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청서의 회임
“대체 일을 어찌 하는 것이냐? 장 서른 대를 쳐서 쫓아내라!”
청서가 다급하게 강환장의 손을 잡았다.
“왕 어멈 탓이 아니에요. 고 언니, 안 그래요? 왕 어멈 탓이 아니잖아요. 세자야,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지금 고 언니가 규칙을 세웠는데, 후야, 부인, 세자야, 두 낭자 말고는…….”
“청서, 몸도 안 좋은데 이런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말아. 세자야, 늦었어요. 얼른 나가 보셔야지요. 이러다가 늦겠어요. 청서는 제가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으면 제일 좋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진왕부로 사람을 보내서 알릴게요.”
고 이낭은 허둥지둥 청서의 말을 자르고 어서 강환장을 청서의 거처에서 끌고 나가려고 했다. 어서 저택 밖으로 내보내야 해!
“세자야, 아니면 저 며칠만 집에 다녀 올게요. 비린내 때문에 도저히 못 버티겠어요. 며칠 집에 갔다가 나으면 다시 돌아올게요.”
청서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강환장의 손을 꼭 붙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강환장이 미간을 단단히 찌푸린 채 고 이낭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랄 게 뭐가 있어요. 올해 기름 냄새가 조금 진한 것뿐이에요. 청서가 비위가 약해서 못 견디는 거예요.”
“언니 탓이 아니에요.”
청서는 내심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진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도 다 이 집안과 세자야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언니는 지금도 절 몹시 돌봐 주세요. 사흘에 고기 한 끼는 챙겨줘요. 채소에 기름도 뿌려주고요. 춘연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동유랑 하섬은 벌써 이레째 절임 채소만 먹고 있대요.”
강환장은 안색이 변해서 고 이낭을 빤히 봤다.
“청서 말이 다 사실이냐?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도 알다시피 채소와 두부가 몸에 제일 좋잖아요. 지난달에 남북 화행에 7백 냥을 결제했더니 장부가 텅텅 비었어요. 이모님 생신연까지 열라고 하시니 절약해야지 어째요. 게다가 올해는 닭, 생선도 지나칠 정도로 비싸요.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다들 담백하게 먹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몸에도 좋고, 은자도 아낄 수 있잖아요.”
고 이낭은 조금 어수선하게 대답했다. 저택엔 확실히 돈이 없었다. 오라버니가 그녀에게 넘긴 점포, 장원에서 매일 수익이 나서 매일 은자를 가지고 올 줄 알았다. 설사 매일이 아니라고 해도 달에 한 번은 은자가 손에 들어올 줄 알았다. 녹봉처럼 말이다.
그런데 웬걸. 달마다 돈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장궤가 장부를 잔뜩 싸 들고 들어왔다. 유용하는 자금부터 정기 자금에서 물건을 사느라 선급한 자금까지 설명해 주는데, 뒤로 갈수록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딱 한마디만 알아들었다.
돈은 1년에 한 번씩 연말에 지급하는데 결산해 보면 돈을 벌기는커녕 한 푼도 못 벌어서 오히려 동가의 자금을 넣는 일도 흔하다는 이야기였다.
장원은 해마다 적든 많든 수익이 나긴 하는데, 마찬가지로 1년에 한 번씩 정산하는 데다가 지금은 농작물이 다 땅속에 있어서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그녀도 이해했다. 농작물은 원래 해마다 한 번씩 나오는 거니까.
이틀 동안 바쁘게 움직인 끝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점포와 장원, 모두 지금은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고 은자는 한 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점포와 장원에서 들어오는 돈이 없으니 저택에서 쓸 돈은 모두 이모부, 이모, 그리고 오라버니 세 사람의 녹봉뿐이었다. 그런데 녹봉이라곤 눈곱만큼밖에 되지 않는데 뭘 어쩌라고. 새언니의 혼수로 돈을 구해올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새언니의 혼수를 팔았다가, 이가에서 난리를 부리면 단순히 끝나지 않는다.
