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느긋함
“시간은 물살처럼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정말 전광석화 같아! 더 빠르게 달릴 순 없어?”
오황자는 갈망하는 얼굴로 이동을 돌아봤다. 이동은 돛을 모두 올리라고 뱃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그 말에 나머지 돛도 죄다 올라가고, 배의 속도가 바로 빨라졌다. 배를 스치고 흐르는 물살은 안정적이던 흐름에서 급류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오황자는 흥분해서 꽥꽥 소리쳤다.
“더 밖으로. 좀 더 밖으로 내밀어줘. 바람맞을래!”
이동을 돌아본 뱃사람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료에게 아예 판자를 가지고 오라고 고함쳤다.
노삼이라고 불린 뱃사람은 너비 두 척, 길이 한 장 정도의 오동나무 판자를 가지고 나와서 뱃전에 길게 내밀고 다른 쪽은 닻 기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위로 폴짝 올라가서는 오황자를 안아서 판자 위에 올려주었다.
뒤에서 배를 타고 바짝 쫓아오던 문 이야는 목판 위에 서서 흥분한 모습으로 팔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고함치는 오황자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숨을 내쉬었다.
이씨 일가 세 사람, 하나같이 단순하지 않아. 어린 낭자일 뿐인데, 이 어린애가 어떤 신분인지 빤히 알면서도 저렇게 담대하게 굴다니. 사내 중에서도 저렇게 할 자가……. 나라면…….
문 이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한참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분명 못할 것이다.
휴. 어린 낭자가 수단도, 배포도, 안목도 있고, 침착하고 어른스러운데 강가는 저런 낭자를 눈에 차지 않아 하다니. 안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태산을 눈앞에 두고 몰라보는 지경이지!
강가 같은 진흙탕에 갇혀 사는 게 아깝군.
“이야, 배가 있습니다!”
이가 호위 유노삼이 알리는 말에, 문 이야는 다급하게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다섯 개의 돛을 전부 올린 범선이 번하에 흔한 삼장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지금 막 돛을 내리고 있었다.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고!”
문 이야는 우선 유노삼에게 분부하고 빠르게 선창 안으로 들어갔다. 품에서 보석이 잔뜩 박힌 망원경을 꺼내서 한쪽 눈을 찌푸리고 한창 돛을 내리는 범선을 바라봤다.
이가에 이런 물건까지 있다니.
문 이야는 망원경을 통해 확실하게 살펴보면서 속으로 다시 감탄했다.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망원경을 내려서 다시 품에 찔러넣었다.
“내가 이야기했던 그 배를 내리고, 저쪽으로 붙이라고 전해라. 저건 영 칠야의 배다.”
“예.”
유노삼도 한시름 놓았다. 이번 임무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열, 그와 큰형님은 모든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목숨을 걸고 나왔다.
이동은 흥분해서 꽥꽥 고함치는 오황자를 선창 앞에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전생에 오황자가 어땠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영 황후가 죽은 후, 오황자와 관련된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백 노부인에게 한 번 물었었는데, 주 귀비가 죽은 다음 황실 후사 중에 오황자의 이름도 없어졌다는 대답만 들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선황의 다섯 황자가 넷으로 변했다고.
아마도 죽었으리라. 영 황후가 죽었는데 살아 있을 리가 있나. 가련하게도 태어나자마자 별궁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옥살이하듯 살았을 것이다.
지금 기회가 생겼으니 마음껏 신나고 재미있게 놀게 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떠올리면 일생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 나는 기억이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게.
영원이 이동의 배를 따라잡았을 때, 마침 오황자가 뱃전에 달랑 걸려서 손발을 휘두르며 꽥꽥 소리 지르고 있었다.
“칠야, 저게…….”
유월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오황자를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영원은 기가 찼다. 오가아를 배 밖에 저렇게 걸어 놓다니, 대체 누구의 생각인 거냐? 저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이가 그 어린 낭자의 생각이냐? 정말 간이 투실투실하구나!
오가아는…… 오가아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역시 영가의 핏줄이다. 배포가 있어!
“칠야, 오가아를 데리고 올까요?”
유월은 배 밖에 걸린 오황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오황자가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하는 걸 바라보니 살이 다 떨렸다.
