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무너뜨리다 二
묵칠은 화가 나서 이마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뭐라고? 영원 그놈이……. 감히! 감히 널 그렇게 대해?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묵칠은 탁자를 내리칠 뿐, 반드시 어쩔 건지는 결국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다행히 밖에 분위기를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야우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소야! 위 낭자가 오셨습니다. 영 칠야가 시중들라고 아라 소저를 부르신답니다.”
아라는 겁에 질려 부르르 떨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잠시도 쉬지 못했는데, 지금 불려가서 등을 들고 휘장을 들고 서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버티라고.
“칠소야!”
아라가 그렁그렁, 애걸하는 표정으로 묵칠을 바라봤고, 묵칠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영원 그놈, 그놈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 하지만…….
아라의 그렁그렁한 눈빛에 묵칠은 결국 용기를 내서 크게 고함쳤다.
“아라는 내 시중을 들고 있다고 가서 말해라!”
묵칠은 버럭 소리를 질러놓고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있었다. 밖에 들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묵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결에 땀을 훔치려고 팔을 들다가 아라와 눈이 마주치자 허둥지둥 저쪽으로 휘둘렀다.
“이 몸이 그, 그놈을 무서워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아라는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묵칠을 바라봤다.
묵칠도 불안한 마음으로 풋콩 몇 알을 꾹꾹 씹어댔다.
영칠이 이따 직접 뛰쳐 들어오려나, 아니면 사람을 보내 아라를 끌고 갈까? 또 때리진 않겠지? 저녁에 술을 꽤 마셨던데……. 휴. 아까 좀 완곡하게 말할걸. 아라가 불편하다던가, 병이 났다던가…….
두 사람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울상을 하고 서로를 마주 봤다. 아라는 묵칠을 신경 쓰지 않았고, 묵칠 역시 지금은 아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따 영칠이 뛰쳐 들어오면 아라를 숨겨야 하나. 내가 맞는 걸 아라가 봤다간, 체면이…….
“칠소야. 위봉낭이 다시 왔습니다. 영 칠야가 전하라는 말이 있답니다.”
“뭐? 내가 그놈이 무서울까 봐? 어, 들어오라…… 아니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말해라!”
묵칠은 손가락 끝이 다 차가워졌다.
“예, 칠소야. 아라 소저가 여기에 있는 줄 모르고 아까 너무 느닷없이 굴었다고 하십니다. 사과의 뜻으로 간식 몇 가지와 술을 보내셨습니다. 아라 소저는 여기서 칠소야를 잘 모시면 된답니다. 칠소야가 기뻐하시면 우리 칠야도 그 무엇보다 기쁘답니다.”
위봉낭의 목소리가 휘장 너머에서 들리자, 묵칠은 눈을 꿈뻑, 또 꿈뻑이다가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라, 들어와서 이야기해라!”
“예!”
휘장을 젖히고 들어온 위봉낭은 일단 들고 있던 찬합을 열고 술과 간식을 꺼내, 이미 음식이 가득한 탁자를 비집고 공간을 만들어내서 올려놓았다.
“너희 칠야, 술 많이 드셨느냐? 잠자리에 들었나?”
“술을 많이 드시긴 했는데, 아직입니다. 글자 연습하고 계십니다.”
위봉낭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공손하기 짝이 없이 말했다.
“글자 연습? 그렇지. 잘 연습해야 할 글이지. 한림원 선생들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라는 앞으로 내 시중을 들어야 하니, 일을 시키지 말라고 너희 칠야에게 말해라.”
묵칠은 숨을 죽이고 위봉낭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 칠소야는 우리 칠야의 벗이잖습니까. 칠야는 차라리 자기가 힘들 망정 절대로 벗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네가 너희 칠야보다 사리 분별을 하는구나. 됐다. 이만 가 봐라.”
위봉낭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고, 묵칠은 매우 만족했다.
영칠 그놈과 벗이 된 느낌, 정말 좋군!
위봉낭이 공손하게 물러가자, 아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묵 칠소야 곁에 있으면 분명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자, 우리 이 술 한 번 맛보자. 오늘 점심때 고가 놈이 이 술이 매우 순하고 좋다고 몇 번이나 말하더구나. 자, 마셔보자.”
묵칠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서 석류주를 들고 따듯한 물에 담가둔 유리잔을 꺼내 술을 따랐다. 새빨간 것이 너무 예뻤다.
