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연극 한 판
“내가 보기엔, 회임한 지 두 달 넘을지도 몰라. 어쩐지 며칠도 못 참고 그 꼴을 하고 저택으로 쳐들어왔지.”
청서가 하는 말의 의도는 매우 분명했다. 추미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요! 그날 미친 듯이 들어왔을 때, 안 그래도 이상하다 했다니까. 떠들썩하고 거창하게 첩으로 들일 거라고 이야기도 다 끝냈는데 말이에요. 대내내가 혼수도 마련해준다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체면도 살고! 그걸 몰랐을까? 굳이 새벽에 보따리 싸 들고 와야 했냐고요. 얼마나 망신스러워! 그때 분명 뭐가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그건 그래.”
춘연도 잠시 생각해 보고는 매우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했다.
음.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 네 이낭 중에 고 이낭이 가장 가증스럽지. 그것이 없어지면, 다들 편하게 살 수 있잖아!
“내가 생각해도 두 달 더 된 거 같아요. 게다가, 그렇게 빨리 회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랑 추미는 더 빨랐는데?”
“이런 말은 우리끼리 하고 말아야 해. 세자야가 오입 지겠다는데, 우리가 뭐라고 할 것 없지. 괜히 남이 들으면 우리만 걷어차여 팔려 간다.”
추미가 춘연의 이마를 쿡 눌렀다. 걷어차고 팔아버린다는 말은 고 이낭이 언젠가 춘연에게 화를 내며 했던 말이었다.
“같은 노비끼리, 누가 누굴 판다는 거야.”
그 말에 춘연은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야 다르지. 그 계집 뒤엔 세자야가 있는걸? 세자야가 그랬잖아. 그 계집이 이 집안의 안주인이라고. 노비면 뭐? 널 팔려면 아무렇지 않게 팔 수 있어. 어리광 한 번 부리면 세자야가 걷어차고 팔아버릴걸? 네가 뭘 어쩔 수 있겠니.”
추미가 손가락질하며 놀리자, 춘연은 화가 났다.
“쯧! 설사 세자야라고 해도……. 잊었어? 우리 매매 문서는 대내내가 가지고 계셔. 팔려고 해도 대내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그건 그렇지.”
추미가 청서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청서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이 저택에 주인이 세자야밖에 없는 줄 아나!”
장자 명분, 아무도 빼앗아 갈 생각하지 말아!
회임했다는 사실에 고 이낭은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저택으로 들어온 다음 날처럼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상 의원이 회임이라고 진단한 날부터, 고 이낭은 괴로워하며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수녕백부의 안살림도 당연히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진 부인의 생신 연회도 자연히 신경 쓸 수 없게 되었다.
아이를 가져서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오 어멈은 진 부인에게 목패 한 상자를 넘기려고 들고 서 있는 강환장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은 이 집안을 맡고 싶지 않았다. 맡고 싶지도 않고, 맡아서도 안 된다.
“세자야, 소인, 나이 많은 걸 믿고 솔직한 말씀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 얼마 전에 화가 나서 경맥이 상하셨습니다. 두어 달 동안 밤에 한 시진도 제대로 잠을 못 주무세요. 오늘 아침에도 머리가 심하게 아프셔서 식사도 못 하셨습니다. 의원을 부르자고 해도, 세자야께 폐가 될까 봐, 또 세자야가 걱정할까 봐, 죽어도 안 된다고 소인을 말리셨습니다. 부인은 진작 자식 복을 누리며 편안하게 사셔 할 연세입니다. 이런 일로 마음 쓰시면 정말 안 됩니다.”
오 어멈의 진실하고 간절한 말에, 진 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오 어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강환장은 처량하게 울어대는 모친을 덤덤한 얼굴로 바라봤다. 고 이낭이 회임한 일로 잠시 기뻤던 마음은 진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짜증만 밀려왔다.
오 어멈은 강환장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자기도 입을 다물었다.
대내내가 바로 성 밖에 있는데, 이때 모시고 돌아오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리려고? 정말로 고가 계집을 주인으로 받들어 모시라는 건가? 고가 계집이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라야 말이지!
세자야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고가 계집 일에는 이토록 눈과 마음이 먼 사람처럼 굴까. 뭐에 씐 걸까?
