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10화 (110/463)

110화: 장공주의 우정

“오라버니도 네가 날 찾아온 걸 아니?”

고 이낭이 오라비를 두려워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뼈에 배어 있었다.

옥묵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낭자가 이 댁으로 들어온 후로 대야, 그리고 노야도 거의 돌아오지 않으세요. 돌아와도 늘 취해서 오시고요. 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대야는 예전보다 더 거들떠보지 않으세요. 낭자, 저도…… 대야가 거들떠보지 않아서 이렇게 낭자를 찾아온 거예요. 낭자.”

옥묵은 애걸복걸했다. 낭자가 받아주지 않으면 이 길로 나가서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따라 들어와. 옥묵이라고 하지 말고 앞으로 묵란이라고 부르자.”

고 이낭은 또 몇 바퀴나 서성이다가 이를 질끈 악물고 결국 옥묵을 받아주기로 결정 내렸다.

청서가 아이를 가졌으니까. 큰일이잖아!

모든 일은 영원이 예상한 것보다 빨리 준비되었고, 임강에도 며칠 일찍 가게 되었다. 아직 어슴푸레한 시각, 영원, 주 육소야, 묵칠, 묵칠이 가니 당연히 소자람도 있었고 그 밖에도 주 육소야와 묵칠이 마음에 들어 하는 몇몇 가문의 자제까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사냥복 차림으로 길고 긴 시종 무리를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임강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성안에 있을 때, 영원이 말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시합만 하는 건 재미없으니 내기를 걸자고 했다. 달리다가 길가의 노점과 부딪치면 말에서 내려서 직접 물건을 다시 정리해주고, 혹시 망가뜨리면, 먹을 것이면 한 입 먹고, 입을 것이면 입고, 다른 건 몽땅 짊어지기로 했다.

주육과 묵칠 모두 좋다고 고함쳤다.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남이 걸리면 비웃을 생각뿐, 자기가 걸리면 어찌 될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시각 경성의 노점은 이제 막 물건을 내놓기 시작했고, 온 거리엔 짐을 지고 잰걸음으로 시장으로 달려가는 짐꾼, 노점상이 가득했다. 가벼운 차림이라면 쉽게 말을 피하겠지만,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은 허둥지둥 피하다 보면 짊어진 짐이 쏟아지기에 십상이었다. 행인의 짐이 쏟아지면 모두 그들이 부딪힌 것으로 치기로 했다.

기마 실력이 떨어지는 주육과 묵칠은 거의 달리지 못하고, 영원이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 걸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원의 말은 그야말로 행인의 머리 위로 나르듯이 달려갔고, 주육은 바짝 엎드릴 정도로 감탄하며 고함쳐댔다.

“저것 좀 보라고! 우리 영원 형님 좀 보라고! 멋진 모습 좀 보라고!”

주육은 제가 영원이라도 된 마냥 흥분해 있었다.

어렵게 성 밖으로 나온 묵칠 일행은 성문을 빠져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영원이 울창한 나무 그늘에 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비단 의자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앞에 새하얀 수화(繡花) 탁자보가 깔린 검은 칠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차가운 그릇에 담긴 청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운수는 곁에 서서 창을 하고, 아라는 영원 뒤에 서서 양손으로 거대한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소자람은 저도 모르게 길게 탄식했다. 자기들은 성에서 빠져나오느라 땀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는데, 저렇게 즐기고 있는 걸 보니 정말 확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주 육소야가 꽥 고함치며 영원을 향해 달려갔다.

“어서, 어서. 이런 의자를 가지고 오너라. 영원 형님, 나온 지 얼마나 됐소? 다음에 말 타는 걸 좀 가르쳐주지?”

영원은 주 육소야가 다가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가지고 오긴 뭘 가지고 와. 때가 어느 땐데. 얼른 가자. 임강에서 점심 먹기로 한 것 아닌가?”

묵칠은 순종적인 모습으로 부채를 부치고 있는 아라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교만하던 아라가 맞나?

묵칠의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아라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힐끔 바라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부채를 위봉낭에게 넘기고는 운수와 함께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마차에 올랐다.

묵칠 일행이 각자 찬 음료를 마신 다음, 영원이 세견을 풀었다. 개는 짖고, 말은 투레질하고, 사람은 고함치며, 가는 내내 시끌벅적하게 임강성으로 달려갔다.

보림암에서 자등 산장으로 돌아온 이동은 식사를 마친 후 회랑에 앉아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서서 문 이야를 만나러 전원으로 향했다.

이신은 여 공자 일행과 함께 강가에 문회 겸 피서를 가서 요 며칠 집에 없었다. 오라버니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침 고민하던 참이었다.

문 이야는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정자에 다리를 꼬고 반쯤 드러누워서 책을 쥐고 읽는 듯 마는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동이 시녀 몇을 거느리고 들어오자, 문 이야는 재빨리 일어서서 위아래로 이동을 살폈다.

이가 세 사람 모두 단순한 이가 하나도 없군.

“이야!”

이동이 계단에 선 채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낭자, 볼일이 있으십니까?”

“예.”

문 이야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동도 매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문 이야가 여인 앞에선 거북해하고,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걸 똑똑히 기억하는 이동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자 입구에 서 있었다.

“오늘 장공주를 뵀는데, 오라버니가 지은 문장 몇 편을 보여달라고 하시더군요.”

문 이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낭자,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지요.”

“예.”

이동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서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문 이야를 바라봤다.

“보여달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겠지요.”

