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강적을 마주한 듯이
오늘은 오황자의 생일이지만 영원은 조회 당직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밖으로 나간 영원은 어전사 당직방에서 한참 눌러앉아서 술자리 약속을 몇 건 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갔다.
선덕문으로 나가자마자, 사환 대영이 후다닥 달려왔다.
“칠야, 드디어 나오셨군요. 육야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숨넘어갈 뻔했습니다.”
“무슨 일이냐? 차분히 말해 봐! 왜 이리 당황한 것이야?”
영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은 오가아의 생일이라 유월은 지금쯤 별궁에서 별원으로 가는 길에 오가아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숨이 넘어갈 일이라니…….
“소인은 모릅니다. 육야가 말을 안 합니다. 저 앞에 있습니다.”
대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초조한 얼굴을 다급하게 감추고 평소와 다름없는 우직한 미소를 지었다.
영원이 말에 올라 모퉁이를 돌아서자, 유월이 급하게 마주 달려왔다.
“칠야, 드디어 나오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자등 산장 이동이 오가아를 별원에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조금 전에 온 소식으로는 배를 타고 변하 방향으로 간답니다.”
영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유월은 얼굴을 굳힌 채 초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칠야께 보고하러 궁 안까지 소식을 전할 순 없어서, 소인이 칠야의 명령인 척 모든 인원을 강가로 보내 호위하고 있습니다. 최신에게는 복백이 직접 갔습니다.”
“잘하였다. 대영, 복백더러 저택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최신에게 모든 인원을 출동시켜 곳곳에서 지켜보라고 전해라.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복백에게 보고하고. 너는 가서 세견을 싹 다 데리고 나와라. 산책 가야겠다.”
분부를 마친 영원은 사환 대웅, 대호, 대걸을 불러 각각 일을 맡기고 성 밖으로 직행했다.
성 밖으로 나온 유월은 호위들과 반지르르하니 지나치게 예쁜 세견 수십 마리를 데리고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그렇게 모퉁이 몇 번 돌면서 변하로 곧장 향했다.
변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다른 영원은 유월과 몇몇 심복을 데리고 몰래 무리에서 빠져나와 말을 버리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빠른 걸음으로 강가로 달려가 배를 탔다.
이동이 오황자를 데리고 나왔을 때, 마차는 이미 측문에 바짝 붙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측문의 난간은 이미 없애두었고, 이동은 문 안에 선 채 우선 오황자를 마차에 태운 다음 뒤따라 탔다.
“너희들은 뒤에 오는 마차를 타라. 마차에 오른 다음엔 옷을 갈아입고.”
이동이 오황자의 호위에게 지시하자, 두 사람은 오황자를 힐끔 봤다. 하지만 오황자가 말이 없자 곧장 뒤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동이 마차에 오른 다음 수련이 문을 닫고 휘장을 내렸다. 마차는 살며시 흔들리더니 점점 빨라졌다. 녹매는 숨겨진 서랍에서 한 무더기 옷과 신발을 꺼냈다.
오황자는 이동을 바라봤고, 이동은 옷과 신발을 가리켰다.
“옷 갈아입어. 그리고 신발도. 그래야 돌아다닐 때 편하단다.”
“이 옷도 괜찮은데.”
오황자는 옷과 신발을 바라보다가 이동을 돌아봤다.
“소야의 옷도 물론 좋지. 이 장삼, 무늬 좀 봐. 올해 봄에 새로 들어온 무늬네. 천수만복 불단두(天壽萬福不斷頭)라는 무늬지. 변하, 그리고 진하 부두를 왕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썰미가 좋고 영리한 큰 상인과 식견 넓은 똑똑한 사람들이야. 딱 봐도 이 옷감이 특별하단 걸 알 거야. 일반인은 입지 못하는 거지. 그리고 신발도. 각사 천이야. 무늬도 보렴, 운문(雲紋)에 비늘에, 금룡희주(金龍戱珠) 각사 천을 자른 걸 거야.”
오황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동을 바라봤다.
“그, 그, 그걸 어떻게 알아?”