방 안엔 진 부인이 팔자가 사납다고 외쳐대는 소리만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했다. 곁에 앉은 대낭자 강완은 손수건을 비틀었다가 풀었다가, 다시 돌돌 비틀었다가, 절실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오라비를 바라보고 또다시 어머니를 바라보고, 다시 오라비를 바라보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헛기침하며 신중한 척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나와 아녕이 어머니 대신 며칠 살림을 맡을까요?”
강녕은 멈칫하다가 금세 말을 받았다.
“맞아요! 살림이란 건 처자 시절부터 배워야 한다고, 지난번에 오 어멈이 그랬잖아요. 고 이낭은 처자 시절 때 살림을 배우지 못해서 지금 우리 집안을 이렇게 엉망진창을 만드는 거고요. 마침 잘됐네요, 나랑 언니가 연습해 볼게요!”
오 어멈은 얼굴이 다 시퍼레졌고, 강환장은 무표정했다. 진 부인은 눈을 빛냈다.
“그렇지. 옳은 말이다. 네 누이들도 집안일을 배울 때가 되었다. 앞으로 대갓집과 혼인해야 해서 맏며느리, 종부가 될 터인데, 이런 경험을 해봐야 한다. 하고 못 하고는 큰 차이가 있어!”
오 어멈은 무념무상, 못 들은 척했다. 부인은 철이 없고 보는 눈이 없지만, 세자야는 고 이낭의 일에 눈멀고 정신 나간 것처럼 구는 것 말고 다른 일에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대낭자와 이낭자에게 살림을 맡기느니 차라리 고 이낭이 낫다는 걸 분명 알겠지!
휴, 역시 대내내를 얼른 모셔와야지.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이치지!
“음, 그것도 좋겠다. 너와 아녕도 어머니를 도울 때가 되었다. 근심을 덜어드려야지.”
그런데 웬걸, 강환장이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승낙했다.
“오 어멈, 자넨 오래된 사람 아닌가. 부인이 자네를 믿으시고, 나도 자네를 믿네. 아완과 아녕을 잘 돌봐 주게.”
“예. 소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 어멈은 대답은 했지만, 광풍이 부는 듯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무래도 오통신이 아직 세자야 몸에 붙어 있는 듯했다.
강완은 강환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서서 목패 상자를 끌어안고는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오라버니, 마음 푹 놓아요. 어머니도요. 내가 있잖아요. 이 정도 집안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반드시 잘 관리할게요! 어머니 생신 연회부터 온 경성이 떠들썩하게…….”
강완이 잔뜩 들떠서 말하는데, 강환장이 싸늘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생신 연회는, 올해는 되었다. 어머니, 내년에 제대로 연회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청서와 고씨가 모두 아이를 가져서 고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정수도 아니잖습니까. 내년에, 내년에 제가 생신 연회를 거창하게 열어 드리겠습니다.”
“어?”
강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받아들일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강환장이 무서워서 끽소리도 하지 못했고, 진 부인은 듣자마자 목 놓아 울었다.
“내…… 아들아……. 내…… 팔자야. 내 팔자야…….”
“자네가 어머니를 달래드리게.”
강환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차가운 얼굴로 오 어멈에게 당부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밤, 보림사 밖 황가 별원 상방엔 촛불 하나 켜지지 않았다. 옥 쟁반 같은 만월이 정원 상공 정중앙에 걸렸고, 맑은 달빛이 비친 화초가 서로 의지하듯 기댄 뜰 안은 유난히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복안 장공주는 하얀 면사 직철(直綴)을 입고 정원 중앙에 놓인 흔들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백옥처럼 새하얀 두 다리를 모두 드러낸 채였다.
(※직철: 소매가 넓고 허리에는 충분한 여분을 두고 큼직한 주름을 잡은 승복)
장공주 맞은편엔 별원 화촉사(火燭司) 관사 요 상궁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얼굴이 살짝 검은 편에 마흔 남짓한 요 상궁은 매우 착실하고 신중한 사람 같아 보였다.
