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유혹
“아이고, 역시 이슬을 맞았군. 이것 좀 보게, 분위기가 나지 않는가.”
진정한 구제 불능인 주 육소야는 성큼 앞으로 나가서 아라의 턱을 치켜들었다. 묵칠이 다가가 주 육소야의 손을 탁 쳐냈다.
“고개 숙이지 마라. 들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으냐.”
영원이 문 앞에서 멀리서 아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고개를 숙이던 아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쭈뼛쭈뼛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영원쪽은 바라보지도 못했다.
“됐다. 눈 호강 했으면 얼른 가자. 더 늦으면 좋은 걸 못 잡는다.”
영원은 다급해서 죽으려고 하는 묵칠을 힐끔 보고는 껄껄 웃으며 모두를 불렀다.
주 육소야는 묵칠이 못 본 틈을 타서 아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젠 정말로 요염해졌구나. 경성에 돌아가면 이 몸이 네 체면 세워주러 가마. 소칠, 정말로 사냥 가지 않을 거냐? 하긴, 가장 좋은 걸 손에 넣었으니. 가자, 가. 소칠, 즐기는 건 좋은데 몸 생각은 해라.”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묘한 말을 하면서 영원을 따라 우르르 몰려나갔다. 밖으로 나가서 말에 오르자 세견들도 달려 나왔다. 일행은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산으로 향했다.
영원은 고삐를 잡은 채 무리 중간에서 계소영, 여염들을 주시하며 달렸다. 계소영과 여염 등 세도가 자제는 군자는 여섯 가지 기예를 익혀야 한다는 옛 말씀을 따라 적어도 기마술은 그럭저럭 쓸만했다.
(※ 여섯 가지 기예, 육예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이신은 견문을 넓히러 세상을 돌아다닌 동안 육로에선 말을 타서 기마 솜씨는 이들보다 더 뛰어났다.
영원은 살며시 안도했다.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이 산을 꼼꼼히 살펴봤었다. 산세가 완만해서 말을 어느 정도만 타면 맹수가 돌연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아주 놀랄 일은 없고,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냥 나가는 일이 지극히 드문 여염은 깊은 산으로 들어와서 말 투레질 소리, 개 짖는 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흥분도 됐다. 그는 영가의 호위 뒤에 바짝 붙어서 흥미 가득한 모습으로 말을 달렸다.
계소영은 이신과 말을 나란히 달리며 때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곁눈으로 쉴 새 없이 영원을 살폈다.
어제 묵칠의 일은 누구보다 먼저 들어 알고 있었다. 아라 하나로 적어도 묵칠을 포섭했고, 앞으로 묵칠이 영원을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계소영은 존경 가득한 얼굴로 영원 곁에 바짝 붙은 주육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영원이 포섭한 사람들이라……. 너무 자세히 생각하지 말아야겠군. 생각할수록 문제가 많아진다. 게다가…….
계소영의 시선이 다시 주육에게 돌아왔다.
겉으로는 주육이 영원에게 알랑거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이번 사냥, 어쩌면 영원이 주육의 마음을 잡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아라도!
계소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제대로 떴다.
계소영이 정신이 팔린 것을 민감하게 알아챈 이신은 그의 시선을 따라 영원과 주육을 바라보다가 금세 시선을 떼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계가의 응어리에 대해, 문 이야가 자기에게 세세히 몇 번이나 말해줬는지 모른다. 계소영, 혹은 계가는 분명 영원의 속내를 떠볼 것이다. 그리고 영원과 결탁할 것이다. 이 모든 걸 문 이야가 예상했다. 지금 계소영은 영원을 관찰하고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사냥에 나선 곱게 호강하며 자란 공자들이 고함치고, 말은 울부짖고, 어지러울 정도로 방향을 바꿔가며 시끄럽게 한바탕 뛰어다닌 끝에, 놀랍게도 빈손인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산더미처럼 산짐승을 잡았다. 산림 밖을 에워싸고 시중들던 유월을 비롯한 호위, 그리고 암암리에 전체를 돌보던 장대 일행 덕분이었다. 그들이 대단하고, 매우 애썼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 위봉낭은 사람들을 이끌고 산자락에 경치가 절묘한 공터를 찾았고, 종복과 호위들이 벌레와 모기를 쫓고 불을 피우고 솥을 걸고 고기 구울 틀을 걸었다. 그 자리에서 사슴, 산양 그리고 꿩, 산토끼 등 산짐승 가죽을 벗기고, 채소를 잔뜩 뽑아서 대나무를 잘라 죽통밥을 만들었다. 굽고, 끓이고, 무치고, 야생의 느낌이 가득한 데 맛이 제법 좋았다.