“봐. 나도 알아보는걸. 그리고 소야의 바지, 광서에서 나는 목면으로 짠 거야. 두꺼워 보여도 통풍이 잘되는 천이라 여름에 입으면 너무 시원하지. 이런 천은 생산량이 지극히 적어서, 모두 진상품으로 써야 해. 올핸 나무가 많이 말라 죽어서 생산량이 더 적었다고 들었어.”
오황자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복두도. 천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옥만 해도 지극히 귀한 거야. 얼마나 귀한 가문이길래, 이런 벽옥을 열 살도 안 된 아이 복두 장식으로 쓸까?”
“갈아입을게. 갈아입으면 되잖아.”
오황자가 복두를 덥석 벗었다.
“수련과 녹매가 시중들 거야. 내의만 빼고 싹 다 갈아 입혀드려. 그리고 비녀도.”
이동은 웃으면서 수련과 녹매에게 지시하고 얼굴을 돌리고 휘장 틈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마차가 두 무리의 행상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 똑같은 마차 서너 대가 마찬가지로 그 사이를 지나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동의 오동나무 마차는 황동으로 테두리 장식을 하고 푸른 포목 휘장에 가는 백사(白紗) 휘장을 드리웠다. 조금 부유한 집안의 마차는 거의 이런 마차였다. 경성의 몇몇 거마행(車馬行)에서 부자에게 빌려주는 마차도 다 이것과 똑같았다. 똑같이 생긴 마차 여러 대가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평상적인 일이었다.
대교는 마차를 매우 빠르지만 안정적으로 몰았다. 수련과 녹매 모두 모처럼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오황자의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입혔다. 머리카락도 다시 새로 빗어 올려주고는 상당히 괜찮은 물건이지만 오황자가 원래 꽂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양지옥잠을 꽂아주었다.
이동은 휘장을 내리고 오황자를 다시 살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오황자는 아까보다 훨씬 평범한 공자처럼 보였다.
“여기에도 있구나. 웬 옷이 이리 많은 거지? 다 같은 건데?”
옷을 갈아입은 오황자는 뭐가 없어졌는지 자리를 옮겨 녹매가 아직 치우지 못한 옷과 신발을 뒤적거렸다.
“소야가 키가 큰지, 몸집은 어쩐지, 발은 얼마나 큰지 몰라서. 여러 벌 지었어. 우리 같은 집안은 어른이든 아이든, 새 옷이 아닌 건 괜찮아도 더럽거나 몸에 맞지 않는 건 절대로 안 되잖아.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었다가는 눈에 띄잖아.”
이동은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며 매우 상세하게 대답했다.
“음, 세심하네.”
오황자는 손을 거두고 자리를 옮겨서 마차 밖을 바라봤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반각 정도면 도착해.”
“내가 누군지 안 거야?”
오황자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이동이 생긋 웃었다.
“소야 생각에는요?”
“능청 떨기는!”
오황자가 입을 내미는 모습에 이동은 실없는 웃음이 나와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이따 배에 타면 바로 선창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마세요. 작은 배라 위험해요. 큰 배로 갈아탄 다음에 뱃머리에서 경치 구경해요. 어때요?”
“나도 안다. 내가 어린앤 줄 아느냐?”
오황자가 이동의 손을 쳐냈다. 이동이 자기가 누군지 진작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연연하는 듯했다.
이야기 나누는 사이, 마차가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녹매가 먼저 뛰어내린 다음 휘장을 젖혔다. 대교가 오황자를 안아서 내리고, 이동이 뒤따라 내렸다. 수련이 보따리를 안고 맨 마지막에 내렸다. 보따리엔 오황자가 갈아입은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대교가 오황자를 안고, 다 같이 매우 빠르게 배에 탔다. 수련의 발이 막 발판에서 떨어지자마자, 뱃사람이 발판을 걷어찼다. 작은 배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작은 배 앞뒤로 똑같은 작은 배 다섯 척이 나란히 움직였다. 맨 끝의 배엔 문 이야가 선창에 단정하게 앉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특히 뒤쪽의 기척을.
영원이 변하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이동과 오황자의 큰 배를 뒤쫓아 왔을 때, 이동과 오황자의 큰 배는 이미 순조롭게 바람을 타고 강물을 거슬러 5리 정도 흘러간 때였다.