아라는 한숨을 돌리고는, 앞으로 적어도 며칠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술잔을 받았다. 폭신폭신한 웃음을 지으며 묵칠과 나긋나긋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둘이서 큰 주전자에 든 술을 몽땅 비웠다.
묵칠은 눈앞이 아른아른한 것이 취기가 올라왔다. 이제야 고가 놈이 이 술이 매우 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듯했다. 이 술은 순해서 홀짝홀짝 넘어가는 것이 자꾸 마시게 되었다.
아라는 묵칠보다 더 취했다. 술이 실로 맛있었다. 짙은 과일 향에 달달한 뒷맛, 전혀 술 같지 않았고, 거기에 기분도 매우 좋아서 묵칠보다 조금 더 마셨다.
내실 창문 밖, 위봉낭과 야우, 신무 등 세 사람이 창문 아래서 각자 석류주를 들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목을 길게 뺀 오리 세 마리처럼 일제히 창문으로 목을 빼고 귀를 쫑긋 세웠다.
기척이 들리는 순간,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위봉낭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잔을 야우에게 쥐여주었다.
“됐다. 일을 치렀다. 난 돌아가서 우리 칠야에게 보고해야겠다. 휴, 너희 소야, 참으로 변변치 않구나!”
“우리 칠소야, 오늘은 꽤 멋진 편이었는데요!”
위봉낭이 잔뜩 무시하는 얼굴로 안쪽을 향해 입을 비죽이자, 신무가 나름 진지하게 말대답했다.
“술김에 용기가 생긴 거지!”
야우가 헛웃음 쳤다.
위봉낭은 소리 내어 웃고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젓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야우와 신무는 다시 술을 따르고 계속해서 목을 빼고 창문 너머 기척을 주시했다.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위봉낭은 느긋하게 돌아와서 입구에서 기별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막 좌선을 마친 영원은 상반신을 벗은 채 몸을 닦다가 그녀를 힐끔 돌아봤다.
“성공했느냐?”
“됐습니다. 못 말릴 정도로 쫄보는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위봉낭이 싱글벙글 웃었다. 술도 가져다주고, 발가벗겨서 침상에 같이 던져놓기까지 했는데 일을 치르지 못하면, 그게 어디 사내인가? 아예 내가 단칼에 거세해 주는 게 낫지!
“이따 약을 좀 보내주어라. 내일 묵칠의 말은 준비할 것 없다. 아라와 이 장원에서 며칠 달콤하게 즐기며 보내라고 해라.”
“예.”
위봉낭이 웃으며 대답했다.
“말을 잘 못 타는 서생들이 늘었으니 유월에게 가서 다시 한번 잘 단속하라고 전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고가 생기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영원이 힐끔 바라보자 위봉낭은 가슴이 철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대가 직접 사람들을 산으로 데리고 갈 겁니다.”
영원이 이번에 경성에 데리고 간 수하는 모두 장대가 총괄했다. 높은 산속을 뚫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깊은 산림에 들어가 사냥할 때 은밀하게 호위하는 일은 유월보다 더 나았다.
“음. 너도 가서 쉬어라. 내일 계소영을 잘 지켜보고.”
“예.”
영원이 가라앉은 얼굴로 하는 말에 위봉낭이 공손하게 물러났다.
영원은 탑상에 앉아 종이를 깔고 천천히 글을 쓰면서 오늘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
오늘의 ‘우연한 만남’은 누구 뜻일까? 계소영? 배가 계가의 것이니 분명 관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뜻일까, 아니면 계가의 뜻일까. 그리고 여염도. 사정을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사정을 안다면, 강 건너 불구경할 셈인가, 아니면 참여할 생각이 있는 걸까?
영원은 한참 글을 쓰다가 붓을 내던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우연한 만남’이 그는 기뻤다.
매우 기쁘구나!
그러나 경성에 똑똑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상기시켜 주었다. 앞으로 더 신중해야만 한다.
오가아의 생일은…… 역시 그만두자…….
누님과 오가아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경성에 들어온 이래, 누님과 오가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칼로 벤 듯 마음이 아팠다.
영원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서 별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 사야가 천도가 변했다고 했다. 누군가 하늘을 거스르고 운명을 바꿨다고. 하늘을 거스르고 운명을 바꾼 그 사람이 누굴까?
누구든 그에게는 지극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다면, 천도가 바뀔 일도 없었을 테니까.
