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방관과 참여
대황자 이야기가 나오자, 주육은 우울한 얼굴로 낚싯대를 흔들다가 한참 만에 나직이 말했다.
“있잖아, 대황자, 그리고 큰형님, 두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아서만은 아니고, 큰형님이 너무 악랄해서야. 큰형수까지 매우 모질어! 형님, 들어 봐.”
주육이 영원 곁으로 다가오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연말, 연초에 왕부에 첩을 늘릴 때, 우리 집안에서 당연히 서두르지 않겠어? 다른 집안사람이 들어가는 걸 볼 순 없으니까. 누구를 골라서 보낼지, 모두 장방에서 관리하고, 부친은 우리더러 끼어들지 말라고 하셔. 하지만 우리 집안엔 나이나 용모가 모두 적당한 여자가 더 이상 없으니까, 친척 중에 고를 수밖에 없지. 큰형수가 친정에서 자란 외사촌 동생을 골랐어. 큰 백모가 딸로 들여서 왕부에 보내려고 했지. 그런데 웬걸, 둘째 형수의 친동생이 예쁘장한데다가 수완이 대단한데, 하루는 대황자가 우리 집에 왔을 때 기회를 덥석 문 거야.”
“아? 수완이 대단하군! 대황자도 마음에 들어하고?”
영원이 놀란 듯이 물었다.
“정말로 예쁘장하거든. 두 눈이 초롱초롱한데다가 말도 잘하고. 마음에 들고 말고는 일단 접어두고, 우리 큰형수가 어쨌는지 알아?”
“어쨌는데?”
영원이 목소리며 표정이며 찰떡같이 호응하며 물었다.
“독 한 잔으로 독살했어.”
주육이 힘껏 손을 휘둘렀다.
“뭐라고?”
영원도 이번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리낌이 없어도 너무 거리낌이 없는 것 아냐?
“그래서 큰형수는? 아무런 일 없이 네 집에 있지 않나?”
“맞아. 우리 둘째 형님은 서출이고, 둘째 형수 친정도 대단한 집안이 아니거든. 우리 집안은 적출과 서출은 대우가 달라. 크게 다르지. 큰형수는 큰형님이 감싸주니까, 사당에서 반나절 무릎 꿇은 게 다야. 두 달 동안 금족하라고는 했지만, 며칠 만에 흐지부지 끝났지.”
주육은 별로 화를 내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그와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대황자는? 둘째 형수네 누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며? 죽었는데, 묻지도 않고?”
“대황자? 허허. 형님, 우리 사이니까, 솔직히 털어놓을게. 난 앞으로 그 뭐냐……. 어쨌든 대황자가 아니길 바라. 대황자가 날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대황자는 무정하고 의리도 없고. 이런 일면식밖에 없는 사람은 손을 안 댔으면 그래도 조금 마음에 담아둘까, 손댄 이상 마음에 두지도 않아. 이런 여인은 둘째치고, 왕부를 받아서 나왔을 때, 어릴 때부터 대황자 시중을 든 유모도 함께 나왔어. 나중에 그 유모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큰형수 말로는 별 잘못도 아니었대. 그런데 대황자가 화를 냈고, 때려죽이는 걸 직접 보기까지 했대. 후, 이렇다니까?”
주육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너무 걱정되었다.
“원 형님, 대황자 그런 성격에, 그런 성질에, 정말로 그 뭐냐…… 가 되면 우리 다 힘들어진다.”
“됐다. 그런 건 상관하지 말자.”
한참 침묵한 영원이 하하 웃으며 말을 돌렸다.
“사황자를 찾아가 봐라. 네 말대로 어차피 대황자 줄은 못 잡을 것 아니냐. 깊이 생각할 것 없다. 즐길 건 즐기고,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되어서 앞길이 막히면, 나와 함께 가자. 같이 관외, 아니면 남만(南蠻)에 가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환경이 좋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어.”
영원은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힘껏 낚싯대를 잡아채 큰 물고기를 들어 올렸다.
“형의 이런 시원시원한 점이 좋다니까! 사황자를 찾아가서 좋은 자리를 받으면 반드시 사황자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거다! 헤헤, 형, 형은 나보다 똑똑하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형에게 부탁할 거야. 모르는 척하면 안 된다!”
