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고가와 탕가
“원래 계획은 오라버니가 진사가 된 후에……. 지금으로서는 일단 오라버니의 춘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 때가 오면, 계속 이곳에 숨어지내는 건 안 되겠죠. 호주로 돌아가서 6년 뒤를 생각해야죠.”
이동의 목소리가 평온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저 어머니 곁에서 평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일 뿐이다. 호주도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아 피해 있으면 그만이었다. 몇십 년 인생도 눈 깜빡할 사이일 뿐이니.
“변변찮기는!”
장공주가 찻잔을 소리 나게 상에 내려놓았다.
“아니면요? 수녕백부로 돌아가서 나쁜 놈들을 다 수습해요? 그리고 강환장을 무릎 꿇리고요? 아니면 사람을 써서 강환장을 죽여요? 강가를 무릎 꿇리고, 강환장을 무릎 꿇린들 뭐가 달라지나요? 강환장이 저를 진심으로 대하고 깊이 사랑해 줄까요?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설령 그를 무릎 꿇리면 그 후로 진심으로 대한다고 해도, 옛날 일은 어쩌고요? 그자가 후회만 하면, 정과 의리만 생기면, 예전 일은 다 없던 일이 되는 걸까요?”
이동이 쏘아붙이듯 묻자, 장공주가 눈썹을 높이 치켜뜨고 이동을 빤히 봤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저는, 예전 모든 걸 하나도 지울 수 없어요. 제 잘못은 제가 감당해요. 각자의 잘못은 저지른 사람이 감당해야겠죠. 저와 강환장은 부부 명분,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이 명분만 남았을 뿐, 다른 건 예전에 깔끔하게 다 끝났어요. 장공주께서 강가를 3년 더 먹여 살리라고 하시니 그렇게 하면 돼요. 선행이라고 생각하죠, 뭐.”
“죽여. 그것도 나쁘지 않네.”
장공주가 찻잔을 들고서 다리를 꼬고 흔들어댔다. 이동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사람을 죽이면 전 홀로 남아서 그 사람의 부모, 누이를 봉양해야 해요. 양자를 들여야 하고요. 여기저기,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해야겠죠. 그 사람을 죽이고도 제가 성 밖에 살 수 있나요? 친정에 살 수 있나요? 강가로 돌아가서 강가를 관리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러네. 그 말을 들어보니 죽이는 건 아닌 것 같아. 네 손해가 커. 휴!”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고 머뭇거리면서 찻잔을 튕겼다.
“동동, 사실 네 오라버니 춘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내가 나선다면…….”
“이미 힘들게 지내시잖아요. 경성도 혼란스럽고요. 3년 더 기다리면 돼요. 별일도 아니에요. 강가를 3년 먹여 살리는데 은자가 뭐 얼마나 든다고요. 그럴 것 없어요.”
이동은 장공주의 말을 잘랐다. 장공주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잠시 후 다른 한쪽도 치켜올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회랑으로 걸어가서 뒷짐 진 채 한참을 서 있다가 휙 돌아서서 살짝 날카로운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이 지경까지 양보만 했는데, 내가 무서울 게 뭐가 있어? 하!”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며 장공주를 바라봤다. 장공주가 오늘 정서가 불안한 걸 아침에 들어오자마자 딱 알아봤다. 평소처럼 평온한 눈빛이 아니라 조바심이 가득했다.
“차 드세요. 오늘 돌아가면 연꽃 술을 좀 따라고 해서 볕에 말린 다음 찻잎에 좀 섞을게요. 향긋하기도 하고 화기(火氣)도 내려준대요.”
이동은 장공주의 차를 새로 바꿔주었다.
“이만 돌아가.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어.”
장공주는 조금 싸늘한 말투로 돌아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이동은 일어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하려던 말을 그냥 삼켰다. 장공주는 자기가 납득해야지, 타일러서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 차오른 상태이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이동이 회랑을 막 나서자마자, 장공주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명심해.”
