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겹경사
녹운은 걱정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장공주!”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한다고.”
“처음도 아니잖아요.”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하는 말에 녹운도 나직이 대답했다.
“그렇지.”
복안 장공주는 답답한 듯 대답하고 한참 침묵했다.
“이동을 봐. 잘못 혼인한 걸 알고는 즉각 결단 내리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양자를 들였어. 참지 않았어.”
녹운은 차를 내리다가 멈칫했다. 복안 장공주가 찻상을 걷어찼다.
“물러나면 죽고, 계속 나가면 꽉 막힌 길이야. 이 지경이 됐는데, 내 마음대로 한 번 하는 게 어때서. 죽더라도 버둥거려 보고, 적어도 이동을 도와줘야겠어.”
“장공주!”
녹운은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 되었다.
수녕백부.
고 이낭은 안절부절못했다. 옥묵이……지금은 묵란이, 묵란이 저택에 왔는데 강환장이 뭐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할 줄이야. 묵란을 일등 시녀로 하겠다는 걸 고 이낭이 이등 시녀면 충분하다고 말리기까지 했다.
일등 시녀의 한 달 월전이 얼만데, 묵란이 그만큼 필요하지도 않잖아!
묵란이 온 후로, 고 이낭은 적어도 일상생활 면에서 훨씬 편안해졌다. 그녀의 거처 분위기도 바뀌었다. 예전엔 그녀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영란은 알아서 차를 따라줄 줄도 몰랐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묵란은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고 이낭은 그야말로 기댈 곳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날 아침 관사 어멈을 돌려보낸 뒤, 고 이낭은 이모의 생신 문제로 짜증이 가득했다. 연회는 밖에서 요리사를 모셔오기로 하고 해결했다지만, 연회석을 어디에 놓을 것이며 탁자와 의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탁자를 덮을 탁상보도 모자랐다. 곳간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제대로 쓸 만한 건 세 벌뿐이었다. 탁상보에 수녕백부 표기가 수 놓여 있어서, 빌릴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천붕도 그랬다. 경성에 있는 모든 천막 장인에게 알아봤더니, 하나같이 비쌌다. 마당 하나에 설치하는 것만 해도 3, 4천 은자였다.
“고작 천 냥으로 어떻게 하겠어. 어멈들도 좀 봐. 일 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고 이낭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불평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시녀 아이가 달려 들어왔다.
“고 이낭! 우리 이낭이 오늘 속이 너무 안 좋다고 얼른 의원을 불러 달래요! 그리고 입맛이 너무 없다고, 신 음식이 먹고 싶대요. 고 이낭, 주방에 말씀 좀 해주세요.”
시녀 아이는 고 이낭이 대답하기도 전에 둥둥거리며 돌아갔다. 고 이낭은 화가 나서 찻잔을 던질 뻔했다.
“저것 좀 봐, 저것 좀 보라고! 황제의 씨라도 품은 것처럼! 고작 아이를 가진 거로 뭘 저리 유난이야?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아이를! 오늘은 속이 울렁거리네, 내일은 머리가 아프네, 오늘은 신 게 먹고 싶네, 내일은 단 게 먹고 싶네. 대체 얼마나 유난을 떨려는 거지? 천것 같으니라고!”
“일단 의원을 모셔 오는 게 좋겠어요. 괜히 세자야가…….”
묵란은 근심스런 눈빛으로 나지막이 귀띔했다.
“상 의원을 한 번 부르려면 열 냥이야, 열 냥!”
고 이낭이 고함쳤다. 정말로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불러주지 않으면 또 난리를 부릴 거예요.”
묵란이 나지막이 하는 말에 고 이낭이 앓는 소리를 냈다.
“묵란,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도저히 못 버티겠어.”
묵란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서 상 의원을 부르고 돌아왔다. 그녀는 비스듬히 앉아서, 풀이 잔뜩 죽은 고 이낭을 바라보다가 잠시 주저한 끝에 입을 열었다.
“낭자, 부인의 생신 연회는 큰일이에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고 이낭은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뭘 어쩌라고. 내가 신선이야? 손만 휘두르면 모든 게 만들어져? 마음대로 하라고 해. 일개 이낭인 내가 무슨 수가 있겠어.”