“그건 마음 푹 놓아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만 해라!”
영원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장담했다.
사사건건 찾아오기만 바라는걸.
자등 산장으로 돌아간 이신은 장 태태에게 문안부터 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문 이야에게로 달려갔다.
문 이야는 벌써 그의 서재에서 기다리면서 차를 내려놓고 커다란 쟁반에 담긴 무화과를 먹고 있었다.
“이야.”
이신이 들어가서 예를 갖추자, 문 이야가 무화과를 우물거리며 손짓했다.
“일단 앉아서 차부터 마시게.”
이신은 차가운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문 이야를 향해 쓴웃음 지었다.
“이번 문회,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문 이야는 무화과를 다 먹고 손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영해가 찻잎을 가지고 가면서 주가 장원에 사냥하러 갔다는 소식을 전했네.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예. 계가의 배를 타고 갔고, 일정도 모두 계 대랑이 정했습니다.”
문 이야는 말 없이 눈썹을 까닥였다. 이신은 배에서 내린 다음부터 오늘 아침에 헤어지기 전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자세히 말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누가 뭘 했는지, 누가 어떤 표정이었는지까지 모두 매우 세세히 말했다.
“계가, 혹은 계소영이 이번에 큰 수확을 얻었겠군.”
문 이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내기를 계소영이 자연스럽게 추시, 춘시에 참석할 좋은 핑계만으로 보는 건 너무 단순해. 영 칠야가 정말로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다면, 아마 그가 바라는 건 그게 다가 아닐 것이네. 주육이 움직이도록 자극하는 것이네!”
“주육이요? 속 빈 강정인데…….”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문 이야가 손을 저었다.
“속 빈 강정이든 속이 찼든, 그건 상관없지. 영 칠야는 착수할 곳이 필요한 걸세. 대황자와 사황자 곁에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지. 주육보다 더 좋은 인선이 있는가? 그래, 경성에 들어오기 전에 싸움을 일으킨 게 단순하지 않을 줄 내 알았지. 인제 보니 그때부터 주육에게 검을 겨눈 것이야. 일단 그건 접어두고, 계소영, 아니면 계가는 분명 영가와 손을 잡고 영 칠야가 앞장서길 바라는 것이야. 그럼 영 칠야는?”
문 이야는 일어서서 뒷짐 진 채 서성거렸다.
“휴! 영 칠야 앞에 놓인 이 판세, 매우 어려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당장은 떠오르지 않는군. 어쩌면 본인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지도 몰라. 한수, 한수 두면서 생각하는 걸지도…….”
문 이야가 손가락을 들어 쿡쿡 찍어대다가 다시 뒷짐을 졌다.
“또 너무 멀리 생각했군. 일단 그건 생각하지 말고, 자네 이야기를 해 보세. 자네는 지금 판 앞에 서 있는데 들어가진 않았지. 허허.”
문 이야는 헛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 지금 신분으로는 판에 들어갈 수도 없지. 다만…….”
문 이야의 말이 뚝 멈췄다.
다만 어쩌면, 이 낭자가 장공주와 갈수록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이가가 장공주에게 접근할 좋은 말이 될 수도 있다!
“흠! 당분간은 우리가 할 일이 없으니, 자네는 마음을 비우고 글공부하고 문장을 짓게.”
뒷짐 지고 한참 서 있던 문 이야가 갑자기 말을 확 바꾸는 바람에 이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여 대랑은요?”
“계가와 계소영의 응어리가 뭔지, 여염이 우리보다 더 잘 안다네. 여염은 똑똑한 사람인데, 자네도 다 알아본 걸 몰라보겠나? 여씨 가문은 여 승상부터 그렇듯이, 다른 사람의 앞길을 막지 않는 것이 가풍이라네.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루면 제일 좋고, 이루지 못해도 방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여염은 당분간 신경 쓸 것 없네. 이번 큰일에서 여가는 십중팔구 멀리서 방관할 걸세. 우리처럼 말이야.”
문 이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 년에 올까 말까 한 떠들썩한 기회를 그냥 방관해야 한다니. 아이고!