오후, 여염은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움직일 수 없다고 문회를 하자고 난리를 부리자, 위봉낭이 서둘러 사람을 불러 옆에 그늘진 빈터에 담요를 깔고 그 자리에서 대나무를 잘라 대나무 평상을 만들었다. 그 위에 과일을 놓고 사환에게 명령해서 화롯불을 피워 차를 내렸다.
오후 내내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늘한 바람을 쐬고 싱그러운 향기를 맡는 동안, 문장은 짓지 못했지만 시는 제법 지었다.
한창 흥이 오른 주 육소야는 점심을 먹고 영원을 따라 오후에도 계속 사냥하며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늠름한 기세의 표범을 만나 흥분도 되고 떨리기도 하고, 기쁜 마음에 용기를 내서 화살을 쐈더니, 놀랍게도 단발에 맞췄다. 영원이 화살을 한 번 더 쏴서 표범을 쓰러뜨렸다. 영원은 첫발을 주육이 쏜 것이라서, 규칙에 따르면 표범은 주육의 포획물이라고 말했다.
주육은 흥분해서 얼굴이 다 벌게졌다. 표범을 말에 싣겠다고 고집하고는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몸을 비틀며 표범을 자랑해댔다.
놀이하듯 진행된 사냥은 저녁이 되기 전에 마무리됐고, 모두가 장원으로 돌아갔을 땐 석양이 겨우 지기 시작한 때였다.
목욕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염, 계소영 등 재자, 명사는 저 멀리 석양이 지는 산, 생기 가득한 밭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탄식해댔다. 다들 귀원전거(歸園田居: 도연명의 시)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을 거라며 또 시 몇 수를 읊어댔다.
주육과 영원도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모두를 불러 장원 한쪽 보리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즐겼다.
보리밭의 보리는 진작 수확해서 텅 비었고, 주변엔 며칠 동안 쑥잎 등 모기를 쫓아내는 약초를 피워두었다. 오늘 아침엔 깨끗한 물을 뿌리는 등, 몇 번이고 청소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보리밭 전체에 향긋한 청향이 가득해서 후련하고 통쾌한 느낌이 가득했다.
보리밭 정중앙에 과일 탄으로 불길이 왕성한 모닥불을 피우고 동 주전자, 구이 틀 같은 걸 걸어두었다. 한쪽엔 주육이 잡은 표범이 보란 듯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포획물도 걸려있고, 포획물 뒤 줄줄이 솥이 걸린 곳엔 영원과 주육이 경성에서 데리고 온 요리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신은 여염과 계소영 무리 중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과거에 급제하면 경림연(瓊林宴)에서 꽃을 꽂고 유세하며 그때부터 부귀영화의 길에 오른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다. 그러나 이런 왕후 가문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과거 급제자가 어디 있을까?
경성으로 들어온 이래, 자등 산장에서 지내는 나날만 해도 지극히 사치스럽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냥과 비교하면 자등 산장의 생활은 소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점심때부터 고자의는 여염과 계소영 무리를 벗어나 영원과 주육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인데도 주육이 지난번 영원 형님의 연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고 하자, 고자의는 그런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유감스러워했다.
여염과 계소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채를 흔들면서 속닥대며 유유자적 걸었다.
모닥불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모닥불을 에워싸고 비단 의자가 놓여 있었다. 대나무 의자, 죽탑, 흔들의자 심지어 매우 두꺼운 담요도 있었다. 저마다 취향대로 골라서 앉았는데, 계소영은 죽탑을 골랐고, 여염은 비단 의자에 앉았다. 이신은 흔들의자를 골랐다. 앉아서 가볍게 흔들었더니,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이 속이 매우 후련해졌다.
