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우중 한담 二
눈이 즐겁다라……. 이동은 순간 해괴한 느낌이 들어서 뜬금없이 웃고 싶어졌다가 왠지 슬퍼지기도 했다. 장공주가 영가 다섯 대 가주의 초상을 한 줄로 늘어놓고 감상했을 땐, 선황이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겠지.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웃듯이 입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영가는 줄곤 북삼로에 주둔하며 지켰어. 그런데 할아버님 대가 된 후로는, 할아버님이 그러셨는지, 아니면 조정 사람들이 그랬는지 영가에서 반역할까 봐 경계하기 시작했지.”
복안 장공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살짝 서늘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 대장군이 나타난 거지. 성지를 들고 영씨 일가를 억압하고, 북방 군대를 통솔했지. 그 당시에 북부엔 해마다 큰 전쟁이 있었고, 번번이 고전이었지. 초원 깊은 곳에서 북삼로 중앙까지, 겹겹이 쌓인 시신이 문드러졌어. 흙이 다 시커멓게 변했지. 휴.”
장공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즉위했을 땐 이미 10년 넘게 이어졌지만 인구가 늘긴커녕 오히려 줄었지. 태평성대에 인구가 늘지 않다니! 그 당시엔 재난이 생겨도 조정까지 보고가 들어오지도 않았어. 아버지가 즉위할 때, 호부엔 등극 대전을 준비할 은자도 없었고. 아버지는 성격이 거친데 그땐 또 젊을 때라, 다음 해에 곧바로 원청강을 불러들였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적당한 핑계로 죽여 버렸지. 사실…….”
이동은 매우 놀라며 들었고, 복안 장공주는 유유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나중에 원청강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고 몇 번이고 내게 말씀하셨어. 10여 년 동안 벌어진 살육은 원청강 탓이 아니라고. 조정에서 휘두른 칼이었을 뿐이었다고. 조정에서 영가를 의심했고, 그 체계를 고치고 사람을 모으려면 그런 칼이 필요했지. 원청강이 그 칼이 되지 않아도 그럴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어. 조 대장군, 전 대장군, 손 대장군……. 도살할 칼을 휘두를 장군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복안 장공주는 한참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등극한 후, 원청강을 불러들이고 북삼로는 여전히 영가 손에 맡겼지. 아버지가 재위할 땐 영가를 유난히 아끼셨어. 한때 셋째 오라버니를 북삼로 군중에 보냈지. 선대 정북후 옆에 거의 1년 있으면서 군무를 배웠고.”
이동의 가슴이 철렁했다. 셋째 오라버니? 태자가 될 뻔했던 삼황자? 북삼로 군대에 1년 가까이 보냈었다니. 소문이 다 사실이었나? 선황이 한때 삼황자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었어!
“영진산이 오라버니와 뜻이 맞았대. 사이도 좋았고. 오라버니가 매우 아끼는 활이 있는데, 영진산이 준 거라고 하더라고. 나중에 어머니가 황상을 위해 영 황후를 들였지.”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잠시 후, 희미하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앞서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주 태후가 영 황후를 궁으로 들인 건 복수일까? 포섭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정북후부 계파의 영가 철기병은 영중해의 부친 손에 정식으로 세워진 거야. 영중해의 두 숙부가 한때 안가를 크게 일으켜서 안가가 북부 굴지의 가문이 되었어. 바로 거기부터 시작한 거야. 막내 숙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단순하지 않을 거야. 셋 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복안 장공주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영중해는 아들 둘, 딸 셋이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 매우 뛰어난 인재였어. 장자 영중의도 아들이 둘, 장자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명성이 혁혁했지. 그런데 운이 안 좋아서 혼인하기도 전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어. 막내 영정도 일대 명장이었고. 영정이 영진산, 영진강, 영진천 세 아들을 낳았어. 영진천은 신동으로 유명했는데 혼인하기 전에 병에 걸려 그대로 죽었어. 영진강, 영진산 모두 이 나라의 명장이지. 영원의 두 형, 영위, 영무 모두 소년 신예로 장차 명장이 될 재목이고. 영가 직계는 지금까지 모두가 절세 영웅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쓰레기는 나오지 않았어.”