다음날 이른 아침.
주 육소야는 묵칠의 좋은 일을 듣다 말고 ‘오오!’ 하고 고함치고는 아침도 먹다 말고 축하 인사하려고 묵칠에게 달려갔다. 물론 묵칠을 침상에 묶어놓고 춘색(春色)을 한없이 즐겨보려는 마음이 그득했다.
소자람은 사환의 보고를 듣던 중에 양칫물을 모두 뿜었다.
“정말로 일을 치렀다고? 아라랑? 정말로 아라가?”
“정말입니다. 이른 아침에, 날이 밝기도 전에 영 칠야가 축하 선물을 보냈습니다. 칠소야가 밤에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사냥 가지 말라고도 하던걸요. 장원에서 아라와 함께 잠이나 더 자라고요.”
사환이 묘한 표정으로 눈을 찡긋했다. 사내가 기녀의 머리를 올려주었다는 건, 경성이었다면 축하하는 사람으로 연향루가 시끌벅적할 일이었다. 첫째는 축하, 둘째는 기녀가 머리를 올렸으니 이제 명목이 생긴 것이고,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연향루에서 하룻밤 보낼 날을 받으러 줄을 설 것이다. 기녀가 머리를 올린 처음 반년 동안은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시기이기도 했다.
소자람은 계속 입을 헹군 다음 단장하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영칠이 열흘이라고 했는데 열흘도 안 걸렸구나.
여인 조련하는 데 정말로 일가견이 있어! 북삼로에 있을 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그만이라더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군.
그렇게 잘생겼으니, 여인이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휴. 북삼로에서 온 이 야만인, 역시 단순하지 않군. 소칠이 뜻을 이뤘으니, 이젠 내려놓으려나? 모를 일이지. 갈수록 빠져들지도 모르지.
소자람은 이런저런 허튼 생각을 했다.
휴. 소칠 이놈, 여인복이 꽤 있구나. 아라처럼 요염한 여인은 원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걸. 이러다가……. 흠,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소칠을 보러 가야겠군. 이번 행은 정말이지…… 떠들썩하구나!
영원이 푸른 기마복을 입고 우아한 척 부채를 흔들며 성큼성큼 묵칠 거처로 들어왔을 때, 방 안엔 이미 사람이 가득했다. 묵칠은 내실 문 앞을 막고 있었고, 주 육소야는 펄쩍펄쩍 뛰며 그를 물고 늘어졌다.
“안 돼, 안 돼. 나와! 사냥을 못 하고 술은 못 마신대도, 아무리 그래도 차는 한잔 올려야지! 아라는? 소칠, 잘 들어라. 여긴 내 장원이다. 네가 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나와라, 나와! 새 사람을 안고 밤새 즐겼는데, 우리도 미인 얼굴은 봐야지!”
“칠랑, 얼른 이놈 좀 데리고 가라. 옷이 다 찢어지겠다!”
묵칠은 영원을 보자 구세주를 만난 듯이 까치발을 들고 도와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원 형님 오셨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원 형님이 왔는데 얼른 아라를 내보내지 못할까! 영원 형님에겐 반드시 차를 올려야지! 영원 형님 없이 네 그 지난밤의 풍류사가 있었겠어?”
주 육소야는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다. 영원은 입구에 서서 모두를 향해 빙글 공수하고는 부채를 펼치고 묵칠과 주 육소야를 가리켰다.
“소육의 말이 맞지. 지킬 예는 지켜야지. 다들 그렇지 않나? 얼른, 모두에게 차 한 잔씩 올려라. 그래야 우리도 사냥을 가지.”
온 실내를 가득 채운 사고뭉치들은 세상이 평온할까 걱정이라는 듯이 일제히 고함치며 환영했다.
“칠랑, 이게…….”
묵칠은 영원의 말에 다급해져서 양손으로 문틀을 꼭 잡았다. 영원은 빙긋이 웃으며 잠깐 기다리다가, 내실에서 기척이 전혀 없자 촤르륵 부채를 접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봉낭은? 네가 들어가서 모셔오너라.”
입구에 서 있던 위봉낭이 대답했다.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가볍게 묵칠을 지나쳐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금세 다시 휘장을 젖히고 나왔다. 아라는 뺨이 발그레해져서 평소보다 더 가냘프고 요염한 모습으로 내실 밖으로 나와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모두를 향해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