“낭자…… 정말로 문제가 생겨서 세자야의 체면을 상하게 되면 세자야께서 화를 낼 거예요. 낭자만 손해라고요. 얼른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묵란은 근심이 가득했다.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 낭자에게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떡하라고.
“그럼 어떡하란 말이야. 나도 오라버니가 화를 내면 무서운 거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방법이 있어? 할 말도 없어. 내 팔자도 참 사납다.”
고 이낭이 눈물을 훔치는데, 묵란이 눈을 내리깔았다.
“낭자, 낭자의 몸이 안 좋은 걸 세자야도 아시잖아요. 어제도 낭자 몸이 허약하니까, 제비집을 끊지 말고 계속 먹으라고 하셨고요. 요즘 내내 고생하셨으니까 병이 날 수도…….”
“맞아!”
고 이낭의 두 눈이 순간 번쩍였다. 정말 멍청했었네. 왜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걸 잊었을까. 병이 났다고 하면 되잖아!
“나도 몸이 안 좋아! 아이고, 머리 아파 죽겠네. 묵란, 어서 의원을 불러와. 밤에 춥더니, 아니, 아침에 일어나서 세자야를 배웅한 다음에 더위를 먹었어. 도저히 못 참겠어! 상 의원은 왔니? 왔으면 일단 나부터 보라고 해!”
고 이낭은 그길로 앓아누웠다.
상 의원은 그래도 청서부터 진료했다. 맥을 짚은 다음 괜찮다고 하자, 청서는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고 다시 짚으라고 했다. 상 의원은 고분고분 그 말을 따라 다시 한번 맥을 짚어 보고는 아까 제대로 짚지 않은 게 맞다고 하며 기혈이 부족하니 음식을 매우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청서는 상 의원이 음식 처방까지 내린 후에야 만족해했다.
묵란은 상 의원을 고 이낭에게 모셔가는 길에 고 이낭이 어떤 증상으로 불편한지 읊어대며 이낭이 너무나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고 이낭은 젖은 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침상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 의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부인병에 능통한 그는 오랜 기간 내택을 오간 데다가 원래도 영리한 사람이라 이게 무슨 일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고 이낭의 맥을 짚고 잠시 집중한 상 의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집중해서 맥을 짚어 보고는 다른 손을 짚었다. 그러고는 고 이낭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다가 묵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묵란 낭자, 이낭의 달거리, 요즘 어떻소?”
묵란은 고 이낭을 바라봤다. 근래 두어 달의 달거리가 어떤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종종 늦어요.”
고 이낭이 부끄러운 듯 직접 대답했다.
상 의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 이낭에게 손을 내밀라고 눈짓하고는 다시 맥을 짚었다.
“이낭, 회임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상 의원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맥 상태로 보면 두 달 된 듯합니다. 이낭, 모르셨습니까?”
고 이낭은 멍해졌다가 금세 몹시 기뻐했다.
“정말요? 너무 힘들어서 그랬나 봐요! 어쩐지……. 상 의원 감사해요. 맥은 안정적인가요?”
“예, 예. 괜찮은 편입니다.”
상 의원은 어이가 없었다. 달거리가 한 달 넘게 늦었는데 전혀 몰랐다니. 회임한 첫 두 달은 매우 괴로운데, 이 이낭은 참으로 그악스럽군!
고 이낭은 얼굴을 발갛게 빛내며 상 의원에게 은자 두 냥을 더 주라고 분부하고는 얼른 강환장을 집으로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나, 아이를 가졌어요!
상 의원을 배웅하러 나온 묵란은 뜨락 밖으로 나가서 중문에 마차를 준비하라고 어멈에게 분부하고, 상 의원 뒤를 따라가다가 주변을 훑어보고는 바짝 다가갔다.
“상 의원, 우리 이낭이 어렵게 회임한 거라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여인이 뭘 먹으면 아이를 잃을까요? 조심하게 알려주세요.”