“신불밀상기신(臣不密喪其身: 신하가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몸을 다친다. 군부밀상기방君不密喪其邦 군주가 비밀을 발설하면 나라가 위태롭다.- 역경) 말이시죠?”
이동이 돌아보며 그녀의 말을 이었다.
이동은 평소보다 두 시진 정도 이르게 자등 산장으로 돌아왔다. 낭자가 돌아왔다는 사환의 기별에, 탑상에 삐딱하게 누워서 이신의 책론을 읽던 문 이야가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이신이 화들짝 놀랐다.
“이야,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아니야.”
문 이야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빠른 대답에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문 이야는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사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낭자를 봤느냐? 안색이 어떻더냐?”
“소인은 못 뵀습니다. 중문 류 어멈이 기별했습니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 하루 조용히 쉬어야겠다고, 대야께 말씀 전하라고요.”
“의원을 모셨나?”
이신도 일어서자, 문 이야가 그를 붙잡더니 뭐라고 하려고 하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고는 한마디했다.
“낭자가 몸이 안 좋다고 하니, 오라비가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나.”
“류 어멈 말이, 하루 조용히 쉬면 괜찮다고 하셨답니다. 오늘은 대야를 뵙지 않겠다고요.”
사환이 얼른 덧붙였다. 이신은 의아한 듯 문 이야를 바라봤다. 반응이 이상했다. 감추는 일이 있는 걸까?
문 이야는 다소 차분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탑상에 삐딱하게 누웠다. 이신의 글을 다시 들어 올렸지만,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차분하지 못한 이유는 요 며칠 장공주에게 소식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동은 등화원으로 돌아가서 입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회랑에 나와 앉아서 부들부채를 흔들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고서강과 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 탕가 장방의 한 낭자가 고서강의 셋째와 혼인했다.
복륭 전장은 줄곧 탕가 장방 손에 있었다. 탕가 다음가는 복륭 전장 출자자인 어머니는 탕가 장방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어서, 그 당시 탕가 낭자가 혼인할 때 어머니가 지극히 후하게 혼수도 보태주었었다.
이동은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아롱진 햇살을 올려다봤다.
예전에 진 부인의 생신 연회를 맡았을 때, 처음으로 그런 일을 맡게 되어 최고로 해내려는 일념뿐이었다. 어떻게든 강환장에게 자신의 재능과 마음 씀씀이를 선보이고 싶었다. 강가는 평소에 왕래하는 집안도 극히 드물었고, 쓸 만한 집안은 더 드물었다. 고 사사부(使司府)와 혼인한 탕가 낭자를 떠올린 그녀는 정중하게 대홍색 청첩을 보냈다.
만 어멈이 청첩을 들고 갔는데, 탕가 낭자를 만나긴 했으나 심부름값 은자 두 냥과 간식 한 상자만 받아서 돌아왔다. 그 간식 한 상자가 바로 탕가 낭자가 진 부인에게 주는 생신 선물이었다.
그때 자기가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고가 같은 높은 집안과 혼인한 탕가 낭자를 가장 한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상인 가문 여식이라는 출신이었으리라. 그녀가 보낸 청첩은 그야말로 대놓고 그 사실을 일깨운 것이고.
나중엔, 끝내 탕가 낭자를 좋아하진 못했지만, 갈수록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중에 진왕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서강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양 태후는 산서 사람을 가장 미워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에 아우의 병 때문에 산서의 어느 약방에 도움을 청하러 갔었다. 의원을 모시지도 못했고, 당연히 병을 고칠 좋은 약을 구하지도 못했다. 양 태후는 바로 그 일로 홧김에 명단을 넣어 입궁하게 됐다고 말했었다.
양 태후가 처음으로 그 일을 입에 올렸을 때, 이동은 겁에 질려 식은땀을 주룩 흘렸었다. 이가의 약방이 양 태후가 말한 그 산서 약방 바로 옆에 있었다. 그날, 양 태후가 산서 사람이 연 약방이 아니라 이가의 약방에 들어갔었다면……. 무일푼으로 찾아가서 의원을 모시려고 했으니, 이가 약방의 점원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되었다면, 그 원한을 온 강남에 풀었겠지.
