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즐거움과 고통
“다다, 의자를 가지고 오렴.”
아라는 몸을 비틀면서 다다에게 분부했고, 영원은 눈썹을 살짝 까딱이며 술잔의 술을 몇 모금 만에 비우고는 잔으로 운수를 가리켰다.
“주전자를 아라에게 주어라. 넌 가서 노래나 부르고.”
운수는 웃음 띠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라에게 주전자를 찔러주며 제대로 모시라는 듯 그녀의 손을 살며시 꼬집었다. 그러고는 비파를 들고 음을 조율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라는 영원과 그리 멀지 않지만 또 찰싹 달라붙은 건 아닌 자리로 몸을 옮긴 다음 고개를 숙인 채 술 따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영원은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포도주를 연달아 비웠다. 그는 박자에 맞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도취한 듯 운수의 노래를 감상했다.
류만은 맞은편에 주육과 묵칠 사이에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홀짝 놀이를 하며 류만의 손에 들린 콩이 몇 개인지 맞혔다. 주육이 맞히면 묵칠이 류만 앞에 은표를 꺼내놓고, 묵칠이 맞히면 류만의 장신구를 하나씩 뺐다. 장신구가 없어지니 옷을 벗겼다.
앞에 놓인 은표의 두께가 눈에 보일 때쯤, 류만은 얇은 내의만 걸치고 있었다. 류만이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주육 품에 안겨서 그만하자고 어리광을 부리자, 묵칠과 주육은 신나게 웃으며 탁자를 두드려댔다. 영원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곁에 서 있는 아라를 힐끔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딸꾹질하며 일어섰다.
“소육, 옷을 다 벗겨버렸으니 오늘 밤에 제대로 보살펴 주어라. 미인을 저버리면 안 되지. 이 몸은……. 끅!”
영원은 또 한 번 크게 딸꾹질하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술이 조금 과한 것 같다. 먼저 돌아간다. 소칠.”
이번엔 묵칠을 향해 손짓했다.
“소육은 미인과 함께 보내야 하니, 일각이…… 천금이다! 네가 날 데려다주어라. 이 몸이…… 눈이…… 어른거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응, 내가 가지.”
묵칠은 벌떡 일어나서 후다닥 다가가 영원을 부축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라는 입을 달싹이다가, 류만의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가는 주육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묵칠이 돌아오든 말든, 어차피 주 육소야는 류만 언니에게 붙들려 있을 것이다.
휴, 류만 언니도 참 힘들겠다. 다만, 뭐 하러 저렇게 스스로 낮추는 거지.
영원을 정북후부에 데리고 간 묵칠은 후부의 사환이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대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사환에게 분부했다.
“이만 돌아가자. 더 늦으면 할머님이 걱정하신다.”
중문으로 들어간 영원은 사환의 손을 놓았다. 살랑살랑 바람을 맞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술을 가져오라고 분부하고 한 손을 뒷짐 진 채 성큼성큼 화원으로 들어갔다.
정북후부 후화원에 있는 호수 위 누각, 영원은 홀로 흔들의자에 앉아서 한 손엔 주전자,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만취할 때까지 술을 퍼부은 그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주전자와 술잔을 호수에 내던지더니 술통도 들어 올려 물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물결이 이는 호수를 마주하고 양손으로 난간을 짚은 채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누이와 조카가 새장에 갇힌 지 벌써 십 년. 십 년 동안 그 새장 안에서 한 걸음씩 죽을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무기력하게 눈을 빤히 뜨고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즐거움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다채로운가. 그는 그런 것들을 즐기고 누릴수록 고통도 깊고 짙어졌다.
밤에 만취한 영원은 다음 날 평소보다 반 시진 일찍 일어났다.
무예를 수련한 다음 다시 목욕하고 직철만 걸치고 탑상에 정좌하고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제 추태를 보였다.