물살이 이렇게 급한데, 혹시라도…….
영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럴 것 없다. 살짝 뒤떨어진 거리에서 가까이 붙어서 가라.”
영원의 배는 빠르게 다가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이동의 배를 뒤따랐다.
“낭자, 이야의 전갈입니다. 뒤에 영 칠야의 배랍니다.”
팔짱을 낀 채 중앙 돛대에 기대서 싱글벙글 구경하던 공 대랑이 이동 쪽으로 다가가며 나직이 고했다. 이동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뱃전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영원의 배를 바라봤다.
영원은 선창 앞에 서서 이동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동은 표정 없는 얼굴로 영원을 바라보고 주변에 있는 호위도 한 바퀴 살펴보고는 시선을 거뒀다. 다시 선창 문 앞으로 돌아가, 오황자를 안고 있는 뱃사람에게 말했다.
“소오! 탕 한 그릇 먹고 계속 놀아. 목 다 쉬겠다.”
“소야, 잠시 쉬세요. 낭자가 부르는걸요. 탕 한 그릇 먹고 이따 잡은 새우를 거둡시다.”
“알았다.”
오황자는 마음껏 놀지 못했지만, 미련이 가득한 말투로나마 알겠다고 대답했다. 뱃사람은 오황자의 허리띠를 붙잡기만 할 뿐 힘을 주진 않았다. 오황자는 팔을 벌린 채 스스로 판자 저쪽에서 비틀거리며 갑판 쪽으로 돌아와 폴짝 내려와서 만족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수련, 녹매는 오황자의 손과 얼굴을 닦아주고 다시 머리를 빗겨 주었다. 도 어멈과 소유가 쟁반을 들고 여러 가지 탕을 가지고 왔다. 오황자는 앞으로 나가서 휙 한 번 보더니 녹두탕을 가리켰다.
“난 이게 좋다. 냉침했고? 냉침한 걸 다오.”
“첫째, 이 녹두탕엔 연자와 다진 강낭콩도 있고 기름도 썼어요. 냉침하면 맛이 없답니다. 둘째, 반나절 동안 꽥꽥 고함치셨잖아요. 차가운 건 안 됩니다!”
도 어멈의 얼굴이 엄숙했다. 집에 손자가 많아서 아이 가르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이들은 여름에 차가운 걸 많이 먹으면 안 됩니다. 자, 앉아서 드세요.”
오황자는 도 어멈에게 등 떠밀리듯 선창 안으로 들어가서 고분고분 탁자에 앉아서 따듯한 녹두탕을 마셨다. 이동은 그런 오황자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봤다.
도 어멈이 손자 대하듯 오황자를 대하네.
“배가 조금 고프다.”
오황자가 녹두탕을 몇 입 먹다가 이동을 올려다봤다.
“그건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기다리세요!”
소유가 대답부터 하고는 녹매를 끌고 돌아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이 각각 큰 쟁반을 안고 돌아왔다.
“야채 교자, 게살탕포(湯包: 육즙이 들어간 찐만두), 율자니(栗子泥: 밤앙금), 홍두소(紅豆酥: 팥 페스추리)예요. 하나만 고르세요. 많이 먹으면 점심을 못 먹어요.”
소유가 오황자의 새빨간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이렇게 발랄하고 예쁜 아이가 너무 좋았다.
“꼬집지 마라!”
오황자가 소유의 손을 탁 쳐냈다.
“야채 교자가 무엇이냐?”
“야채 교자는 야채로 만든 교자예요. 교자 드셔보셨죠?”
소유가 눈을 깜빡이며 놀리자, 오황자는 눈을 흘겼다.
“누가 교자를 안 먹어 봐! 야채가 뭔지 모른단 소리다.”
“아, 야채요. 들에서 자라는 채소에요. 매우 맛있답니다. 드셔보세요. 우리 낭자도 맛있다고 하는 거랍니다.”
소유는 야채 교자를 오황자 앞에 놓아주고 나머지는 치웠다. 오황자는 교자 하나를 집어 들어서 보고 또 보다가 살며시 한 입 깨물었다. 살짝 맛을 보더니 입술을 핥고는 덥석덥석 먹기 시작했다. 몇 입 만에 작은 접시 위의 교자를 다 비우고는 여운이 남은 듯 접시를 곁에 있는 이동에게 들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접시가 참으로 작구나!”
