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16화 (116/463)

116화: 말참견

영원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에 박힌 묵칠은, 칠랑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칠 형이 되었고 다들 칠 형으로 부르게 되었다.

칠 형이라는 말에 영원이 빙긋이 웃었다.

“금강석은 아니지. 너무 번쩍여. 아라의 부드러운 매력과 어울리지 않아. 진주도 아니야. 너무 단정해. 홍산호가 좋겠다. 아주 붉은 홍산호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묵칠이 허벅지를 내리치며 경모하는 얼굴로 영원을 바라봤다. 칠 형, 정말 내 지기로구나!

주육은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라는? 내려와서 같이 술 한잔하자 해라.”

“피곤하대서 먼저 쉬라고 했다.”

묵칠은 순간 경계심이 들었다. 영원이 주육을 툭툭 쳤다.

“이따 유월이 우리 북부의 춤을 선보일 것이다. 여인은 없어도 돼. 여인이 좋으면 나중에 연향루에 가서 며칠 쉬다 오면 되지. 얼마든지 있지 않으냐.”

“흥. 이렇게까지 떠받들면 아라의…….”

몸값이 더 오를 거라는 말은 끝까지 하진 못했다. 묵칠의 은자가 이가 갈리도록 부럽고 질투가 날 정도니까.

영원은 잠시 빤히 그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까닥여 술을 받아서 건넸다.

“은자가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와라. 많이는 몰라도, 만 냥 정도는 이 형님에게 있다.”

“형님도 참. 이렇게 통 크게 대접해줬는데, 어떻게 더 민폐를 끼친다고.”

“은자란 말이다, 솔직히 말하마. 난 열네 살부터 스스로 벌어서 썼다. 집에서 주는 월전 몇 푼으로는……. 우리 집안은 너희들 집안과 달라서 월전이 적어. 성년이 된 후에도 달에 고작 천 냥 정도인데 충분할 리가 있나. 술 한잔 마시기에도 부족한걸. 할 수 있나. 알아서 벌어야지. 해 보니까 알겠더군. 은자 버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영원이 술을 마시면서 나른한 얼굴로 말했고, 주육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들었다. 영원 형님은 스스로 은자를 벌어서 썼다고? 어떻게? 돈 벌 일이 있을 때……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되나?

영원은 주육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크게 고함쳤다.

“유월은? 공자들에게 술을 올리고 우리 북부의 개선무를 보여드려라!”

“예!”

유월이 대답하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호위들이 쟁반을 들고 유월을 따라 나왔다. 유월은 호위들에게 거대한 은잔을 받아서 술을 가득 채운 다음 영원부터 시작해서 왼쪽으로 모든 이 앞에 한 발로 무릎을 꿇고서 양손으로 바쳤다.

고자의는 갑옷, 은잔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흥분해서 두 눈을 빛내더니 잔을 받아서 빙빙 돌리며 들여다봤다.

“칠랑, 북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렇게 큰 잔으로 술을 마시는가?”

“이건 가장 작은 것이지. 대부분 잔을 쓰지 않아. 그리 유난 떨 것 있나. 투구에 마시면 되지. 유월, 이따 공자들에게 투구로 한 잔씩 올려라!”

영원은 거대한 은잔을 들어서 단숨에 비웠다. 한 바퀴 술을 올린 유월이 투구를 벗자, 호위들이 나와서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유월은 모두를 향해 투구를 들어 보이고는 높이 치켜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사람들은 유월이 단숨에 술을 비우는 걸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술을 비운 유월은 다시 투구를 쓰고 돌아서서 대열로 돌아가더니 한 손엔 방패, 다른 손엔 창을 들고 비장한 노랫소리에 맞춰 춤추고 노래했다.

거대한 은주전자를 들고 좋은 석류주를 마시면서 비장한 노래와 함께 간단하지만 위엄과 기세 가득한 춤을 즐기고 있자니, 여염 무리는 뜨거운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붓을 던지고 군대에 합류하여 말을 타고 적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군.”

계소영이 살짝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여염 무리는 그래도 문인이라 들뜨고 흥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지만, 주 육소야는 벌써 벌떡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원 형! 나, 형님과 함께 종군하겠어! 반드시 함께 종군해야겠어! 함께 적을 죽입시다! 적을 죽이자! 원 형, 내일부터 형님과 함께 무예 수련을…….”

