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01화 (101/463)

101화: 고 이낭의 호의 一

얇은 비단 장삼을 입은 영원의 이마엔 땀 한 방울도 없었다. 단정한 것이 아까 묵칠처럼 옆에서 구경만 한 모습으로 말을 몰고 다가와서는 위아래로 묵칠을 살폈다.

“어쩐 일이냐? 지나가던 길?”

영원의 시선에 묵칠은 순간 온몸이 거북해졌다.

“아니, 널 찾아왔다.”

“날? 좋지. 앉아라, 앉아. 차 마시자.”

영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막을 가리켰다.

묵칠은 영원의 뒤를 따라가서 말에서 내렸다. 천막의 위치가 매우 묘해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사람이 불어 매우 상쾌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데?”

영원은 털썩 의자에 앉으며 시원한 과즙을 받고는 묵칠을 바라보며 물었다. 묵칠은 체면 차리지 않고 영원 맞은편에 앉아서 단숨에 과즙 한 그릇을 비우더니 막상 이야기를 꺼낼 땐 웅얼거렸다.

“뭐…… 별일은 아니고.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럼 다행이군. 여봐라, 차 한잔하고 쉬자고 육소야를 모셔오너라.”

영원이 더 묻지 않고 종복을 바라보며 분부하자, 묵칠은 말문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찾아왔는데, 조금 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고? 이런 사람이 어디 있나! 정말 예법을 모르는 야만인이군!

“할 말이 있다!”

영원이 상대하지 않자, 묵칠은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지.”

영원이 발목을 다른 쪽 허벅지에 턱 걸쳤다.

“큰일은 아니고……. 아니, 큰일 맞다!”

영원이 들을 생각 없는 듯 다리를 다시 내려놓자, 묵칠이 다급해져서 애걸복걸했다.

“큰일이다! 아주 큰일이야!”

“그럼 말하란 말이다!”

영원은 ‘이렇게 시간 끌면 이 몸은 짜증이 난다!’ 하는 티를 팍팍 냈다.

“아라 일이다!”

묵칠은 자기보다 더 멍청해 보이는 인간 때문에 화가 나서 씩씩대다가 결국 대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가 누군데?”

영원의 물음에 묵칠은 목이 메어 켁 소리를 냈다.

“아라가 누군지도 몰라? 우리 경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아라다!”

“아!”

영원이 팔걸이를 철썩 내리쳤다.

“그래, 생각나는군. 그 아라가 어쨌기에? 말해라.”

“아라는!”

묵칠은 일단 숨을 가라앉혔다. 야만인하고 이야기하기 참으로 힘이 드는군!

“아라는 다른 기녀와 다르다. 네 생각엔…… 너 같은 놈한테 물어도 소용이 없지!”

묵칠은 별안간 깨달았다. 이런 야만인에게 어떻게 하면 아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묻는다는 건, 맹인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은 일이다!

“말이나 해보지. 어쩌면 도움이 될지 아냐.”

영원이 갑자기 태도가 좋아져서 다리를 내리고 흥미 가득한 얼굴로 묵칠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묵칠은 순간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휴, 그게…… 내가 아라를 꽤 좋아하는 거, 너도 알지?”

“내가 그럴 어찌 알아. 내게 이야기한 적도 없으면서.”

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제 알았으니 계속해 보아라.”

“그런데 아라는 나를 그다지 상대해주지 않더라. 그건 아라 잘못이 아니지. 아라는 원래 그런 성격이거든. 그런데 그날…… 네가 연회를 연 그날, 아라가 줄곧 내 곁에 있었거든. 그런데 또 그 후로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물어보러 왔지. 어떻게 하면…….”

묵칠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손가락만 비벼댔다.

“아라를 손에 넣느냐고?”

“손에 넣는 게 아니다! 왜 이렇게 거칠고 무례한 것이냐! 미인은 가냘프고 소중한 존재라서 공을 들이고…….”

묵칠은 말문이 막혀 손을 휘둘렀다. 영원 같은 인간 상대로는 온몸에 입이 달려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영원이 알았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알아들었다! 사람을 손에 넣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도 얻고 싶다는 거지? 그 뜻이지?”

“이 사람 참…….”

묵칠은 금세 말을 바꿨다.

“그래, 바로 그런 뜻이다.”

