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언짢은 기분
“칠야, 장공주께선 별원으로 데려다주라고 하셨어요. 데리고 온 곳까지 데려다주는 게 좋다고요. 게다가 칠야는 얼른 돌아가셔야지요.”
마차에서 내린 이동은 영원을 향해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동을 살폈다가 시선을 돌리니 긴장한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는 오황자가 보였다. 영원이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을 때, 초조하고 화가 난 기색은 싹 사라지고 눈빛은 맑디맑았다.
“오늘 하루 고생했습니다. 이 낭자, 너무 신경 쓴 탓에 무례했던 건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이동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영 칠야, 역시 문 이야의 말 대로였다. 절대로 겉으로 드러낸 것처럼 어리석고 생각 없는 망종이 아니었다. 잘못을 알고 곧바로 인정하는 것만 봐도 세도가 자제에게선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살짝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 마차에 올라 장공주의 별원으로 향했다.
영원은 말머리를 돌리고 모두에게 손짓해서 경성으로 돌아갔다.
별원 측문 밖, 오황자가 타고 왔던 마차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곁에 서 있던 녹운은 오황자가 내리는 걸 보고 뒤쪽 마차에서 오황자가 올 때 입고 왔던 옷을 들고 내렸다.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오황자는 잔뜩 굳은 얼굴로 녹운을 힐끔 보고는 이동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오황자가 자꾸 잡아당기자 이동이 웅크리고 앉았다.
“내년에도 날 데리고 놀러 가줘. 그럴 수 있어?”
“알았어요.”
이동은 마음이 시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게 어디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일까. 그래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웃음 지으며 이동의 옷을 놓은 오황자는 그녀를 마주 보며 한 걸음 뒤로, 또 한 걸음 뒤로, 그렇게 서너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겨우 돌아섰다. 몇 걸음 만에 마차로 달려간 오황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마차에 올랐다.
녹운과 이동은 마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수고했어요, 이 낭자. 장공주께서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시고, 이야기는 내일 하라고 분부하셨어요.”
녹운이 복안 장공주의 말을 전하자, 이동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마차에 올라탄 후 곧장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 온 이가가 애를 쓴 끝에 드디어 무사히 일이 끝났다. 며칠 더 기다려 보고 그때도 경성이 아무 일 없이 조용하면 이번 임무는 원만히 끝나는 셈이었다.
마차에 앉아서 하루를 곱씹어본 이동은 안도하다가 오황자를 떠올리고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씁쓸해졌다.
사환과 한 무리 사냥개와 합류한 영원은 그 길로 바람같이 경성으로 돌아갔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육이 ‘영원 형!’ 하고 크게 고함치며 다루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형님! 형님! 드디어 돌아왔네! 한참 찾아다녔는데, 어딜 그렇게 다닌 거요? 자주 가는 곳은 모두 뒤졌는데 안 보이잖아! 얼마나 다급했는지……. 어쨌든 이 문으로 나갔다길래, 어쩔 수 없이 여기서 기다렸지. 정말로 만날 줄이야! 형님, 어디 좋은 곳을 또 찾은 거요?”
튀어나오자마자 영원의 고삐를 잡아챈 주육은 어서 제 말을 끌고 오라고 손짓하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영원의 얼굴에 성가신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그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할 일이나 할 것이지, 나는 왜 기다려. 너는 나처럼 한가한 사람과 똑같이 굴면 안 되지!”
“할 일은 다 했지. 가면서 이야기하자고요. 아이고, 형님! 내가 너무 답답해서 그렇지. 형님이 아니면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걸? 묵칠 그놈, 정말 말 같지 않다니까? 이 몸이 아주 그냥 그놈을 콱 때려주고 싶다니까?”
주육이 울상을 지었다. 영원을 형님으로 인정한 후로, 그도 자신을 ‘이 몸’이라고 가리키기 시작했고, 툭하면 때리겠단 소리를 입에 달고 지냈다. 싸워서 이길 사람이 있기나 한지는 세세히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또 아라에게 퇴짜 맞았지?”