이동과 오황자가 탄 큰 배와 변하에 오가는 배들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탁 트인 전창에 천막을 치고, 선창에 놓인 탁자와 의자 곁엔 어멈과 시녀들이 서 있었다. 이동은 선창 입구에 서서 뱃사공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오황자를 바라봤다.
배에 탄 오황자가 새카맣게 그을린 건장하고 투박한 뱃사공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질 줄은 그녀도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오황자는 배에 탔을 때부터 뱃사람의 까무잡잡한 종아리, 특히 발바닥을 고개 숙인 채 보고 또 봤다. 이동도 그를 따라 허리를 굽히고 바라봤다.
“뭘 보는 거니?”
“어느 책에서 봤는데, 뱃사람은 어릴 때부터 맨발로 다녀서 발이 보통 사람보다 더 크고 발가락이 벌어져 있다더니, 정말이었어!”
오황자는 책에서 본 내용이 사실인 것에 놀라기도 하고 유감이기도 하고 김빠진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품행을 단속했구나?”
이동이 웃으며 하는 말에 오황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것 아니다! 하지만 너 꽤 총명하긴 하네.”
“당연하지.”
이동은 애어른 같은 오황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오황자는 상대하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해서 뱃사람을 관찰했다. 돛을 올리느라 열심히 갑판을 밟는 뱃사람들의 발, 종아리를 바라보고 수시로 불끈 솟는 핏줄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고 만졌다. 뱃사공의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올라가던 돛이 훅 떨어졌다.
뱃사공이 웃으며 몸을 피했다.
“소야! 발이 더럽습니다. 만지면 안 돼요!”
오황자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자네 발에 핏줄이…… 올라왔길래.”
이동은 웃음도 나고 안쓰럽기도 했다. 사람을 거의 만날 일이 없다가 외출을 해서 온갖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수련과 녹매는 이동이 분부하지 않아도 서둘러 깨끗한 수건을 짜서 오황자의 손을 닦아 주었다.
“착하기도 하시지. 괜찮습니다. 우리처럼 힘쓰는 사람들은 다 이렇습니다.”
뱃사람이 껄껄 웃으며 돛을 올렸다.
“힘쓰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힘을 세게 주거나 화가 나면 다 이렇게 돼.”
이동도 설명을 보태자, 오황자가 부끄러운 듯 화를 냈다.
“나도 다 알아! 설명할 것 없어!”
그러고는 갑판 저쪽으로 가더니, 배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밧줄을 밀고 당기는 뱃사람을 고개를 내밀고 바라봤다.
“넌 무얼 하느냐? 떨어진다, 조심해라.”
“소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떨어지지 않아요. 떨어진대도 아무 일 없고요! 새우잡이 통을 놓는 것입니다. 점심때 신선한 새우 드실 수 있습니다.”
뱃사람은 활짝 웃는 얼굴로 뒤돌아보며 오황자에게 설명했다.
“나도 보고 싶다.”
오황자가 더 앞으로 몸을 내밀자 한 뱃사람이 다가갔다.
“자, 제가 잡아드릴 테니, 보세요.”
뱃사람은 미리 말부터 하고 오황자의 허리띠를 잡고 살짝 들어 올리면서 몸을 내밀어 보라고 눈짓했다.
오황자는 들뜨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모습으로 고개를 아래로 내밀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물살을 역행하며 전진하는 배의 속도는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물살은 꽤 빠른 편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오황자는 순간 눈앞이 어질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오황자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몸이 앞으로 넘어가려 하자, 뒤에 서 있던 뱃사람이 얼른 일으켜 세우며 뒤로 끌어당겼다.
“물살이 급하면 저희도 어지러운걸요. 소야, 저 멀리 보십시오.”
“괜찮다, 괜찮아. 더 보게 해다오.”
오황자는 흥분해서 발그레해진 뺨으로 팔을 내밀며 수그렸고, 뱃사람은 웃으며 그를 갑판 가장자리에 내려주었다. 물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오황자는 갈수록 흥분해서 팔을 휘두르고 발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