보림암의 그 작은 마당에, 이동은 장공주와 마주 앉아서 찻잎을 갈고 차를 내렸다. 지난번에 그녀가 차를 내린 후로, 차를 내리는 일은 그녀 몫이 되었고 장공주는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
장공주는 나른한 듯 앉아서 조금 멍한 듯 바깥의 밝은 햇살을 바라봤다. 이동은 또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이동이 왔을 때부터 장공주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환장의 첩 중 하나가 아이를 가졌다지?”
장공주가 시선을 거두고 이동을 바라보며 돌연 물었다.
“네. 청서라는 아이예요. 강환장을 모시던 대시녀였어요.”
“강환장이 장원을 저당 잡혔다는군.”
“네. 알아요. 6천 냥에 잡혔대요. 온천이 있는 장원인데, 온천을 따라 천막을 쳐두어서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가 제법 나와요. 그래서 그만큼 받은 거고요.”
이동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장공주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6천 냥이라 봐야 며칠이나 쓴다고. 앉아서 까먹으면 산도 말아먹는다잖아. 그걸 다 쓰면 또 어쩔 거래? 셈해 봤는데, 네 어머니가 강가에 준 점포, 장원으론 3, 4년 먹고살기에도 부족해.”
이동이 놀란 얼굴로 장공주를 바라보자, 장공주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네 오라비 내년 춘시, 별로 희망이 없어.”
이동은 손에 든 찻잔에서 찻물을 쏟았다.
“기껏해야 강가를 3년 정도 더 먹여 살리는 거잖아. 그게 차를 다 쏟을 일이야? 올해 가장 좋은 용봉단차란다, 그거.”
장공주가 퉁명스럽게 이동을 흘겨보자 이동은 쓴웃음을 지었다.
“3년 후엔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3년 뒤엔 세상이 다 변할지도 모르는걸요. 오라버니는 학문, 인품 다 빠지지 않고, 우리 이가도 몇 대째 선행을 베풀어 왔어요. 시험관이 어떤 글을 좋아하든, 아무런 수확도 없기야 하겠어요? 진사도 시험관 한 사람의 의견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장공주는 이동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시험관이 뭘 좋아하든, 네 말대로 아무런 수확이 없지야 않겠지. 하지만 이번엔…….”
장공주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 나라 과거는 전대 황조와 달리, 강절(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의 급제자 수를 제한하지 않아. 그래서 역대 춘시 합격 방엔 강, 절, 회(淮水) 일대 서생의 천하였어.”
이동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설마 내년이…….
“남북 서생의 균형을 맞추려고 몇 년에 한 번씩 조정에서 어떻게든 강, 절, 회 일대의 학자를 억압하고 북부 서생에게 기회를 주지. 올해는 시험관으로 강서 본적인 절지사 고서강을 임명했어. 고서강은 춘시에서 두 번 낙방하고 세 번 만에 그런 기회를 잡아 이갑 일등으로 급제했어. 그해에 강절 학자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어. 올해 그런 그가 시험관이 된 거야.”
역시 그 일이었다. 이동의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이번 생은 지난 생과 완전히 달라지려나?
장공주는 얼굴이 어두워진 이동을 바라봤다.
“고서강의 문체는 미사여구가 많고 회삽(晦澁: 언어나 문장이 어려워 뜻이 분명하지 않다)해. 하지만 이건 문체 문제가 아니야. 고서강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그자가 싫어. 다만 재화 면에 세상에 드문 인재지. 절지사 자리에서 지금껏 매우 잘해왔어. 이번에 시험관을 맡고 나면 아마도 도지를 비롯한 삼사를 통괄하게 되고 계상(計相)으로 오르겠지. 계상 자리에 그자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는 게 사실이야.”
“정말로 강절 학자는 하나도 급제하지 못할까요?”
이동이 무심결에 물었다.
“한둘은 있겠지. 다만 계소영이 참가할 예정이라더군. 그리고 여염도. 두엇 뽑아서 구색을 갖추는 데에 네 오라비까지 포함되진 않을 거야.”
장공주의 말은 사실이자 매우 냉정한 말이었다. 이동은 마음이 혼란해져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찻잔에 남은 차를 따라버리고 새로 차를 내리려고 물을 끓였다. 장공주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동이 다시 차를 내리자 그제야 물었다.
“어쩔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