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물러설 수 없는 퇴로
문 이야의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이동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아는 일이고, 예전의 지금 이 시기엔 모르는 일이었다.
“영 황후가 회임했을 때 희맥이 지극히 불안정했습니다. 그때가 계 상공이 아직 있던 때인데, 상주서를 올렸습니다. 영 황후의 팔자가 약하다고요. 영 황후가 회임한 시기엔 매일매일 황후궁에 머무르시라고, 용의 위엄으로 영 황후 모자의 평안을 지켜야 한다고요. 당시 조정에서 이구동성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모처럼 얻은 귀한 적자의 무사 탄생을 지켜야 한다고 황상에 청했지요.”
문 이야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상은 주 귀비를 지극히 총애하는데, 설령 황상이 그러겠다고 해도 주 귀비가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조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궁도 난리가 났지요. 마침 북부에 전쟁이 일어나자, 황상이 친히 출정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제가 보기엔 황상은 정말로 출정하고 싶었을 겁니다. 조정 대신들의 핍박도 피하고, 후궁에서 주 귀비가 울며불며 난리 치는 것도 피하고요. 나중에 여 승상이 절충안을 제안했습니다. 장공주를 영 황후 궁으로 보내자고요. 장공주는 홍복을 받은 분이라는 걸 모두가 알지 않습니까. 황상은 곧바로 허락했지요. 장공주가 그렇게 영 황후 궁으로 들어가서 오황자가 태어나고, 만월이 될 때까지 머무르다가 나왔지요. 그 후로 영 황후는 별궁으로 몸을 피했고, 오황자는 지금껏 무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문 이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동을 바라봤다.
“이제 하는 말은 그냥 흘려듣고 잊으세요. 장공주가 정말로 도와준다면, 제 생각엔 나쁜 일은 아닐 듯합니다. 영가 영원은 보통 사람이 아닐 듯합니다. 장공주가 손을 쓴 이상, 돌이키기 힘들 겁니다. 정말로…… 영가가 득세한다면, 장공주의 공은 두 배가 되지요. 영가는 주가처럼 몹쓸 것들이 아니니, 나중에 장공주는 적어도 주 귀비 밑에 있는 것보다 잘 지낼 겁니다.”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문 이야를 바라봤다.
“오황자는 허약해서 폭죽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면서요.”
문 이야가 싸늘하게 웃었다.
“다 소문일 뿐이지요, 어찌 진짜로 여기겠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허약하다면, 영원이 뭐 하러 경성에 왔겠습니까. 오황자가 건강하고 총명한 사실을 모두 알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었겠습니까? 내가 보기엔!”
문 이야는 난간을 내리치고 벌떡 일어나서 몇 가닥 안 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황자가 가장 좋은 인선입니다! 주 귀비 소생 두 황자는 어리석은 건 괜찮아요. 그건 별문제 없는데, 문제는 어리석은 데다가 포악하기까지 한 것이지요. 정말로 등극했다가는 조정이 갈수록 힘들어질 겁니다. 내 눈에도 보이는 걸, 똑똑한 조정 대신들이 모르겠습니까? 진왕은 무능한 인간이고, 다만…….”
문 이야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쉴 새 없이 고개를 저었다.
“조정 대신들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진왕을 고르겠지요. 무능하고 나약하고, 성질은 하나도 없고. 외가도 없고, 조력자도 없고. 그야말로……. 허허.”
문 이야가 헛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진왕이 황상이 되면 신하의 세상이 되겠지요! 이 일은…….”
문 이야가 돌연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건 우선 생각하지 말고, 제 말은, 장공주가 이왕 입을 열었다면, 장공주가 낭자를 도와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습니다. 장공주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금도 머리 깎고 출가할 생각뿐인데,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있겠습니까? 잘 들으세요. 때로는 물러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닙니다. 한 걸음 나가야 합니다. 그 한 걸음을 내디뎌야 진정한 내 세상,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한 걸음 내디뎠는데, 그 앞이 벼랑일 수도 있잖아요.”
이동이 가차 없이 한마디 했다.
“허허, 떨어지면 떨어지는 게지요. 떨어지지 않아도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아닙니까. 밤낮 조마조마 맘졸이며 죽으니만 못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지요.”
이동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문 이야를 빤히 봤다.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었다.