곳간에 쌓인 이미 짓밟힌 금 장신구는 가지고 나가면 돈이 되겠지만, 오 어멈의 말대로라면 곳간 열쇠는 이모 손에 있었다. 지금 그녀는 이모에게 열쇠를 달라고 할 용기가 아직 나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이런데 뭘 어쩔 방법이 있을까. 근검절약하고 또 근검절약하는 것 말고 무슨 방법이 더 있을까.
강환장은 멍한 눈빛으로 고 이낭을 바라봤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듯한 그 눈빛에 고 이낭은 두려움이 피어났다. 막 변명하려고 하는데, 강환장이 무기력하게 손을 저었다.
“이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무리 그래도 종복들의 음식을 각박하게 군 선례는 없다.”
강환장의 말이 뚝 끊어졌다. 수녕왕부의 의식주는 언제나 경성의 모범이었다. 다른 가문의 일상생활을 이야기할 때, ‘수녕왕부 사람이 와도 흠잡을 것 없다.’고 말하는 걸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수녕왕부의 일상 요리는 황상조차도 비결을 알려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과거로 금세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갈수록 멀어지고 갈수록 엉망이 되는 듯했다.
“오라버니, 난 그게 아니라…….”
강환장이 눈빛이 멍해지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하자 고 이낭은 두려워져서 또 변명하려 했다.
강환장은 염증이 난 표정이었다.
“널 탓하는 게 아니다. 의원은 왔는지 알아보아라. 음식에선 각박하게 굴지 말아라. 적어도 예전에 한 대로 그대로 따라라.”
“나도 알아요. 내가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고 이낭의 조마조마해 보이는 얼굴에 강환장은 더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변명을 잘랐다.
“의원이 왔는지 가보고 오너라.”
청서는 강환장의 안색을 빤히 지켜보면서 속으로 살짝 안도했다.
됐다. 드디어 틈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다. 흥!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청서는 겁에 질린 고 이낭의 모습을 뿌듯해진 얼굴로 흘겨봤다.
어멈을 따라서 들어온 황 의원은 청서의 왼손을 진맥하고는 또 오른손을 붙잡고 한참 짚었다. 그렇게 눈살을 찌푸린 채 고민하다가 다시 짚어 본 후에야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세자, 이낭의 맥 상태가, 소생 생각으로는…… 회임한 것 같습니다. 맥이 그렇습니다. 다만 소생은 이쪽으로 정통하지 않았으니, 이 방면에 정통한 의원을 불러 확인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청서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서 강환장을 대뜸 붙잡았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먼저 회임했고, 혹시 아들을 낳으면 서장자가 태어나는 것인데!
세자야는 대내내와 정은 없고 앙금만 있으니, 이 서장자는 장자, 강자의 장자가 되는 거야. 수녕백부의 장자! 미래의 세자!
고 이낭은 청천벽력을 맞은 기분이 되어 아직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청서의 배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당장 뛰어올라 저 배를 잘근잘근 짓밟아서 큰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었다.
“상 의원을 모셔오너라.”
강환장은 그다지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청서의 첫 아이는 딸이었고, 다음 아이도 딸이었다. 청서는 평생 딸만 낳았다. 하나같이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지만, 어쨌든 딸이었다.
“황 의원이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상 의원을 모셔야 할까요. 상 의원도 진료비가 싼 편이 아니에요. 어차피 정말 회임했다면 배가 불러올 거예요. 상 의원이 오든 말든…….”
고 이낭은 아직 시기 질투에 빠져 있었다. 상 의원을 부르라니, 이 천것을 위해 염라대왕을 모셔오고 싶건만!
진료비가 싼 편이 아니라는 말을 황 의원 앞에서 하다니!
고 이낭의 그 말은 강환장의 얼굴에 먹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환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분노가 치밀었다.
“하라면 해라! 회임이 작은 일이냐?”
고 이낭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고, 눈치 빠른 황 의원은 재빨리 공수하며 인사했다.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상 의원을 불러오라고 사람을 보낸 고 이낭은 회랑에 서서 눈물을 훔쳤다.
정말 내 팔자가 너무 사납구나!
다행히 순조롭게 상 의원을 모셔왔고, 상 의원은 잠시 진맥한 후에 싱글벙글 웃으며 강환장을 향해 축하 인사를 했다.
