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무너뜨리다 一
이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해가 물러났다. 이신은 고개를 돌려 여염에게 장원과 찻잎 이야기를 나직이 말했다.
“조금 가지고 오라고 할까? 계수나무 아래 자라는 차라서, 흔한 물건이 아니네.”
여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고 오야는 자존심이 높고 고고한 사람일세. 아까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무슨 일로 주육과 틀어졌는지 모르겠네. 아깐 신경 쓰지 못했으니, 일단 찻잎을 고 오야에게 보내세.”
“알겠네.”
이신이 웃으며 나지막이 대답하자, 계소영이 두 사람을 힐끔 바라봤다.
“자네 집안에서만 감춰두고 마시는 차인가? 나도 맛 좀 보게 조금 주게나.”
“그런 셈이지. 청담한 맛에 살짝 꽃 향이 난다네. 내 누이가 가장 좋아하는 차인데, 나는 그저 그렇네. 강남의 철관음이 차라리 내 취향에 맞거든.”
이신이 웃으며 설명했다.
계소영이 담담하게 그렇냐고 대답했다.
청담한 맛에 살짝 꽃 향이 나는 차라. 사람과도 매우 어울리는 맛이겠군.
눈앞에 보림암 밖에서 만났던 수묵화 같던 여인이 다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청담하면서도 그윽하고, 꽃향기가 나면서도 저속하지 않던 여인이.
계소영 일행이 추구하던 열심히 글공부하던 문회 여행은 임강성에 도착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영원과 주육 일행의 놀이 무리에 끼어들게 되면서 완월루에서 진탕 먹고 마시고 나온 다음, 일행은 말을 타고 호탕하게 주가 별장, 경성 일대에서 가장 은밀한 산림지로 달려갔다.
주가 장원에 당도했을 때는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기울었다. 며칠 전에 미리 와서 준비하던 관사가 종복, 장두, 장원 등을 거느리고 3리 밖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길가에 대홍색 등롱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 것이 여간 경사스럽고 호방한 것이 아니었다. 주 육소야는 영원과 함께 맨 앞에 서서 가는 내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영원 형님 앞에서 체면이 서는구나!
갑자기 여남은 명이 늘었지만, 다행히 장원이 넓었다. 오후에 주 육소야가 미리 사람을 보내 통보도 했고, 촉박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면밀하게 준비되었다. 사람들은 내일 일찍 일어나 사냥하러 산에 들어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묵칠은 점심때부터…… 사실은 아라가 영원 뒤에 서서 거대한 부채를 흔드는 걸 본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지금은 진정됐지만,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아서 회랑에 나가서 의자를 흔들며 멍하니 있었다.
아라, 지금도 영칠 곁에서 시중들고 있을까? 아니라면 무얼 하고 있을까. 거처는 편안할까? 오는 내내 힘들진 않았을까?
고민 천만이고 애간장을 끓이던 묵칠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야우를 불러 분부했다.
“야우! 아라 소저가 어쩌고 있는지 가서 알아봐라.”
야우는 조르륵 달려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소야, 알아냈습니다. 아라 소저는 바로 우리 옆, 옆 뜨락에 묵습니다. 운수, 류만 소저도 같이요. 경성에서 온 기녀는 모두 그 뜨락에 묵는답니다. 다다를 불러서 자세히 물었는데, 아라 소저는 잘 있고, 지금 목욕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라 소저와 류만 소저가 같은 방을 쓰는데, 방 안에 얼음도 있답니다. 얼음이며, 찬 그릇이며, 달라는 대로 다 준답니다. 그리고…….”
묵칠은 너무나 괴로웠다.
“그리고 또 뭐? 아라가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쓴다고? 아라가 어떻게 남이랑 같은 방을 써? 같은 뜨락? 류만이라고 해도 안 돼! 아라야…….”
“소야, 칠야가 말씀했잖습니까. 열흘이라고. 이제 겨우 이레입니다.”
야우가 손을 흔들며 묵칠을 상기시켰지만, 묵칠은 분한 듯이 혀를 찼다.
“쯧! 내가 당한 것 같다!”
묵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뜨락 문 앞에서 당직 서던 사환이 천붕 밖에 서서 고했다.