복안 장공주는 벌떡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서성거렸다.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에 이동은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장공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서 있다가 흐트러진 걸음으로 의자 쪽으로 돌아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찻잔을 들어 올려 고개를 젖히고 남은 차를 비운 다음 찻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걸!”
“장공주의 말씀대로, 영가가 그런 가문이라면 영 황후도 그리 떨어지는 인물은 아니겠죠. 그분……도 영 황후가 가르쳤으니 어쩌면 그럴 거고요. 어느 분이 되든, 장공주의 적친 조카 아닌가요.”
이동은 주저하다 결국 결심하고 설득했다. 미래의 결과를 알지만, 지금 이 순간, 이번 생의 미래는 예전과 다르길 바라는 강렬한 기대가 피어났다. 적어도 장공주가 지금처럼 지낼 수 있길 바랐다. 이런 작은 마당에서 차를 마시며 비를 감상하고,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네가 너무 멀리 생각했어. 경성에 머리통이 나뒹굴고 피바다가 흐르지 않으면…….”
복안 장공주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들고 보슬비를 바라봤다.
“주씨가 가장 통한하는 게 바로 황후 두 글자야. 주씨의 원한은 황상의 원한이고. 하! 잘 들어. 무지렁이의 저력을 얕잡아 보면 절대로 안 돼. 특히 무지렁이가 한 무리 있을 때는. 됐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요 며칠 난 줄곧 머리카락을 밀 생각뿐이야. 언젠간 밀어야 할 텐데, 차라리 일찍 밀어버리는 게 낫지. 번뇌사를 털어 버리고 다 끝내는 거야.”
“장공주 말씀대로라면, 머리를 밀어도 청정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장공주…….”
가차 없이 대답하던 이동은 다음 말을 주저하며 삼켰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겨봤다.
“어째서 황상을 설득해 보지 않으세요?”
이동은 결국 입가에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설득? 어떻게? 우리 황상은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뿐인 사람이야. 어떻게 설득하란 말이야?”
장공주가 꼰 다리를 흔들면서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에 이동은 차를 내뿜을 뻔했다.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니, 어쩌면 감히 그런 생각을.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라면, 적어도 지금까지 해 온 일은 모두 정확하고 틀린 곳이 한 치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설득할 길이 없을 수밖에.
이동은 호기심이 생겼다.
“선황도 그러셨어요?”
“선황이 바보도 아니고.”
복안 장공주는 가차 없이 대답하고는 무엄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 오히려 웃었다. 이동도 참지 못하고 웃었다.
두 사람 모두 한참 웃다가, 장공주가 이동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린 계집인데…… 분명 아직 어린 계집애인데, 그런데 널 꼬맹이라고 부르자니 내가 다 어색하지?”
“장공주께서 저보다 겨우 몇 살 많을 뿐이니까요. 제가 꼬맹이는 아니죠.”
장공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이동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넌 어릴 때부터 그랬니? 애어른 같아서 얄미웠어?”
“아니에요.”
이동은 아주 오래전 소녀 시절을 열심히 떠올렸다. 하지만 사소한 일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예전엔…… 혼인하기 전에요. 그때는 어머니는 언제나 제가 참을성이 없다고 걱정하셨어요. 지나치게 발랄하고 만날 헤헤 웃기만 한다고요.”
“정말?”
복안 장공주의 눈썹이 또 치켜 올라갔다. 이번엔 너무 의외라서였다.
“혼인했다고, 다른 사람처럼 환골탈태해? 지금 네 모습은…… 가끔은 난 네가 나보다 더 나이가 많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혼인하면, 아니, 혼인하면이 아니라, 상대를 잘못 만나면 이렇게 환골탈태하니? 보아하니 넌 혜근(慧根: 천부적인 능력, 소질)이 있었나 보구나.”
“과찬이세요.”