“예를 들어 낭자도 물러설 길이 있지 않습니까? 퇴로가 있습니다. 지아비를 보필하고 자식을 가르치고. 강부에 청서라는 첩이 회임했다면서요. 마침 기회 아닙니까. 지금 돌아가서 첩을 잘 돌봐 주면 되지요. 만사 한 걸음 내주다 보면, 계속 내줘야 하는 법입니다. 강환장을 위해 자식을 잘 키워내는 것도 일가 화목한 좋은 일 아닙니까? 낭자, 그러시겠습니까? 그 한 발짝, 물러나시겠습니까?”
문 이야는 싸늘한 표정을 짓는 이동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보세요. 낭자도 물러서려 하지 않으시면서. 장공주는 낭자보다 성격이 더 거친 사람입니다. 물러서려 하겠습니까? 이왕 그렇게 된 거, 차라리 한 발짝 내딛는 게 낫지요. 앞이 꼭 벼랑이란 법은 없습니다. 설사 벼랑이라고 해도……. 잊지 마세요, 장공주는…….”
문 이야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어찌 됐든 장공주입니다.”
이동은 한참 침묵하다가 일어섰다.
“생각 좀 해야겠어요.”
“그렇죠. 낭자가 결정할 일입니다. 낭자가 무슨 결정을 하든, 제 생각엔 대야에겐 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문 이야는 꼿곳하게 서 있는 이동의 뒷모습을 뒷짐 진 채 바라봤다. 이동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정자 밖으로 나갔다.
문 이야는 이동이 멀리 간 후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드러누워 책을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평정을 찾을 수 없어서 아예 일어서서 산장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나갔다.
강변, 인부 서른여 명이 느긋하게 배를 당기고 있었다.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꽤 넓고 큰 2층 배가 물을 거스르며 올라왔다. 뱃머리의 가문 표식은 그리 눈에 띄진 않지만, 계씨 가문 배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만큼은 되었다.
배 2층에 젊은 공자 여남은 명이 서거나 앉아 있었고, 여염과 이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발을 구르며 웃고 있었다. 도지사 사사(使司) 고서강의 아들 고자의가 붓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여염의 웃음소리가 방해되자 붓으로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이제 막 영감이 오려고 하는데, 그 웃음소리에 사라져버렸지 않은가!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크게 웃는 건가?”
“글이나 열심히 쓰게. 듣고 나면 글 쓸 생각이 없어질 걸세.”
여염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저 두 사람, 영 칠야가 벌인 사건 이야기하면서 웃는 걸세.”
고자의와 함께 온 탕호우가 재빨리 설명해 주었다.
탕호우는 번루 탕가 장방 적손이자 탕가 젊은 대에서 가장 출중한 자제였다. 같은 산서 출신 고가와 사돈이었다.
“영감이 올 것 같았는데, 웃음소리에 다 사라졌잖아.”
고자의가 붓을 내던지고 여염을 잡아끌었다.
“이야기해 보게. 그 칠야가 또 무슨 재미있는 짓을 했길래? 그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게 제일 재미있긴 하지. 다른 사람이랑 다르거든. 이번엔 누가 재수 없게 당했는가?”
“어이! 여러분!”
간소한 차림을 한 계소영이 아래층 갑판에서 고개를 들고 모두를 향해 손짓했다.
“강단(江團: 종어. 메미목 동자개과의 물고기)을 잡았는가?”
난간과 가장 가깝게 선 예부 조 시랑의 막내 조명헌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강단은 무슨! 작은 물고기 한 마리 없네! 저 앞이 임강성일세. 임강성에 가서 점심 먹지 않겠나들, 어떤가?”
계소영이 올려다보며 물었다.
“책론 열 편 쓸 때까지 배에서 내리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한림원 손 학자의 장손 손방서가 상기시키자, 여염이 그를 툭 쳤다.
“밥 한 끼 먹고 오는 거니, 배에서 내린 건 아니지!”
“응? 배에서 내리지 않고 어찌 임강성에 간단 말인가?”
올곧은 성격인 손방서는 고루한 면이 있었다.