“칠소야! 다다라는 시녀가 뵙길 청합니다.”
“다다! 어서 데리고 들어와라!”
묵칠은 펄쩍 뛸 뻔했다. 다다가 날 찾아왔다! 아라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아라가 다다를 보내 날 찾다니, 분명 큰일이 생긴 것이다!
다다는 들어와서 예를 갖추고 일어나기도 전에 눈시울이 붉어져서 말했다.
“칠소야, 우리 소저가 며칠 동안 소야를 못 뵀다고, 몸은 괜찮으신지 걱정하세요.”
“좋다, 좋아. 난 멀쩡하다. 너희 소저는 어떠냐? 오늘 힘들진 않았다더냐? 지금은 어쩌고 있느냐? 잠은 잘 자고? 너희 소저는 연약한데……. 내가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묵칠이 횡설수설하자, 야우가 미친 듯이 헛기침했다. 칠소야, 칠소야! 아무리 그래도 변변찮은 모습 좀 보이지 마십시오. 시녀 앞에서 바닥을 다 드러낼 셈이십니까!
“아라는 괜찮으냐?”
묵칠은 드디어 바닥까지 드러내진 않고, 다다의 얼굴에 아라의 얼굴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간절한 얼굴로 다다를 바라봤다.
“우리 소저가 칠소야를 만나서 드릴 말씀이 좀 있대요.”
다다가 찾아온 이유를 밝히자 묵칠이 단숨에 벌떡 일어났다.
“가마! 지금 바로 가마!”
야우가 다급하게 고함쳤다.
“소야! 저기…… 소야!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그! 영 칠야! 영 칠야를 잊지 마세요!”
다다 앞에서 사흘이 더 남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귀띔했는데, 설마 못 알아듣지 않으시겠지요, 소야!
“깜빡할 뻔했군. 네 말이 맞다. 아라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빈손으로 어찌 만나겠느냐. 맞다, 맞아. 어서 가서 선물로 들어온 용봉단차를 가지고 오너라……. 건든 건 아니겠지? 뜯지 않았지? 그리고…….”
묵칠은 이미 정신이 나가서 두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야우는 다급한 와중에 기지를 발휘했다.
“소야, 아라 소저는 류만 소저와 같은 방에 묵으시는걸요. 지금 시각이…… 보세요, 해가 다 저물었습니다. 분명 이미 쉬고 계실 겁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내일…….”
묵칠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철썩철썩 두드렸다.
“맞다, 맞아! 영칠 이 망할 놈. 이렇게 아라를 대하다니. 아라가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쓰게 하다니! 나중에 가만두지 않겠다! 저기, 다다야, 아라에게 말 좀 전해주겠느냐? 안 가려는 게 아니라, 가도 이야기할 곳이 없지 않으냐. 그러지 말고…….”
“그럼 소저를 여기로 모시고 올게요.”
다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엉?”
묵칠은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에 놀라움과 의외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저기, 아라만 괜찮다면…….”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바로 가서 소저를 모셔올게요!”
다다가 활짝 웃으며 돌아서서 달려갔다.
“어, 저기…… 아이고…….”
묵칠은 한쪽 팔을 길게 뻗고서 한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아라가, 내 거처에 온다고? 먼저 내게로 온다고?
“어서! 어서 가서 방을 치워라. 향은 있느냐? 아니다, 아니야. 아라는 향을 싫어한다. 그…….”
야우는 얼이 다 빠져서 정신없이 빙글빙글 도는 묵칠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할 말이 없다는 듯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눈을 까뒤집었다.
“칠소야! 영 칠야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세 번이라고! 세 번 찾으러 왔을 때 말해야 한다고! 소야, 지금 이 꼴이 뭡니까!”
“영칠이 뭐라고. 영칠이 뭐라고 그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넌 눈도 없느냐? 아라가 고생하는 걸 못 보았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내 마음이…… 칼에 베인 것 같은데! 그런데 무슨 세 번! 넌 내가 영칠같이 양심 없는 물건으로 보이느냐? 내가 그놈과 같아?”
