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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104화 (104/463)

104화: 다 당신을 위해서

영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난각 안에 있었다. 창틀에 다리를 치켜들고 과실주를 들고서 영벽 앞에 있는 아라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유월이 어둠 속에 공손하게 서서 나직이 보고 중이었다.

“……강이씨는 오늘 보림암에 갔습니다. 전 노부인과 묵 부인이 일각 먼저 당도하고, 백 노부인은 그다음에 도착했습니다. 백 노부인이 도착한 다음 강이씨는 보림암에서 나와 암자를 돌며 거닐었습니다. 매우 천천히 걷다가 사찰 대문을 통해서 암자에 다시 들어간 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오시 정각에 암자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자등 산장으로 돌아간 후에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월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영원을 바라봤다.

“강이씨가 보림암 밖에서 계소영을 만났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칠야의 분부대로 멀리서 바라보고 다가가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음, 계속해.”

“예. 오늘 진시 정각, 수녕백부에 강이씨의 배가 시녀 중에 추미라는 이낭이 자등 산장에 갔습니다. 강이씨를 설득해 모레 진 부인의 생신 연회를 맡게 하라고 고 이낭이 보냈다고 합니다.”

“고 이낭? 재미있군. 강환장은 알고?”

영원은 술잔을 흔들면서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아마도요……. 몰랐어도 알게 될 겁니다. 추미 이낭이 보는 사람마다 자등 산장에 간다고, 부인의 생신 연회 때문에 고 이낭이 대내내를 모셔오라고 했다고 말하고 다녔거든요.”

영원은 풉 하고 술을 뿜었다.

“괜찮다. 이야기를 계속해라. 강가, 참 재미있군.”

“강이씨가 오시 말에 자등 산장에 돌아갔고, 추미가 신시 말에 자등 산장에서 나왔습니다. 종복 넷, 어멈 둘이 추미를 수녕백부에서 한 거리 떨어진 곳에 내려주고 돌아갔습니다. 추미는 곧바로 수녕백부로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강이씨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이씨라고 불러라. 아무래도 강자를 붙이는 걸 바라지 않을 것 같구나.”

영원이 술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계소영을 지켜보고. 양 구야와 묵칠을 붙여 보아라. 보림암에 사람 몇 더 보내고. 난 그곳이 아무래도…….”

영원은 입을 다물었다. 보림암이 착수할 좋은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경성에 들어온 지 꽤 되었고, 서서히 자리 잡고 있긴 하나 앞으로 해야 할 큰일은 아직 요원하고 갈피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착수할 곳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법. 그가 하려는 큰일은 누님과 조카뿐만 아니라 온 영씨 일족을 연루할 일이라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만 했다.

영벽 앞 아라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영원이 삐딱하게 그녀를 바라봤고, 유월도 그의 시선을 따라 아라를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말했다.

“칠야, 여인을 난감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지.”

영원은 가차 없이 대답하고는 나른하게 하품했다.

“이제 되었다. 세 사람을 돌려보내라. 내일 다시 불러오고. 내일은 화청에서 촛대를 들고 있으라 해라.”

“예.”

유월이 입구로 가서 분부했다.

아라는 자기가 어떻게 연향루에 돌아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라가 비연루에서 위봉낭에게 끌려간 후, 다다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쪼르르 달려가 연향루 행수기녀에게 아라가 정북후부 위 나찰에게 끌려갔다고 말하자, 행수기녀는 상세히 묻고는 별말 없이 넘어갔다. 조금 불안하긴 해도 그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았다. 정북후부의 칠야가 성질이 거칠긴 해도 은자를 충분히 주니까. 사납다고 해도 사실 아라를 어떻게 한 건 아니라서 침착했다.

하지만 다다는 생각할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할수록 두려워져서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다.

정북후부의 마차가 연향루 앞에 멈추자, 행수기녀가 서둘러 두 어멈을 지휘해서 아라를 안고 내렸다. 위봉낭은 팔짱을 낀 채 마차에 기대서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너희 아라 소저에게 전해라. 첫째, 고분고분할 것. 둘째, 너무 무능하다. 얼마나 지났다고 힘이 풀리느냐. 쯧, 쓸모없긴!”