“작은 물고기도 못 잡았다는데, 임강성에 가지 않으면 쫄쫄 굶을 생각인가? 배를 곯고 어찌 글을 쓰나! 붓도 들 힘이 없거늘. 가세, 가. 임강성엔 산해진미가 있네. 무린어(無鱗魚: 장어, 미꾸라지, 은어 등 비늘 없는 물고기)도 있지. 일품이라네! 어서 가세! 배 불리 먹고 돌아오면 글도 잘 써질 걸세.”
임강성에 간다는 말에 고자의는 한껏 들떠서 적극 찬성했다. 며칠 동안 배에 있느라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신은 이런 공자들의 모습에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배에 오른 지 사흘째, 열심히 글공부하고 글을 짓자고 해놓고, 먹고 마시고 노는 시간이 더 길었다. 책론 열 편, 여염이 가장 많이 썼는데도 겨우 절반을 썼고, 이신은 단숨에 쓰기 그래서 여염을 따라서 그가 한 편 쓰면 자기도 한 편 썼다.
그런데 이제 임강성에 밥을 먹으러 간다니. 밥을 먹고 나면 또 여기저기 놀러 가자고 할 게 뻔하지 않나. 그러니 오늘의 글공부는 여기서 끝!
오늘 끝일뿐만 아니라, 오늘 신나게 놀고 나면 내일은 지쳐서 오전 내내 쉬어야 할 것이다.
배는 매우 빠르게 임강성 부두에 정박했다. 일행은 옷을 갈아입고 배에서 내려 걸어서 성으로 향했다. 어차피 부두에서 임강성까지 매우 가까웠다.
구불구불하지만 너른 자갈 바닥을 따라, 계단으로 올랐다가 평지로 내려갔다가, 다들 흥이 넘쳤다. 웃고 떠들면서 부두에서 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루를 알아보러 간 계가 관사가 잰걸음으로 달려와서 계소영에게 아뢰었다.
“대소야, 임강성에서 가장 좋은 주루 세 곳 모두 오늘은 객을 받지 않는답니다. 그게…… 경성에서 온 영 칠야가 예약했답니다.”
“누구? 영칠?”
고자의가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다.
“영 칠야가 이미 도착했나?”
계소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예. 완월루에 계십니다. 소인이 서둘러 돌아와 보고하느라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관사는 이마에 흘린 땀을 훔쳤다. 요즘 온 경성의 관사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심부름 갔다가 영 칠야와 겹치는 일이었다. 일단 겹치면 그 심부름은 끝난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 상전들도 영 칠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영 칠야와 겹쳤다고만 말하면 심부름시킨 일도 흐지부지되곤 했다.
“혼자서 주루를 그렇게 많이 차지해? 한 번에 세 집이라니. 정말 황당하군!”
손방서가 눈살을 찌푸리자, 조명헌이 괜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쿡쿡 찔렀다. 영칠은 마주치면 피하는 게 상책인 사람이라고!
“그냥 배로 돌아가세. 강단, 무린어 몇 마리 사 오라고 해서 우리 요리사에게 만들라고 하세. 그게 더 좋을 듯하네.”
탕호우가 조심스럽게 수습에 나서자, 계소영이 껄껄 웃으며 부채로 여염을 툭 쳤다.
“그러지 말고 가서 영칠에게 얻어먹자고. 주루를 세 곳이나 차지했으니, 요리사도 다 불러갔겠지. 한 자리에서 세 집 음식을 먹는다니, 귀한 기회 아닌가.”
여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영칠에게 얻어먹을 수밖에 없겠군. 자자, 가세!”
계소영과 여염이 결정짓자, 이신은 아무래도 좋았고, 계소영과 함께 온 계가 자제는 오로지 계소영을 따르니 상관없었다. 고자의는 흥분한 얼굴로 따랐다. 지난번에 영칠의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는데, 연회석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을 뒤늦게 듣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지난번 같은 규모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경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언제나 고자의의 안색만 살피는 탕호우는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은 고자의의 모습에 덩달아 기대했다.
조명헌과 손방서는 부친과 조부가 영칠과 충돌한 일이 있어서 조금 두려운 마음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계소영이 그런 두 사람을 앞으로 밀었다.
“얼른 가세. 깊게 생각할 것 없네. 영칠을 만나면 알겠지만, 멍청하긴 해도 의리 있는 사내라네. 안면 트고 벗이 되면 만사 어려울 것 하나 없어. 어서 가세!”
일행은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완월루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