“주택헌이 황상께 그 일을 가장 먼저 꺼냈습니다. 삼과(三科)에서 연달아 급제한 게 남쪽의 인재였다면서, 요즘 북부에 인재가 속출하고 있으니 북부 서생에게 기회를 줄 때가 된 것 같다고요. 다음 날, 황상께서 바로 묵 승상과 여 승상을 불러 모두를 물리고 일각 넘게 논의하셨습니다. 두 승상이 나온 후에 황상께서 고서강을 부르셨고요.”
요 상궁의 조금 쉰 듯한 목소리가 매우 우직하고 진실하게 들렸다.
복안 장공주는 팔걸이를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주택헌, 일개 추밀부사가 춘시를 신경 쓰다니……. 올해 북삼로에서 응시하러 온 서생이 얼마나 되지?”
요 상궁은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소인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됐어. 주유민이 예부에 들어갔다지? 잘하고 있나?”
“임무를 받은 이래, 매일매일 일찍 나오고 늦게 돌아갑니다. 열심히 합니다.”
“웬일이래.”
복안 장공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할 일이 좀 있어. 쓸 수 있는 인원을 소집해 와. 그리고, 별일 아니니까 깊게 생각하진 말고.”
“예!”
요 상궁은 눈빛을 반짝이다가 금세 감추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녹운은 요 상궁이 마당에서 나간 후 다수간(茶水間: 탕비실)에서 나와서 시녀들을 불러 장공주의 간식 접시를 바꿔주고는 차를 새로 내렸다.
“장공주, 정말로…….”
녹운은 모두를 물린 다음 걱정되는 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복안 장공주는 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빙수를 천천히 먹으면서 한참 만에 대답했다.
“이것만 할 거야. 끝내고 나면 다시 조용히 수행할 거야.”
이동은 계속해서 보림암과 자등 산장을 오갔다. 보림암에서 평소처럼 차를 내리고, 장공주와 한담을 나누고 뒷산을 함께 거닐었다.
더위가 갈수록 심해지는데 장공주는 갈수록 뒷산에 오르는 걸 좋아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걷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통쾌하다고 크게 웃었다. 마당으로 돌아가서 목욕, 단장하고 맨발로 나와서 차를 마시면 유난히 속이 후련했다.
통쾌하게 땀을 흘린 뒤 목욕하고 나와서, 장공주는 맨발로, 이동은 맨발에 면사 족의를 신고 얼음 대야를 가득 놓은 실내에 마주 앉아 차를 내리고 마셨다.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
차를 반쯤 비운 장공주가 이동을 바라보자,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나와 인연 있는 아이가 하나 있어. 해마다 그 아이의 생일날 날 찾아와서 인사를 하지. 난 어린애가 싫어. 인연 있는 아이고, 가련하지만.”
복안 장공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린애가 싫어. 나 대신 하루 돌봐 줘.”
이동은 차를 내리다가 멈칫했고, 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마 겨우 여덟 살 정도일 거야. 매우 가련한 아이야. 데리고 나가서 좀 놀아줘. 성안으로 들어가는 건 네가 불편할 테니 됐고, 변하로 데리고 가. 데리고 배 타고 경치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나 대신 하루 즐겁게 놀아주면 돼.”
이동은 고개를 들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장공주는 시선을 돌리더니 느긋한 얼굴로 짙푸른 장미 넝쿨을 바라봤다.
“배까지 타고 나가라고 하니까, 여인의 몸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
장공주는 다시 시선을 돌리고 빙그레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다행히 이가엔 사람도 많고 막료도 있으니까 아주 어렵진 않겠네.”
이동이 웃음을 지으며 장공주를 바라보자, 장공주도 살짝 고개를 틀고 담담하게 빤히 바라봤다. 잠시 눈빛을 마주치던 이동이 시선을 돌렸다.
“네.”
“내일 내 별원에 직접 가서 데리고 가. 그렇게 일찍 갈 것도 없어. 진시 말쯤이면 돼. 녹운을 별원으로 보내둘게.”
장공주는 배시시 웃으며 느릿느릿 당부했고, 이동은 대답하고 일어서서 물러가겠다고 인사했다.
“그럼 돌아가서 준비할게요.”
“응. 가 봐, 가 봐.”
장공주가 즐거운 듯 손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