위봉낭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면서 사라졌다. 행수기녀는 한참 만에 아이고,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무슨 뜻이야? 힘이 풀려? 아이고! 우리 아라는 황화규녀인데, 아직 머리도 올리지 않았는데! 설마…….

아이고! 야단 났네! 이건 큰돈이다! 큰돈이야!

행수기녀의 물음에 아라는 목 놓아 울었다.

차라리 머리를 올리는 게 낫지! 적어도 사람 취급 못 받고 모욕당하는 것보다 낫잖아!

행수기녀는 한참 만에 드디어 머리를 올린 게 아님을 알아냈다. 그러나 대체 무얼 했는지 아무리 물어도 아라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무 창피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행수기녀는 아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다친 곳도 없고 상한 곳도 없고 모기에 잔뜩 물린 것 말고 다른 건 모두 정상이었다. 행수기녀는 저도 모르게 꿍얼거렸다.

정북후부처럼 돈을 물 쓰듯 쓰는 집안에 천붕을 치지 않는 곳도 있나? 영 칠야는 모기에 물리는 게 싫지 않은가?

행수기녀는 아라가 다다의 시중을 받고 목욕한 다음에 모기 물린 곳에 약을 바르는 걸 지켜보다가 흉이 지면 큰일이니 절대로 긁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라는 침상에 웅크린 채 누워서 밤새 악몽을 꾸었다.

연달아 이틀 촛대가 된 아라는 병이 나서 열이 펄펄 끓었다. 그녀가 몸져누웠다는 말을 듣고 위봉낭이 은자 백 냥과 인삼과 계피를 잔뜩 보내면서 ‘가장 좋은 의원을 불러서 가장 좋은 약을 쓰고 얼른 나아라.’라는 칠야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부러워하며 아라의 이마를 톡톡 쳤다.

“운이 참 좋구나. 마침 오늘 우리 칠야가 밖에서 식사하신단다. 병이 난 김에 하루 잘 쉬어라. 내일은 오늘처럼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 얼른 나아야 한다.”

아라는 끽소리도 못 내고 훌쩍훌쩍 숨이 넘어가라 울기만 했다.

자등 산장에 사람을 보낸 일을 매우 비밀스럽게 처리했다고 생각하던 고 이낭은 추미 그 어리석은 것이 모두에게 소문을 낸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날 저녁, 진왕부에서 돌아온 강환장은 중문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 이낭이 쭈뼛대며 강환장 앞에 서 있었다. 강환장은 이동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니 분노에 수치심까지 치밀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네 마음대로 하라더냐? 몇 번을 이야기했어? 왜……, 왜 이씨를 부른 것이냐?”

“오라버니, 다 오라버니를 위해서예요. 새언니는 강가 장방의 큰며느리잖아요. 오라버니는 외아들인데 이모님 생신에 새언니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일단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새언니가 없으면 이모님이 상심할까 봐 걱정이었어요. 또 하나, 그 많은 손님이 오는데 새언니가 저택에 없으면 어떡해요. 내가 응대하지 못할까 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건 하나도 걱정 안 돼요. 다 준비해뒀어요. 나는 사람들이 우리 일을 쑥덕댈까 봐 그래요. 그럼 오라버니의 체면은 어떡해요. 그리고 이모님도……. 나는 오라버니와 이모님을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고 이낭은 쭈뼛거리며 해명했고, 강환장은 마음이 약해져서 말투가 훨씬 누그러졌다.

“항상 나와 이 집안을 위해서 생각한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나와 먼저 상의한 다음에 해야지. 어떻게 멋대로 할 수가 있느냐.”

고 이낭은 강환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진 걸 듣고 마음이 놓였다.

“오라버니, 나도 상의하려고 했죠. 하지만 오라버니는 꺾일망정 굽힐 줄 모르는 고고한 사람이잖아요. 새언니가 잘못한 일인데 오라버니가 어떻게……. 휴.”