“그야 쉽지. 나한테 물은 건 참 잘한 일이다. 전문가에게 물은 것이다. 이런 일에서 이 몸이 둘째라면, 누가 첫째겠느냐.”

영원은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엄지를 세우고 저를 가리켰다.

“네 주제에?”

묵칠은 그다지 믿기지 않았다.

“북삼로에 사람을 보내 수소문해 보아라. 영 칠야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이 몸이 점찍은 미인이 있으면 손가락만 까닥해도 울며불며 기어 온다.”

묵칠은 영원을 흘겨봤다.

사실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믿기긴 했다. 눈앞에 있는 물건이 실로 너무나 잘생기긴 했으니까. 하지만!

“어이! 내가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네가 그러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 좀 보게.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의리를 최고로 꼽는 사람이다! 의리 없인 못 산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뜻을 이루게 해줘야지! 내가 그 무슨 라를 너하고 다툴 것 같으냐? 내가 미인이 없어서? 마음 푹 놓아라. 길어야 열흘, 열흘 안에 무슨 라가 울며불며 널 찾아가게 해주마. 네가 말한 대로 몸과 마음 다 함께 말이다. 마음 놓아라. 고작 이 정도로! 진작 이야기할 것이지!”

영원은 ‘이 정도가 무슨 문제라고, 쓸모없는 놈’이란 얼굴로 부채를 촤르륵 폈다. 묵칠이 영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열흘? 열흘이라고? 네가 한 말이다! 꼭 지켜라!”

“마음 놓아라. 소육, 여기 앉아라.”

잔뜩 들떠서 발그레한 얼굴로 들어오던 주 육소야는 자리에 앉은 후에야 묵칠도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해서탕(解暑湯: 갈증을 없애주는 음료)을 마시면서 묵칠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묵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먼저 돌아간다. 약속 지켜라!”

“걱정하지 말라니까. 참, 열흘 동안 무슨 라를 찾아가지 말아라. 찾아오라고 사람을 세 번 보낼 때 그때 찾아가라.”

영원이 묵칠을 향해 손을 저으며 한마디 더 당부했다.

“아라가 나를 부른다고? 그것도 세 번이나?”

묵칠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영원 형님이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있냐. 왜? 아라가 또 상대해주지 않아?”

주 육소야는 해서탕을 연달아 두 그릇 비우고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영원의 편을 든 다음에야 묵칠에게 물었다. 묵칠은 그런 주 육소야를 흘깃 쳐다봤다.

“그럼, 그럼 난 먼저 간다.”

“어이! 묵칠! 며칠 뒤에 사냥하러 임강에 갈 건데, 너도 가자! 꼭 가야 한다!”

주 육소야가 묵칠의 등에 대고 고함쳤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묵칠은 대충 손을 저어주고 말에 올라탔다.

지금 내가 사냥할 마음이 있겠냐. 아라야! 열흘이다!

이동이 자등 산장으로 돌아가자 추미가 청국과 함께 마중 나와서 예를 갖추고는 일어서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시 예를 갖췄다.

“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낭자.”

“추미? 네가 어쩐 일이야? 언제 왔니?”

이동은 조금 놀랐다.

“아침 일찍 성에서 나와서 온 지 좀 됐어요. 일단 태태께 인사드렸더니 와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낭자, 안색이 좋아 보여요.”

추미는 기분이 꽤 좋은 듯 싱글벙글 웃었다.

“언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어? 아니면 좀 천천히 가렴. 점심 아직 안 먹었지? 같이 점심 먹자. 이야기는 먹고 나서 하고.”

이동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얼굴과 손을 닦고 추미에게 앉아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추미는 이동 맞은편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청국이 탁자 앞에 작은 의자를 내주었다.

밥을 먹을 땐 추미도 전혀 체면 차리지 않고 꿩탕을 한 그릇 뚝딱 먹고는 아쉬운 눈빛으로 간절하게 빈 그릇을 바라봤다. 이동은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청국에게 분부했다.

“더 있는지 보고 오렴. 있으면 한 그릇 더 가지고 오고. 그리고 추미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가지고 오렴.”

“맛만 봐도 소유 언니의 솜씨인 걸 알겠네요. 소유 언니가 만든 음식 오랜만에 먹어요. 정말 그리웠어요.”