영원과 주육, 묵칠 일행은 중앙에 있었다. 사실 다들 모닥불 주변에 있어서 어디가 중간이고 가장자리인지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영원이 있는 곳이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었다.
영원은 맨발로 옷은 반쯤 풀어 헤친 채 화려한 담요 위에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주육도 영원의 자세를 따라 맨발에 옷을 풀어 헤쳤다.
계소영은 주육을 삐딱하게 보다가 여염을 쿡쿡 찌르면서 그다지 작지 않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저것 좀 보고 적당한 말을 찾아보게.”
“한단학보(邯鄲學步: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면 제 재간까지 다 잃는다)?”
“틀렸네! 동시효빈(東施效顰: 남의 결점을 장점인 줄 알고 배워서 더 나빠지다. 서시는 얼굴을 찌푸려도 미인이라서 따라서 얼굴을 찌푸리는 여인을 동시라고 가리킨 말)일세!”
이신도 못 참고 쿡쿡 웃었다. 영원의 행동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원의 용모, 풍채가 없이 따라하기만 하면 확실히 동시(東施) 같긴 했다.
주육은 스스로 제 모습이 매우 보기 좋다고 여기면서, 표범을 볼 때면 들뜬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 잠깐 사이에 표범 가죽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온갖 용도를 다 떠올렸다.
영원은 주육을 상대하지 않고 묵칠과 이야기하느라 여념 없었다.
“오늘 기운을 다 뺀 건 아니겠지?”
“칠랑도 참. 별일도 없었다. 아라가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냥 아라와 함께 장원에서 거닐었을 뿐이다. 아라는 이 나이 되도록 장원에 처음 오는 거라고 하더라. 뭘 봐도 신기해하더라고. 넌 모르겠지만…….”
“아라의 머리를 올려주었으니, 은자는 어쩔 셈이냐?”
영원은 아라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어서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런데 주육이 다시 영원의 말을 잘랐다.
“은자라니? 이미 일을 다 치렀는데, 은자는 뭐 하러? 나중에 머리 장식이나 만들어 주면 되지. 은자를 주어도 아라 손에 들어가는 것도 없을 텐데. 행수기녀 좋은 일만 하는 거다. 마침 여기서 치렀으니 잘 되었지!”
영원이 주육을 흘겨보자, 주육이 얼른 해명했다.
“영원 형님, 몰라서 그러는데, 아라 행수기녀, 양심이 없기로 유명하다. 묵칠이 아라를 아끼는 걸 알고 한몫 잡으려고 얼마나 안달인지 몰라. 대뜸 16,666냥을 달라잖아. 들어보라고, 돈 생각에 미쳤다니까!”
“많은 것도 아니네.”
영원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맞지,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묵칠이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없지. 하지만 아라인걸…….”
“아라면 뭐? 조금 더 요염한 것뿐 아니냐? 영원 형님,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나.”
주육은 매우 언짢아졌다. 물론 모두 묵칠 때문에 언짢은 것이고 영원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많지 않은걸. 아라 같은 요물은 뼛속까지 요염하거든. 매우 귀하지. 그 운우지정이…….”
영원이 묵칠을 향해 눈썹을 까딱이며 경박한 표정으로 물었다.
“매우 통쾌했지?”
묵칠이 실없이 웃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통쾌했으니, 가치 있지. 게다가 은자 만 냥이 많나?”
영원이 ‘그 정도 은자도 은자라고 치느냐’ 하는 얼굴로 주육을 바라봤다. 주육은 눈을 부릅뜨고 영원을 바라보다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묵칠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난 결정했다. 아라를 난처하게 하면 안 되지. 고작 은자 만 냥 아니냐. 돌아가면 바로 가져다줘야지. 그리고 아라에게 머리 장식 몇 개 만들어 주고, 옷도 몇 벌 지어줘야겠다. 칠 형, 아라는 진주가 좋을까, 아니면 금강석이 좋을까?”
묵칠은 잔뜩 들뜬 얼굴로 주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