오가아의 안위, 드러난 다음의 후환, 그리고 제어할 수 없이 상황이 흐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어쩌면 조금의 두려운 마음도. 그런 상황에 침착함을 잊고 코가 꿰인 채 종일 끌려다니고 말았다.
그 생각이 들자, 영원은 더할 나위 없이 후회가 되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오가아가 하루 밖에 나간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허둥대고 혼란스러워하다니.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그동안 자신을 과대평가한 모양이었다.
오가아를 데리고 나간 일에서 이가 낭자는 기껏해야 집행자, 그녀를 쥐고 흔든 것은…… 복안 장공주다!
무슨 생각일까? 단순히 오황자가 마음이 아파서 하루 놀게 해준 걸까? 하하. 그럴 리가. 그야말로 우스운 말이지. 복안 장공주는 그가 경성으로 오기 전에 아버지가 조심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 사람이었다. 경성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그녀의 영역에 발도 들이지 못할 정도로 조심했다.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기 전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공주가 어째서 오가아를 데리고 나온 걸까?
경고하려고?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눈치채서? 무엇을 경고하려고? 어떤 일로? 아니면 모든 것? 내가 경성에 온 것부터?
영원은 일일이 되짚어 봤지만, 아무런 두서가 없었다.
아무래도 보림사에 갈 계획을 세워야겠군. 게다가 빠를수록 좋아!
영원은 일어서서 사환을 불러 옷을 갈아입었다.
이왕 온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 앞에 누가 막고 있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든, 죽든 살든,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더라도 용감히 나가야 했다. 돌진해서 달려야만 했다.
연향루, 아라는 모두를 배웅하고 폭신한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다. 다다가 바쁘게 정리하는 것을 근심스럽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끄러운 밤이었어.”
“소저, 매일매일 떠들썩해야 좋다고 행수 어르신이 그러셨잖아요. 떠들썩한 건 걱정할 거 없어도, 썰렁해지면 걱정이라고요.”
아라의 미간이 더 깊게 좁혀졌다. 그녀는 손수건을 서서히 비틀면서 한참 멍하니 있다가, 다다에게 묻는 듯 또 스스로 묻는 듯 입을 열었다.
“영 칠야가 술에 취하지 않아서 남았더라면…….”
“그럼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다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영 칠야는 잘생기긴 했는데, 너무 사나워요. 역시 묵 칠소야가 좋아요. 다정하고, 대범하고! 류만 소저는 하루 만에 은표를 한 다발을 벌었어요. 다 50냥짜리에요! 몇천 냥은 될걸요!”
“그래.”
아라는 자기 생각에 빠져서 희미하게 대답하고는 한참 동안 손수건을 비틀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다, 있잖니, 주육이 또 오면 어떻게 하지? 난 정말 꼴도 보기 싫단다! 속물 같고 억지는 또 얼마나 쓰니.”
“저도 주육 소야는 싫어요. 쩨쩨해요! 돈 한 번 줄 줄 모른다니까요!”
다다는 자신만의 평가 기준이 있으니, 모든 건 돈을 많이 주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그저께 류만 언니한테 들었는데, 조 시랑이 오려다가 칠소야가 있다는 걸 듣고 그만뒀대.”
아라는 몽롱한 두 눈으로 한마디 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다다, 칠소야라고 해도 난 못 견디겠어. 생각만 해도 성가시고 역겨워. 그냥 이야기나 하면 좋잖아. 난 그건…….”
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안 되죠. 행수 어르신 말이, 사내는 다 여인의 몸을 노리고 온댔어요. 침상에서 딱 붙들어야 진짜로 붙잡는 거라고요.”
다다는 이론 하나는 매우 확실했다. 아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릴 때부터 방중술이 제일 싫었다. 그녀는 시, 노래, 금기서화가 좋았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마주 앉아 우아한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나 좋은가.