이동은 일어서서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고서강은 자리에서 쫓겨난 후 온 집안과 함께 산서로 돌아갔다. 그 후의 십여 년 동안, 오늘 장공주가 말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환장은 북부 군대로 파견된 다음 해, 상주서를 올려서 북부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리고 북부 학자들의 면학 분위기와 이런저런 어려움도. 그 상주서는 조정을 크게 흔들었고, 그 해 강환장은 복귀해서 그다음 해 춘시의 시험관에 낙점되었다. 그리고 그해 급제자는 거의 북부의 학자였다. 십여 년 전엔 조정에 원래 그런 불문율이 있었다는 것도, 이동은 그해에 알게 되었다.
그 일로 강환장은 그때부터 북부 관리와 학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해에…….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떠올렸다.
그 해 강환장이 산서 학자를 뽑았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동은 수화문 아래 서서 생각했다.
그 해 탕가에서 수많은 학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탕가 낭자도 고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중엔 지난번에 이신 오라버니와 함께 문회에 참석한 고자의도 있었다. 그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지난 생에 탕가와 고가는 전멸했다. 탕가가 산서로 돌아가기 전에 탕가 장방 대야가 그녀를 찾아와서 복륭 전장의 지분을 그녀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적어도 십 년 안엔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전장에 관리할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그 지분을 받아서 수녕백부 명의로 두었다.
이번 생엔 고서강이 춘시 시험관이 된다.
이동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걸었다.
이가는 적어도 아직은 고가와 탕가 줄을 잡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보림암.
복안 장공주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서 있었다. 녹운은 한쪽에서 조용히 다구를 치우면서 걱정스러운 듯 수시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녹운, 말해 봐. 내가 여기서 더 물러나면, 어디까지 물러나야 할까?”
복안 장공주가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말에 녹운의 몸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허리를 세우고 슬픔 가득한 눈으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장공주, 어떻게 더 물러나요. 여기서 더 물러나면…….”
“벼랑 끝이겠지.”
복안 장공주는 황량한 기색으로 돌아서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전엔 죽은 척하고 궁에서 나와 신분을 감추고 세상을 떠돌면서 평생 자유롭게 살까 했어. 어머니가 미쳤다고 하더라. 나중엔 궁에서 늙어 죽을까 했어. 산더미 같은 책 속에 파묻혀서. 황상이 허튼소리라고 했지. 지금은 여기로 피해서, 모든 걸 잘라내고 청정하게 출가인으로 살겠다는데, 그것도 안 된대. 내가 출가하면 아버지를 뵐 낯이 없다고. 지금은 아버지를 뵐 낯이 있고? 아버지는 눈 감기 전에 모든 걸 내 뜻대로 해주라고 하셨어. 그런데 굳이 자기 뜻대로 날 휘두르려고 해. 그게 내 뜻을 따르는 거라고?”
복안 장공주는 갈수록 화가 났다.
“술을 마시겠다고 하면, 여인이 술 마시는 건 우아하지 않다고 했지. 내가 파와 부추를 좋아하니까, 나중에 지아비를 모셔야 하는데 냄새나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한림원 학사를 불러 몇 마디 물어본 것뿐인데, 수치를 모른다고 하고. 꽃등 한 번 보러 갔다고 한 달 동안 ‘여훈(女訓)’을 쓰게 했어. 내가 좋아하는 건,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물러났는데, 그래도 날 놓아 주지 않아. 시시각각 내 모든 걸 단속하려 해. 내가 어떻게 살든, 자기가 무슨 상관인데? 왜 꼭 혼인해야 해? 왜 꼭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해? 왜 일거수일투족 자기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 해? 자기가 만든 기준? 무지렁이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