“나도 종군하겠어! 이래야 사내지! 전장에서 열병해야 진정한 사내지!”

“나도 있네! 적을 싹 다 죽이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자! 마셔!”

영원은 변함없이 나른한 모습으로 삐딱하게 앉아서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격앙해서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을 흘겨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희미해지고 심드렁해졌다.

너희들 주제에 적을 죽이겠다고? 전장에 오르자마자 기겁하고 죽을 놈들이. 살아만 있어도 영웅 대접해주마!

계소영도 술을 홀짝이며 영원을 바라봤다.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이자가 경솔하고 어리석은 놈이라고? 이런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을까.

처음부터 들뜬 분위기 속에 시작했던 모닥불 연회는 안주는 거의 손대는 사람 없이 술만 몇 통을 비우면서 한 시진 정도 이어졌다. 다들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서 유월과 호위에게 창과 방패를 빼앗아서 비틀대며 펄쩍펄쩍 뛰고,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게 고함치며 뛰어다녔다.

영원은 담요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한 잔 또 한 잔, 연달아 열 잔 가까이 마시고는 잔뜩 취한 듯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 몸은…… 취했다. 너희들끼리 놀아라. 이 몸은…… 자러 간다!”

영원이 말을 꺼내자, 유월이 다급하게 사환을 불렀다. 사환 몇이 한 사람씩 부축해서 질질 끌고 당기고, 달래고 어르면서,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계소영은 주변을 훑어보고는 슬금슬금 영원을 따라가서 부축했다.

“칠랑, 술을 많이 마셨군. 날 잡게.”

“너…… 소육이냐? 소육은 이렇게 잘생기지 않았지. 너는…… 내가 지금 앞이 아른거린다. 심하게 아른거려…….”

“칠랑, 눈은 왜? 칠랑, 며칠 뒤면 오황자의 생신인데 선물은 준비했나? 잊지 말고 준비하게.”

계소영은 거의 한 줄로 보일 정도로 가늘게 뜬 영원의 두 눈을 직시했다. 영원은 계속 넘어질 것 같이 비틀거리면서 중얼중얼했다.

“생신? 그러니까 말이다. 잊진 않았지만, 선물은 무슨. 준비는 무슨. 필요한 게 뭐가 있어서? 이 몸이 지금……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서?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가지고 있을 텐데.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다! 없어! 이 몸은…… 바쁘다! 축하하더라도…… 나중에 해야지.”

“나도 그 말이네. 어차피 그동안도 챙기지 못했으니, 올해가 되든 내년이 되든, 아니면 내후년이 되든 상관없네. 언젠간 제대로 축하할 때가 올 것이네. 칠랑, 정신이 멀쩡한 걸 보니 많이 취한 건 아니군.”

계소영은 손에 힘이라도 풀면 영원이 엉덩방아를 찧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안 듯이 부축해서는 딱 붙어서 귓가에 속삭였다.

영원은 더 흐트러진 걸음으로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네…… 말이 맞다! 잘했다! 좋아!”

“오황자와 그분은…… 평안하신가?”

계소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뭐라고? 누구? 누가 안 편하다고?”

영원은 계소영의 품에서 빙그르르 돌아서 비틀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해댔다.

“누가 안 편한데? 안 편하면 안 편한 거고, 편하면 편한 거지. 그냥 술 몇 잔 한 거라, 괜찮다! 나도 괜찮다! 걱정할 것 없어! 이 정도 술이 뭐라고! 이 나리는 예전에…… 예전에…… 말에게 물을 먹일 때도 술을……. 끅!”

영원은 정말로 취한 듯이 연달아 끅끅댔다. 계소영은 어이없어하며 그를 흘겨봤다.

경계심이 강해도 너무 강한 것 아니냐!

여염은 계소영의 거처 바로 옆 뜨락에 이신과 함께 묵는데, 술에 취해 방향을 잃은 것처럼 이신을 끌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소영, 영원 두 사람과 점점 멀어져서 저쪽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신 역시 취한 듯이 걸음을 질질 끌며 따라갔다. 계소영이 달려가 영원을 부축하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고, 여염이 이러는 걸 보니 그 역시 그 이유를 빤히 아는 듯했다. 그러니 이신은 그냥 여염을 따라 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좋으니까.