문 이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힘껏 이마를 문질렀다.

“낭자, 외람된 말을 묻겠습니다. 장공주가 낭자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벗으로요.”

이동은 잠시 주저했다. 사실은 장공주가 너무 외로워서 자기를 좋은 대화 상대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문 이야의 표정이 조금 매서워졌다.

“낭자의 앞날을 계획해줄 생각이시랍니까?”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문 이야를 바라봤다. 그걸 몰라서 문 이야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낭자에게 도움 될 일이라면, 당연히 대야가 급제하는 게 제일 좋겠지요. 글을 보겠다고 하시다니, 내년 춘시의 시험관이 정해졌답니까? 이렇게 빨리요? 어떻게 아셨답니까? 궁? 조정? 누구로 정해졌답니까?”

문 이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안을 서성거렸다. 생각할 일이 있으면 서성거리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이동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문 이야는 이마를 두드리면서 빙글빙글 서성거렸다. 그렇게 한참 돌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궁이라…….”

문 이야는 이동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공주라…… 낭자의 생각은요?”

이동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장공주도 힘들게 지내요. 출가하겠다고도 벌써 여러 번 말을 꺼냈어요. 이유는 몰라도, 혼인하고 싶지 않대요. 진퇴양난이라 매우 어려워요. 내 일로 장공주께 골치를 안겨주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문 이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출가는 못할 겁니다. 장공주는 신분이 남다릅니다. 선황이 황상에게 황위를 물려준 건, 바로 장공주를 잘 돌봐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일은 조정 대신은 물론이고 백성들, 적어도 경성 백성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장공주가 출가하면, 황상이 선황의 유지를 거역한 것이 되지요. 비록, 이런 상황에 눈치 없이 그 일을 거론할 사람도 없겠지만, 황상은 그런 명성을 짊어질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로 출가는 못 합니다.”

“맞아요. 장공주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미뤄진 거고요.”

“장공주의 수행은 어떻습니까? 불법은 잘 배웠던가요?”

문 이야의 물음에 이동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고 침묵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매일 찾아가는데, 같이 차를 마시고 한담을 나누는 것 말고는 수행이나 불법엔 별 관심 없는 듯했어요.”

문 이야가 난간을 탁 내리쳤다.

“역시! 역시 그랬군! 내 짐작이 맞았어! 역시 그랬어! 휴!”

문 이야는 벌떡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일어서서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아서 이동을 바라봤다.

“낭자, 제 생각을 이야기할 테니, 듣고 어떻게 할지는 낭자가 알아서 하세요.”

“알았어요.”

이동은 잘 듣겠다는 태도를 보이려는 듯 자세를 단정히 했다.

“아는 것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관료 사회는 잘 알아도 궁 안의 일은 거의 모릅니다. 장공주가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진 선황께서 몸소 기거를 보살피셨습니다. 선황이 조회에 나갈 때 장공주를 안고 문무백관의 절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장공주의 선생은 한림원 박사 같은 서생뿐만 아니라 그 당시 승상인 계 승상, 여 승상 같은 조정 대신도 있었지요. 장공주가 여덟 살까지 배운 건 모두 사내의 학문, 심지어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 있었습니다.”

문 이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 지었다.

“선황도 참, 일개 여인인 공주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다니. 그런 걸 가르치고 그런 식으로 지도했으니, 장공주에겐 해로운 일이 되었지요. 아무래도 여인 아닙니까. 아이고!”

이동은 침묵했다. 맞는 말이었다. 장공주와 이야기하다 보면 사내와 고금을 논하고 천하를 논하는 느낌이었다.

“장공주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선황이 세상을 떠나셨지요. 때가 참…… 안 좋았지요. 조금 더 일찍이었다면 장공주가 어려서 성품이 정해지지 않아 바로 잡기 쉬웠을 겁니다. 조금 더 늦었다면 장공주가 큰 인물이 되어서……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뭐, 어찌할 도리 없는 일이지요.

하필 장공주가 여덟 살 되던 해는 이도 저도 아닌 때였습니다. 성품은 이미 형성되었는데, 힘은 전혀 없던 때였지요.

선황이 그렇게 떠나고, 주 태후가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첫 번째로 장공주를 바로잡고 교양을 가르쳤습니다. 조정에서도 다 아는 일이었지요. 사실 옳은 일이었습니다. 주 태후께서 잘한 일입니다. 다만 장공주는, 여덟 살짜리 아이라서 성격이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진 데다가 가장 자기를 아끼던 부친을 잃은 때였습니다. 하필 부모에게 반항하는 마음이 자랄 때였지요. 아이고! 그때 궁에서 무슨 난리가 났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공주가 지금 혼인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현모양처가 되라는데, 본인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뭘 어쩔 수 있겠냐고요. 허허.”

문 이야는 서글픈 듯이 헛웃음 지었다.

“남을 벌 주자고 자기가 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다니. 아이고! 가련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장공주가 긴 세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걸 보면, 부러질망정 숙이지 않는 성격으로 고집이 보통이 아닌 겝니다. 이런 성격은…….”

문 이야는 별안간 말을 멈추고 눈을 조금씩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갑자기 물었다.

“장공주가 예전 일을 말하던가요? 궁의 일 말입니다.”

“거의 하지 않았어요. 가끔 한두 마디씩 한탄하듯 말하는 것 말고는요.”

“그럼 장공주가 영 황후 소생 오황자를 보호해줘서 무사히 태어났다는 걸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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