“이따 진하 부두에 도착하면 내려서 구경할래요?”
이동은 마음이 시큰거렸다.
“음…….”
오황자가 탁자 위로 엎드려서 이동을 바라봤다.
“너는 주루에 가봤고? 주루에서 밥을 먹어 봤어? 맛있더냐? 따지는 게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음, 주루 음식은 저희 집 음식보다 별로예요. 따지는 게 많다는 것도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에요. 밥 먹고, 돈을 내고. 다른 건 없어요. 이따 진하 부두에 도착해서, 상황 보고 괜찮으면 주루에 데리고 가드릴게요. 하지만 진하 부두에 있는 주루엔 먹을 만한 음식이 없어요. 밥은 돌아와서 먹어요. 어때요?”
“좋다!”
오황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장공주께서 널 좋아하지. 음, 제법이구나!”
“장공주께서 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세요?”
이동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날 너와 함께 보냈겠느냐?”
오황자가 이동을 흘겨보고는 재차 힘주어 강조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모르는 게 없다! 난 장공주가 아주 좋다.”
“저도 장공주가 아주 좋아요. 오황자도 아주 좋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오황자가 이런 사람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새우 거두는 걸 보러 갈 테다!”
오황자는 이동의 말에 수줍어졌는지 벌떡 일어나서 선창 밖으로 나갔다. 이동도 일어서서 선창 입구까지 따라갔다.
영원의 배는 더 가까워져서, 옆으로 조금 떨어지긴 했어도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영원은 선창 문 앞에 서서 이동의 배를 지켜봤다. 두 뱃사람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고래고래 고함치며 잡은 새우를 거두는 걸 지휘하는 오황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동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얕잡아 본 듯했다. 적어도 그녀의 배포는 얕잡아 봤다.
오늘 자기가 데리고 나온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 분명 확실하게 알 것이다. 데리고 나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다니. 장공주의 말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 본인의 뜻일까.
어느 쪽이든 간이 보통 부은 게 아니지!
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위아래로 이동을 살폈다. 백릉(白綾: 아른거리는 무늬가 있는 흰 비단) 웃옷, 푸릇한 대나무를 수 놓은 백릉 치마, 푸른 강물,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뒤로 뱃머리에 서 있으니 한 폭의 담박한 그림처럼 느껴졌다.
담박하고 우아하고, 강남 수묵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이 그림은 놀랍게도 북부 사내의 배포, 기백에 뒤지지 않았다.
이동은 영원의 상당히 비우호적인 시선을 느꼈지만, 상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오황자를 데리고 나왔으니 영원이 분노하리라 진작 짐작했다. 사실 장공주가 받을 분노를 그녀가 대신 받는 것이리라.
이동은 오황자만 바라봤다. 갑판에 엎드린 오황자는 뱃사람이 들어 올린 통에서 펄떡펄떡 뛰는 대하를 보더니 놀라고 흥분해서 꽥꽥 고함쳤다.
“내가 하마! 내가 들겠다! 악, 무는구나! 새우가 투명한 것이었느냐? 이놈으로, 이놈으로! 정말 크구나! 내게 다오! 우아! 이것으로 새우를 잡은 거로구나!”
오황자는 새우 미끼인 신선한 닭 내장을 보고는 징그럽다고 꽥꽥 외쳐대면서도 손으로 뒤적였다.
“냄새는 안 나느냐? 참 재미있군! 여기에도 새우가 있다! 으으, 징그러워라! 이건 또 무엇이냐? 엑! 정말로 닭똥이 있다고?”
오황자는 닭 내장을 파내려고 손을 내밀다가 뱃사람에게 휙 밀려났다.
“소야! 이걸 정말로 파냈다가는 점심 다 드시는 줄 아세요!”
“한 번만 파보려 했지.”
오황자가 깔깔 웃으며 갑판에서 뒹굴었다.
그런 오황자를 바라보는 영원은 정말로 이가 갈렸다. 이 생질에게서 영가 사내의 풍채가 물씬 느껴졌다. 저런 아이를……. 그러나 보아하니 건강하고 영특하고 용감해 보였다.
그거면 됐다. 누님, 그동안 참 힘드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