다음 날, 사람들은 모두 늦게 일어났다. 어제 사냥도 하고 통쾌하게 마신 바람에 연달아 사흘 사냥하려던 계획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점심때, 장원 뒤 오래된 은행나무 숲에 휘장을 치고, 바닥엔 영원이 가지고 온 커다랗고 두꺼운 담요를 깔고 상과 의자를 놓았다. 류만과 기녀들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각 탁상 사이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아라는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위봉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라 소저야, 묵칠을 보호막으로 삼는 것만 배웠지, 어떻게 해야 이름난 기녀가 되는지는 결국 배우지 못했구나.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누군가는 마음에 드는 기녀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마음껏 희롱했고, 누군가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주량을 겨뤘다.

묵칠은 다소 정신이 팔린 듯했다. 자기는 여기서 떠들썩하게 즐기는데 아라는 어쩌고 있을지. 아라가 오지 않으려 했다. 와서 다 같이 즐겁게 보내면 좋으련만.

영원 옆에 딱 붙은 주육은 꿈꾸는 미래를 몹시 들뜬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어떻게 무예를 수련해서 어떻게 전장에 올라 어떻게 적을 죽일 것인지, 그리고 또 어떻게 공을 세우고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것인지까지…….

계소영과 여염, 이신은 영원, 주육과 같은 상에 있었고, 계소영은 술잔을 쥔 채 천천히 홀짝이다가 문득 주육을 바라봤다.

“육랑, 자넬 보니 어떤 글이 떠오르는군. 그야말로 자네 이야기일세. 들어보겠나?”

“내 이야기? 무슨 글인데?”

주육은 얼떨떨한 얼굴이었고, 여염은 무의식적으로 영원부터 바라보고는 시선을 떼고 주육을 바라봤다. 주가와 계가는 반목하는 가문이고, 주육과 계소영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까지는 아니고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계소영이 먼저 주육에게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물론 주육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오늘은 가까워지려는 것일까, 아니면 도발하는 것일까.

“양일소(楊一笑)라는 자가 처음엔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3년 동안 급제하지 못하자 나중엔 무예를 배웠네. 연무장에서 활을 한 발 쏘았는데 고리(鼓吏: 북을 관장하는 관리)를 맞추어 쫓겨났지.”

계소영이 한 글자, 한 글자 매우 느리게 읊었고, 고리를 맞췄다는 대목을 읊자마자 모두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고자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뒤는 내가 읊지! 나중에 의술을 배웠는데 성과가 있어 좋은 처방을 스스로 만들어냈는데, 제가 복용하고는 죽었지!”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영원은 상을 탁탁 내리치며 하하 웃었고, 묵칠이 주육을 손가락질하는 바람에 그 소맷자락에 잔이며 접시며 바닥에 떨어졌다. 고자의는 배를 붙잡고 웃으며 발까지 굴렀다. 여염도 웃었지만 눈은 주육과 영원을 향해 있었다. 이신은 웃다 못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주육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상을 사이에 두고 계소영을 향해 삿대질했다.

“계가! 너, 말이다! 잘 들어라! 너, 말이다! 너…… 넌 뭐가 그렇게 잘났어? 날 비웃어? 넌 나보다 뭐가 더 잘라서? 너도 수재, 이 몸도 수재다! 같은 수재끼리, 무슨 염치로 날 비웃어?”

계소영이 쉴 새 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농담이지.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수재고, 자네도 수재지. 이러면 어떻겠나. 우리 이번 가을에 함께 과거를 보지 않겠나? 자네가 급제하면, 아까 그 글을 우리 계가 대문에 한 달 동안 붙여 놓겠네. 자네가 급제하지 못하면…… 붙이지 않는 것으로 하고.”

“허 참! 너는 과거만 보면 급제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재능이 있다는 말이 다 허명인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래, 3년이 지났는데 급제하지 못했다. 그럼 너는 급제했고? 나랑 같은 처지 아니냐? 자신 있으면 거인이 되어 보던가. 그리고 내년에 진사가 되면 되겠군. 그런 소리는 네가 진사가 된 다음에 해라. 같은 수재끼리, 무슨 염치로 날 비웃는 거냐?”

주육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도전을 응할 수 있어야지 말이다. 그 수재 자리도 다른 사람의 글로 연줄을 통해 얻은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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