고 이낭이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난 그냥 이렇게 체면 깎이는 일은 내가 몰래 해버리려고 했어요. 일을 잘 처리해서 새언니가 돌아오면 좋잖아요. 오라버니 마음이 얼마나 약한데, 아무리 그래도 웃는 얼굴에 어떻게 침을 뱉겠어요. 그러면 다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생각했어요. 오라버니, 나는 자꾸 새언니가 나 때문에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오라버니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른다고 생각하면 난,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오라버니, 날 알잖아요. 난 오라버니만 잘되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없어요.”

고 이낭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강환장은 마음이 약해져서 화가 풀렸다.

“이리 와라. 내 말 들어라. 이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어찌 됐든…….”

잠시 말을 멈췄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고 해명할 길은 더더욱 없었다.

“이씨는 돌아오지 못한다. 강가에 다시 들이지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할 것 없다. 상관할 건 더 없고. 이건 네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냥 죽은 셈 쳐라. 넌 그저 이 집안을 잘 다스리고, 아들 몇 낳아서 잘 가르치면 된다. 이씨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

“오라버니!”

고 이낭은 가슴이 쿡쿡 쑤셨다.

이제 돌아오지 않아? 죽은 셈 치라고? 그럼 나는 언제까지 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하는데?

“어찌 됐든 오라버니의 정실 아내예요…….”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했지! 죽은 셈 쳐라! 이씨가 돌아오면, 너, 그리고 청서 모두 죽는다!”

강환장의 목소리가 매서워지자, 고 이낭은 기겁하고 부르르 떨면서 한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너한테 화낸 게 아니니 겁먹을 것 없다. 명심해라. 앞으로 이 집안은 네가 안주인이다. 너와 나는 앞으로 우리의 나날을 잘 보내면 된다. 안심해라. 우리 집안은…… 앞으로 나날이 좋아질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얻을 수 있다.”

강환장은 고 이낭이 겁에 질려 얼굴이 다 새파래진 걸 보고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달랬다.

“알겠어요.”

고 이낭은 눈을 깜빡이며 얼른 감정을 추슬렀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해야 할 중요한 말이 있었다.

“오라버니, 또 한 가지, 내 생각엔…….”

고 이낭은 손수건을 비틀며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모님이 몸이 줄곧 좋지 않고, 오라버니는 나날이 더 바빠지잖아요. 일손도 부족하고, 새로 온 종복들은 아직 가르치지 못했어요. 게다가 이모님 생신은 올해 정수(整壽: 열, 스물, 쉰 등 끝수가 없는 나이의 생일)도 아니잖아요. 이러면 어때요, 올해는 그냥 예년처럼 가족끼리 식사하면서 이모님 생신 축하해드려요. 이건 나 때문이 아니라…….”

강환장의 안색이 변하자, 고 이낭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다 이모님을 위해서예요. 줄곧 아프셨는데, 사람을 초대하고 연회를 열어 봐요. 아무리 내가 건사하는 거라 벌써 일일이 다 준비를 끝냈다고 해도 축하받으러 이모님이 나와야 하잖아요. 사람들이랑 교류하고 응대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이에요. 그리고 오라버니도 정신없이 바쁘잖아요. 난 오라버니와 이모님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어머니는 사실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 다만…….”

강환장은 말을 멈췄다. 다만 너무 형편이 곤란해서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성격이 태만하고 마음 쓸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네가 다 준비를 끝내서 어머니가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좋지 않으냐. 이런 떠들썩한 일을 제일 좋아하신다. 그리고 내 문제는, 그날은 하루 쉬겠다고 진작 왕야에게 말씀드렸다. 이번 생신은 정수가 아니지만, 그동안 어머니도 힘들게 보내셨다. 내가 혼인하여 집을 이뤘고, 네가 있는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다. 넌 그저 열심히 생신 연회를 잘하면 된다. 명심해라. 떠들썩하고 거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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