“소저, 계속 그러시면 안 돼요. 행수 어르신이 이미 주 육소야의 돈을 받았어요. 머리 장식도요. 오늘 쓰셨잖아요. 더 미루면 안 된다고 행수 어르신이 말씀하셨어요. 주 육소야가 화를 내면 아무도 못 말려요. 주 육소야가 화를 내면 모든 게 우리 잘못이 돼요. 할 말이 있어도 우리 잘못인데, 하물며 할 말이 없잖아요!”
다다는 차를 따라주며 행수기녀의 불평과 경고를 충실하게 아라에게 전했다.
아라의 눈꼬리를 타고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다다, 난 진짜 이렇게 일찍…….”
아라가 차를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남의 첩이 되고 싶지 않아. 새장에 갇히는 거 같잖아. 안주인이 좋은 집안이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행여 고약한 사람이면……. 그냥 난도질 되길 기다리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는 거잖아. 설령 안주인이 어질어도 그래. 저택 깊은 안채에 갇혀서 외출할 기회도 없을 거야. 꼭꼭 싸맨 마차에 앉아서 절에 가서 향이나 피울 수 있으면 다행이게? 우리처럼 창문을 활짝 열고 구경하지도 못해. 답답하면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하고, 얼마나 좋아. 얼마 전에 왔던 서생들, 얼마나 우아해. 그리고 계가 공자도……. 휴!”
다다의 두 눈이 빛났다.
“칠소야가 소저를 집으로 들인대요? 그럼 얼마나 좋아요! 소저, 멍청한 짓 하지 마세요! 쉽게 바랄 수도 없는 일이라고요!”
다다는 돌아서서 찻잔을 내려놓고 폴짝 달려왔다.
“소저, 지금 묵가에 들어갈 수 있으면 제일 좋아요. 아직 칠소야 시중밖에 들지 않았잖아요. 그야말로 결백한 몸이라고요. 저택에 들어가면 신분이 달라요. 칠소야는 아직 혼담이 오가지 않았는걸요! 소저가 가장 먼저 저택에 들어가 봐요, 정이 얼마나 깊겠어요. 그게 보통 정이에요? 법도가 엄한 집안이라서 칠 소내내가 들어온 다음에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어차피 소저는 어리잖아요. 나중에라도 많이 나을 수 있어요. 설령 한둘이라고 해도 좋지요. 얼마나 좋아요! 한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요! 류만 소저는 조 시랑 댁에 들어갈 생각까지 하는걸요. 조 시랑이 몇 살이냐고요! 조가 소야가 이 주루를 다 드나드는걸요.”
다다가 들떠서 재잘거리는 말에 아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다, 그만해. 다 알아. 무슨 방법이 있겠어. 칠소야가 조 시랑보다야…….”
아라는 역겨운 듯 헛구역질했다.
“칠소야가…… 저속하긴 해도, 적어도 나한테 잘해주잖아. 그렇게 하자. 어차피 언젠간 속량할 거니까.”
아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등 산장으로 돌아간 이동은 새벽까지 기다려도 문 이야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도 돌아오지 않자 방으로 돌아갔고 뜻밖에도 단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수련이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태태는 인시 초에 돌아오셨어요. 돌아오시자마자 잠자리에 드셨고요, 아직 주무세요. 문죽에게 지키고 있다가 소식을 달라고 했어요. 문 이야는 이각 전에 돌아오셨어요. 목욕하시겠다고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셨대요. 소유 언니가 녹두 양고기 탕, 생선살 교자를 만들어서 목욕을 마치고 나올 시간에 가져다드리겠대요. 대야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이야가 소식은 보냈어요. 대야는 여 대소야랑 같이 계신대요. 오늘도 종일 문회에 참석할 예정이라 저녁에나 돌아오신다고요.”
이동은 안도하며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어느 시진이야?”
보림암으로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나 이야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인시 말이에요. 이야가, 오늘은 일찍 보림암으로 가시래요.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자고 하세요.”
“그래.”
문 이야는 아마도 복안 장공주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이야기할 생각인 듯했다. 어찌 됐든 복안 장공주에게 받은 임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