부터 오후까지 계부에서 사람이 서너 번 왔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침착해졌고요. 그런데 대시(對詩: 시를 지어 응수하는 것) 때는 틀리거나 아예 되받지 못하더라고요. 밤이 되니까, 원래 다른 일정은 없었는데 계 대랑이 청파루에 가자고 모두를 붙잡지 뭡니까. 저는 계 대랑을 잘 알지 못해서 몰랐는데, 여 공자가 매우 놀라더군요. 계 대랑은 언제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해서 이런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이 초대해도 좀처럼 가는 법이 없는데 오늘은 웬일이냐고 하더군요.”
“평소와 다르면 이상한 게지요!”
문 이야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결론 짓는 말이기도 했다.
“태태, 소생의 생각으로는 어제 오가아의 일을 계가에서 안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빠르게요.”
장 태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휴, 자식은 부모의 살점이라는데, 마음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계가를 탓할 수 없지. 휴! 이야, 계속 말해 보시게.”
“예. 소생, 어제 경성의 홍루와 와자(瓦子: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 곧, 연예장演藝場, 약 파는 곳, 점치는 곳, 유곽 같은 곳)에서 밤새 돌아다녔습니다. 가볼 만한 곳은 모두 갔지요. 특별한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즉, 오가아의 일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몰라야 할 사람은 아마 모르고 있을 겁니다. 적어도 아직은요.”
이동은 문 이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복안 장공주가 기분이 좋아 보인 것도 이것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