“세자, 축하드립니다. 자손이 늘어나게 됐습니다. 큰 기쁨을 맞이하셨군요.”
청서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고 이낭의 얼굴은 시퍼렇게 떴다. 강환장은 상 의원에게 감사 인사한 후 맥은 괜찮은지 물었다.
“매우 잘 뛰고 있습니다. 이낭의 몸이 건강해서 분명 순조롭게 태어날 겁니다. 약도 먹을 필요 없습니다. 약이 과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음식을 신경 쓰는 게 무엇보다 좋습니다.”
“알겠네. 고맙네, 상 의원. 한 달 뒤에도 다시 와서 진맥해 주게.”
강환장은 상 의원을 배웅하며 밖으로 나갔다.
고 이낭은 청서의 배를 죽어라 노려봤다. 얼마나 흉악한지, 청서는 무심결에 양손으로 배를 감싸고는 전혀 기죽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날 괴롭히려고? 꿈도 크지!”
강환장은 청서 거처에서 곧바로 출타했고, 자기 거처로 돌아온 고 이낭은 뼈가 뽑힌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침상에 엎드려서 목 놓아 울었다.
제 팔자가 너무나 사나웠다.
“이낭, 이낭!”
후측문을 지키는 손 어멈이 문 앞에 서서 휘장을 사이에 두고 갈수록 목소리 높여 고 이낭을 불렀다.
“꺼져!”
고 이낭도 드디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고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낭, 저예요. 후측문 손가요. 이낭, 말씀드릴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손 어멈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고 이낭의 꺼지라는 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중요한 일이라지! 그래, 하나같이 중요한 일이다! 됐지?”
고 이낭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눈물로 흠뻑 젖은 손수건을 창 쪽으로 던졌다. 손 어멈은 여전히 실실 웃었다.
“이낭, 옥묵이 왔어요. 이낭을 만나러 왔대요.”
고 이낭이 단숨에 일어났다.
“옥묵? 어디에 있어? 어때 보여?”
“후측문 문간에 있어요. 어때 보이냐고요?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들어오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낭이 가시겠어요?”
손 어멈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들어오라고…… 아니, 내가 갈게!”
그 짧은 말을 하는 동안 고 이낭의 마음이 변하고 또 변했다.
사람을 보내 옥묵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봤을 때, 그녀가 수녕백부로 들어오던 날 제 오라비가 옥묵을 통방으로 들였다는 걸 들었다. 오라비의 통방이 되었으면 이제 오라버니 사람이 된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찾아왔을까? 들이면 안 돼. 내가 나가 보자. 무슨 일인지 확인부터 하는 거야.
고 이낭은 영란을 불러서 서둘러 단장하고 손 어멈을 따라 허둥지둥 후측문으로 달려갔다.
후측문 문간에 있는 옥묵의 행색은 꽤 깔끔했는데 몰라볼 정도로 말라 있었다. 옥묵은 고 이낭을 보자마자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목이 멘 듯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넨 나가 보게!”
“예.”
고 이낭이 분부하자 손 어멈은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서 나갔다. 문을 닫긴 했는데 꽉 닫진 않고 숨을 죽인 채 문틈으로 안을 엿봤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라버니가…… 널 통방으로 들였다며? 왜 이렇게 말랐어? 오라버니는 여인한테 다정한 사람인데. 널 괴롭히진 않았을 것 아니야.”
고 이낭의 물음이 줄줄이 이어졌다. 옥묵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싫다고 했어요. 전 그저 대야의 거처에서 수발만 들고, 통, 통방이 되진……. 대야는 잘해주세요. 그냥 제가…… 아팠는데 이제 막 나았어요. 낭자, 저는 아직도 예전의 옥묵이에요. 여전히…… 옛날이랑 똑같아요.”
고 이낭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손수건을 비틀며 비좁은 문간방 안을 서성거렸다.
옥묵이라……. 청서가 아이를 가졌는데, 영란은 목석같은 아이라 쓸모가 하나도 없어. 곁에 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청서는 아이를 가졌고.
사람이 필요한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