영원은 주육이 말에 올라타는 잠깐 사이에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평소처럼 껄렁거리며 웃음 지었다. 불쌍한 오가아를 위해서, 성질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바로 맞추는군! 은자도 충분히 보냈고, 머리 장식도 만들어서 주었는데, 오늘도 이리저리 핑계 대고 거절하잖아. 이 몸이 그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뭘 더 어쩌라는 거냐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향루에 묵을 거라는 전갈을 전했는데, 웬걸, 아라가 묵칠을 불렀지 뭐요. 묵칠 그놈은 모르는 척하면서 오늘 연향루에서 묵을 거라지 뭐야. 홧김에 나와 버렸지.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주육이 계속해서 툴툴거리자, 영원이 비딱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소칠이 그 아라를 얼마나 오래 바라봤지?”
“아라가 이름을 올린 지 겨우 1년이라고!”
“그럼 1년이라고 하자. 1년이나 바라봤다! 손에 넣은 지 며칠 됐다고. 신선함도 아직 안 가셨겠다. 네가 좀 이해해라.”
“이해는 개뿔! 신선한 재미를 다 보고 나면, 아라도 그놈 손에 농염해질 텐데, 그게 무슨 재미가 있어서? 이 몸도 서툰 게 좋단 말이지! 농염해지면 그게 무슨 재미야!”
“아이고. 하! 그건 그렇다!”
영원이 하하 웃으며 맞장구쳤다.
“재미있군. 아니면, 지금 가볼까?”
“형님이 나서준다면야! 오늘 밤은 형님에게 양보하지. 형님부터 신선한 재미를 보라고!”
주육은 매우 기뻐했다. 꾀를 얻으러 온 것인데, 영원 형님이 직접 나서줄 줄은 몰랐다. 영원 형님이 이토록 제 마음을 알아주는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얼른 보답해야지!
“영원 형님, 아라처럼 태생이 요염한 아이가 좋다고 했잖소. 통쾌하게 즐길 수 있다고 말이야.”
주육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하하 웃었다.
“아라 같은 아이는 가까스로 봐줄 만한 거다. 기껏해야 하품(下品)이지. 아름다움과 요염함은, 아름다움을 스스로 깨닫지 못해야 하며, 뜻하지 않은 요염함이 느껴져야 진짜인 거다. 아라는 아름답고 요염하다는 자긍심에 자만하잖냐. 그것만으로 품위가 떨어진다.”
“그럼 형님, 경성에 누가 상품이지? 중품도 괜찮고.”
주육의 두 눈이 빛났다. 미인을 품평하는 면에서 그는 자신이 영원 형님에게 절대 못 미치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영원은 실실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만난 이 낭자가 바로 상품 중 상품이지. 지극히 아름답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부드러우면서 강단 있고. 요염함은 모두 뼛속에 감춘, 진정한 경세가인이지!
주육은 말을 빠르게 달려 연향루로 직행했고, 영원은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연향루 앞에 막 도착하자, 묵칠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영원 형님, 왔소? 어서, 어서 들어와요. 류만 소저를 부르라고 할까? 운수? 아니면 또 누가 있지? 형님, 찍기만 해. 육랑, 너도 찍기만 해! 오늘은 내가 낸다! 다 나한테 맡겨!”
“연향루가 얼마나 크다고, 마음껏 찍으라는 거냐. 사람이 많아지면 어떻게 다 앉으려고. 왜? 동지도 안 됐는데, 빽빽이 몰아넣고 교자라도 찌려고?”
묵칠을 보자, 주육은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툴툴거렸다. 묵칠은 허허 웃으며 난감한 얼굴로 도와달라는 듯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은 전혀 못 본 척하면서 옥이 박힌 채찍을 흔들며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라는 온순하게 계단 가에 서 있다가 영원이 올라오자 고개를 숙이고 촛대처럼 꼿꼿이 예를 갖췄다. 영원은 걸음을 멈추고 위아래로 그녀를 잠시 훑어보다가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주육은 퉁명스럽게 묵칠을 밀고 영원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아라가 보이자 성큼 다가가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 거의 뺨에 얼굴을 붙일 듯한 거리에서 말했다.