묵란이 웃음 띠며 나지막이 묻는 말에 상 의원은 걸음을 멈추고 묵란을 흘겨봤다.
“허허. 묵란 낭자, 이건 크나큰 금기일세. 혼인도 안 한 처자가, 그런 심사를 품다니. 하늘이 노할 걸세.”
“그런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묵란이 다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상 의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자르고 걸음을 서둘렀다. 묵란은 더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를 따르다가 주저하며 돌아섰다.
추미는 해바라기 씨를 들고 청서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춘연은 바느질거리를 들고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었다.
“고 이낭, 참 재미있네. 형님이 회임하니까 따라서 회임하네요? 회임하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회임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추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청서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고 이낭이 아이를 가진 지 두 달 되었다고 상 의원이 말했다. 청서 자신은 아직 한 달 조금 넘은 거라서, 이렇게 되면 고가 계집이 먼저 낳을 게 분명했다. 고가 계집이 아들을 낳게 되면 장자라는 명분은 사라지고 만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이가 갈렸다.
“사내는 여자애보다 힘들게 한다잖아요. 형님은 매우 힘들어하잖아요. 하루도 괜찮은 날이 없고요. 그런데 고 이낭은요?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요. 분명 형님은 아들, 고 이낭은 딸일 거예요.”
춘연이 사람 좋게 청서를 위로했다. 하지만 청서는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사실 힘들지도 않았다. 고가 계집이 괴로워하라고 일부러 힘들다고 한 것이니까.
추미는 두 사람을 힐끔 보며 의미심장한 웃는 얼굴로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두 달이나 되었다잖아!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르지. 있잖아, 그때 아니었을까? 세자야하고 중문에서 밀회했던 그 날! 정말 대단하네. 하늘과 땅을 이불과 요 삼아서 선 채로 아이를 가지다니 말이야!”
추미는 제가 말해놓고 까르륵 웃었고, 청서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일을 치르지 않았어! 내가 똑똑히 봤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마음 푹 놓고 이야기해요!”
추미가 후다닥 가까이 다가가자, 춘연도 몸을 내밀었다.
“곡란원에…… 어느 시녀 아이가 한 말인데, 고 이낭이 산발하고 우리 저택에 들이닥친 그 날, 그 애가 마침 당직이라서 똑똑히 들었대. 고가 계집이 앙앙대며 얼마나 고함을 치는지, 새벽까지 소리를 질러대서 잠도 못 잤대. 그런데…….”
청서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너무 이상했대.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도 중간에 헐떡거리고 앙앙거리고, 너무나 즐기는 것 같았다지 뭐야. 하나도 아픈 사람 같지 않았대. 그리고!”
청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추미와 춘연을 번갈아 봤다.
“나중에 세자야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대. 그리고…… 더 해달라고 했대. 한 번 더 하고는 또 하자고 했대!”
“정말?”
추미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깜빡거렸다.
“어머, 어머. 정말이지 난 그날……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는데. 나중에 세자야가 나간 후에야 살 것 같았는데.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즐겨? 더 해달라고? 아파서 죽겠던데. 너는? 너는 어땠어?”
추미가 묘한 표정으로 춘연을 쿡쿡 찌르자, 춘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너무 아팠어. 세자야가…… 됐다고 할 때까지 겨우 버텼는데……. 더 해달라고 했다고? 죽고 싶은가 봐? 난 다음 날까지 아파 죽는 줄 알았는데. 울고만 싶고, 며칠 지난 후에야 겨우 괜찮아졌는데…….”
춘연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청서가 말을 이었다.
“나도! 얼마나 아팠게. 처음 몇 번은 계속 아팠어. 그런데 앙앙거리고 헐떡거리면서 즐길 수 있다고? 한 번도 부족해서 여러 번?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안 그러니?”
“그러니까요. 난 지금까지도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냥 싫기만 해!”
추미는 싫다는 듯 손수건을 흔들었고, 춘연은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가린 채 웃으면서 웅얼거렸다.
“난 그럭저럭 괜찮았어. 세자야가 얼마나 다정한데. 지금은…… 그러고 싶긴 한데, 말을 못 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