“칭찬이 아니야. 어린 나이에 애어른처럼 노티 난다는 말이 무슨 칭찬이니? 그래서, 어쩔 계획이야?”
“아직은 없어요. 오라버니는 일단 내년 춘시에 집중해야 하고요. 게다가 아까 장공주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경성 곳곳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어요.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게 좋아요. 어차피 제 병은 쉽게 나을 병이 아닌걸요.”
계획할 계획이 없는데 계획이랄 게 뭐가 있을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
장공주는 한참 만에 느릿느릿 대답했다.
경성, 수녕백부.
고 이낭이 온갖 궁리를 다 해서 꾀를 내었는데도 이동은 돌아오지 않았고, 진 부인의 생신 연회를 연다는 강환장의 생각을 바꾸지도 못했다.
고 이낭이 다시 밤새 공들인 끝에, 은자 천 냥과 도와줄 사람으로 청서를 보내줄 것, 두 가지 허락을 강환장에게서 얻어냈다.
고 이낭은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은자 천 냥이 있으면 일이 수월해진다. 정 안 되면 다 밖에서 사 오면 되고, 당일에 쓸 사람도 거간꾼을 통해서 임시로 부르면 된다. 청서가 있으면……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대신 나서서 감당할 사람이 드디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강환장이 아침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청서 거처의 시녀가 재빠르게 달려와 고했다.
“청서 이낭이 새벽에 몇 번이나 토하더니 이젠 일어나지도 못하세요. 고 이낭, 얼른 의원을 불러주세요. 청서 이낭이 지금 너무 아프시대요!”
“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병이 난 것이냐? 어서 가보자꾸나.”
강환장이 고 이낭에게 분부하면서 화다닥 화항에서 내려왔다.
강환장의 마음속에 청서는 고 이낭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도 평생 곁에 있던 사람이라 그녀에 대한 정과 의리 모두 깊었다.
청서는 등 뒤에 받침을 잔뜩 대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안색은 그래도 괜찮아 보였다.
강환장이 성큼성큼 다가가 몸을 틀고 마주 앉아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미 의원을 부르러 보냈다. 걱정하지 말아라. 왜 갑자기 편치 않은 것이냐? 더위를 먹은 거냐? 더위 타는 아이가, 방 안이 왜 이리 더워? 밤에 얼음을 가져다 두지 않고?”
“고 언니가 형편이 쪼들린다고 해서…….”
“쪼들리는 게 아니라 아직 얼음을 쓸 때가 되지 않았어요. 우리 같은 가문은 만사 법도를 지켜야 해요. 화로를 피우기 시작하는 날이 있듯이, 얼음도 절기를 보고 쓰는 거예요. 아직 그럴 절기가 되지 않았어요.”
고 이낭이 강환장 뒤에 서서 다급하게 청서의 말을 잘랐다.
청서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듯이 대답했다.
“더위 때문이 아니에요. 세자야도 아시다시피, 전 원래 차분하잖아요. 차분하니까 당연히 몸이 차요. 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어제 먹은 음식 중에 생 기름을 채소에 뿌린 게 있었어요. 비린내가 심했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조금 많이 먹었더니, 비린내가 입에 남아서 새벽엔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제 위가 약해서 그래요. 고 언니 탓이 아니에요.”
청서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에 세자야 곁에서 대시녀로 일할 때, 세자야가 집에 없으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얼음은 쓰지 못했다. 얼음 같은 건 상전만 쓰는 것이고, 오래된 관례라 왈가왈부해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큰 주방에서 자잘한 걸 따지고 매일 기름도 받아서 쓰는 것 등은, 수녕백부가 아무리 군색해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비린내? 큰 주방 담당이 누구냐? 그 왕 어멈인가 하는 어멈이냐?”
안 그래도 어제 고 이낭이 왕 어멈 이야기를 하면서 요리를 못해서 연회를 못하니 어쩌니 했다는 말에 그 이름을 기억했었다. 안 그래도 언짢았는데, 청서가 또 이야기하니 화가 치밀지 않은가.
왕 어멈, 정말 괘씸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