묵칠이 발을 구르며 호통쳤다. 야우는 눈을 흘기며 말대답하진 못하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영 칠야와 다르시지요. 영 칠야는 눈빛 하나로 아라를 다스리는걸요. 동으로 가라고 하면 서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걸요. 소야는 좀 보십시오. 아라 눈빛 하나에 절절매지 않습니까!
야우는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 위봉낭을 불러오라고 신무를 불렀다.
아라는 다다를 붙잡고 금세 묵칠의 거처에 나타났다. 뜨락 문 앞까지 마중 나간 묵칠은 서러운 듯 쭈뼛거리는 아라를 보고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손을 내밀어 붙잡고 싶어도 화를 낼까 봐 걱정이었고, 붙잡지 않자니 다정하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손을 내밀었다가 움츠렸다가, 움츠렸다가 다시 내밀었다가, 상방 문 앞에 갈 때까지 주춤거렸다.
상방 입구에 도착하자, 묵칠은 쏜살처럼 달려가 직접 휘장을 젖혀주었다. 아라와 다다가 안으로 들어가고서야 뒤를 따라서 들어가더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져서 야우를 비롯해서 사환들에게 연달아 분부해댔다.
“어서 차를 내오너라. 간식도. 아라는 단연자를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녹두백합 빙수도. 꿀은 조금만 뿌리면 된다. 많이 넣지 마라. 달다. 그리고 운두고, 백밀과도. 맞다, 맞아. 당증유락도 두 그릇 가지고 오너라. 다다도 좋아한다.”
야우는 또 눈을 까뒤집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라 앞이라 주인의 체면을 깎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대답하고는 쪼르륵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라는 몹시 서러운 얼굴로 묵칠이 분부하는 걸 들었다. 아까 빙수가 너무 달다고 한마디 했더니, 빙수를 들고 온 어멈이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 주제를 알라고, 같은 노비끼리 빙수를 얼마든지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지 까다롭게 군다고. 달거나 써서 싫거든, 그럴 재주가 있으면 상전에게 가서 말하라고.
이렇게 꾸중 듣는 건 처음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 않았으면 묵칠에게 다다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달려 나갔던 야우가 찬합을 든 어멈 몇을 데리고 돌아왔다. 맨 앞에 선 관사 어멈이 매우 친절하게 소개했다.
“칠소야께서 달라시던 간식과 빙수입니다. 이건 탕가 장원에서 보낸 석류주입니다. 탕 대소야 말씀이 얼음을 좀 넣어 드시는 게 가장 맛있답니다. 소인이 포도주를 담은 수정 주전자에 술을 담아 왔습니다. 이건 이가 장원에서 보낸 찻잎입니다. 청담한 맛에 은근히 꽃 향이 난답니다. 이가 대야 말씀이 청차를 우리고 꿀을 조금 섞고 얼음을 넣으면 더위도 해소되고 느끼함도 잡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답니다. 이건 조금 전에 밭에서 캔 고구마입니다. 이건 풋콩이고요. 모두 막 밭에서 캐온 신선한 것입니다. 칠소야, 아라 소저, 맛 한 번 보세요.”
관사 어멈은 주절주절하며 탁자 가득 접시를 늘어놓은 다음에 모두를 향해 빙글 돌며 예를 갖추고 물러갔다.
자기네 거처에 나온 것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공들인 술과 간식을 본 아라는 서러움, 슬픈 마음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기녀가 된 이래 항상 모든 이가 그녀를 떠받들었다. 특히 묵칠이. 이런 서러움과 수모를 겪은 적이 어디 있었으랴.
“아라, 이거 맛 좀 봐라. 이거 맛있다. 그리고 이것도. 아라, 저녁은 제대로 먹었느냐? 게살 두부, 네 입맛에 딱 맞았을 것이다. 우리 경성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신선하고 맛있지 않았느냐?”
“게살 두부요? 위봉낭이 우리는 귀한 분들을 시중들어야 한다고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건 싹 다 안 된댔어요. 생선, 게는 둘째치고 차에 생강도 못 넣게 했어요…….”
아라는 목 놓아 울지 않았을 뿐, 서러운 듯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위봉낭! 정말이지 살아있는 염라대왕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