“아라, 네 냄새 좀 맡아보자. 음! 마침 향긋할 때로구나.”
묵칠이 주육을 뒤에서 밀며 난처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오늘은 술을 집에서 가지고 왔다. 족히 50년은 된 여아홍(女兒紅)이야. 분명 마음에 들 게다. 다만 영원 형 입맛에 맞을지 문제지. 남쪽 술은 약하니까 말이야.”
“왜? 아라가 50년 된 여아홍을 좋아하나? 음! 좋지. 살짝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도 운치 있지.”
묵칠에게 밀려 빙그르르 돈 주육은 다시 돌아서서 아라를 붙잡았다.
“자, 이 몸과 함께 마셔보자꾸나. 이따 밤에…… 오늘 밤엔 영 칠야를 제대로 모실 준비해라.”
아라는 벌써 팔걸이의자에 나른하게 앉은 영원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봤다. 묵칠도 살짝 얼굴이 굳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 지었다.
“얼른 다다에게 술을 데워오라고 해라. 어서 새로 음식을 내오지 않고 무얼 하는 거냐? 서둘러라! 형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올리란 말이다!”
묵칠과 주육도 자리를 잡고 앉았고, 아라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묵칠 곁에 앉았다가 다다가 술을 내어오자 후다닥 일어났다. 영원은 손으로 술잔을 덮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이 더운 날 따듯한 술이 웬 말이냐. 누가 보면 우리가 칠십 노인인 줄 알겠다. 이건 됐다. 내려가서 내 사환에게 포도주 가져오라고 전해라. 냉침해서 마시자.”
“있어요, 있어. 연향루에도 좋은 포도주가 있어! 아라, 얼른 가지고 오라고 해라. 수정 잔도 가지고 오고. 그리고 얼음도!”
묵칠이 손을 저어대며 분부하자 아라가 직접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포도주가 올라왔고, 아라는 류만, 운수와 함께 올라왔다. 류만과 운수가 있으니, 아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편안해 보였다.
영원은 흘깃 그녀를 바라보고는 올라오자마자 열정적으로 모두에게 예를 갖추고 추파를 던지는 류만, 그리고 올라오자마자 다다에게 술 주전자를 건네받아서 모두에게 술을 따르는 운수를 바라봤다.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모든 이의 팔과 어깨에 몸을 비비는 운수는 모두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은 듯이 보였다. 그런 두 사람과 비교하면 아라는 참으로 태만하지 않은가.
영원은 수정 잔을 들고 빙빙 돌리다가 향을 맡고서 제법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잔을 내려놓고 더 따르라는 듯 운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너는 여기 앉아라. 다른 사람은 상대할 것 없다. 오늘 밤엔 이 몸 시중만 들면 된다.”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얼른 앉지 않고 무얼 해!”
호가호위하는 데 가장 능한 주육은 한 손으로 류만의 버드나무 같은 허리를 감싸고서 운수를 향해 분부했다. 운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영원 곁에 바짝 앉아서 가슴을 거의 비빌 듯이 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칠야, 주량이 아주 세다면서요?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내가 술독이냐!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순 있지만, 천 잔을 어찌 이 배에 다 담아?”
영원은 다시 고개를 젖히고 술을 비우고는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아라를 가리켰다.
“얼굴 좀 보게 이리 오너라.”
아라가 묵칠을 바라보자, 묵칠이 얼른 그녀를 밀었다.
“형님이 부르지 않으냐. 어서 가라.”
아라는 겁먹은 모습으로 음전하게 일어서서 영원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앉아라. 얼굴 좀 제대로 보자.”
영원이 다리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아라는 다시 묵칠을 바라봤다. 묵칠은 잔을 들고 류만에게 얼음을 채워달라고 하느라 영원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 도와달라는 듯 바라보는 아라의 시선도 당연히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