“다 소유 언니가 만든 거야. 추미 언니, 많이 먹어요.”

추미가 조금 겸연쩍어하며 말하자, 문죽이 웃으면서 추미에게 음식을 밀어주었다. 추미는 밥과 탕을 한 그릇씩 더 비우고서야 흡족한 표정이었다.

청국이 접시를 치우고 차를 올리자, 추미는 차를 홀짝이고는 흐뭇한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낭자 곁에 있어야 사는 거 같아요!”

“웬일로 온 거니?”

이동은 딱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강가에서 보내는 나날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짐작도 못 하실걸요!”

추미가 순간 두 눈을 반짝였다.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요! 모레가 부인 생신이잖아요. 낭자도 아시죠? 대야가 며칠 전부터 고 이낭에게 제대로 생신 연회를 열라고 말했대요. 사람들도 많이 초대하라고요. 어쨌든 거창하게 열어야 한다고요.”

이동도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에, 고 이낭이 저와 청서, 그리고 춘연 앞에서 전혀 그런 이야기를 안 하더라고요. 청서 말이, 우리가 알게 되면 공을 가로챌까 봐 그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누가 그딴 공을 가로챌 생각이나 있대요? 온 집안이 엉망진창인데, 무슨 공이 있다고. 오히려 뒤집어쓰면 몰라도요. 청서가 모르는 체하길래 저도 모르는 체했죠.

그런데 웬걸, 오늘 아침에 고 이낭이 몰래 절 찾아왔어요. 절 붙들고 얼마나 말이 많던지. 들어봐야 화만 날 테니, 그대로 전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말이었어요. 다 낭자를 위해서 하는 말인 것처럼, 좋은 건 다 제가 차지하려 들고 말이에요!”

“추미 언니, 차 마시고 목 좀 축여요.”

청국이 웃으면서 찻잔을 내밀었다.

“아까 탕 많이 마셔서 목 안 말라.”

추미는 차를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는 계속 말했다.

“어쨌든 요지는, 모레가 부인 생신인데 며느리인 낭자가 얼굴을 내밀어야지 않겠냐고요. 낭자가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큰 불효를 저지르는 거고, 큰 불효는 열 가지 중죄 중에 하나라고요. 낭자, 말하는 것 좀 들어보세요. 정말 뺨을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이동은 참지 못하고 웃음 지었다.

“성질부리지 말고 잘 참아. 괜히 골탕먹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만 이렇게 했지, 앞에서는 고분고분했어요. 멍청이처럼요.”

추미가 자세를 바꿨다.

“부인 생신 연회는 자기가 다 준비했대요. 만사 모두 잘 준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낭자가 없으면 안 되겠대요. 다 낭자를 위해서라고요. 그러면서 저더러 낭자에게 다녀오라잖아요. 낭자가 돌아올 좋은 기회라고요. 부인 생신 연회를 잘 마무리하면, 부인과 세자야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예전 일은 다 없던 일로 할 거라고요. 낭자, 들어보세요, 낭자도 때리고 싶죠?”

“쯧! 정말 낯짝도 두껍네!”

문죽이 혀를 찼다.

“낯짝이 두껍기는. 낯짝이 아예 없어. 체면이라는 게 없다니까?

어쨌든, 이런 말을 하느라고 장장 반 시진을 절 붙들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마차를 마련해 줄 테니 저더러 낭자를 잘 설득해서 같이 돌아오라잖아요. 처음엔 싫다고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냥 다녀가도 될 것 같더라고요. 마침 낭자랑 이야기도 하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했죠. 고 이낭이 돌아간 다음에 바로 청서와 춘연을 불러서 다 이야기해줬어요. 청서는 화가 나서 펄쩍 뛰더라고요.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으니까 낭자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 거라고요. 그러면서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추미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청서보다 더 많이 아는걸요. 전 그냥 모르는 척하면서 안살림을 맡은 이낭인데 분부한 이상 따라야지 어쩌겠냐고 했죠. 나중에 화풀이하면 어쩌냐고요. 세자야는 고 이낭 말만 듣는데, 내가 골탕 먹을 것 있냐고요.

춘연도 같이 설득했어요. 그러니까 청서도 가지 말란 말은 안 하고, 낭자한테 강가가 지금 얼마나 엉망인지, 고가 그 천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가증스러운지 이야기하랬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면 안 된다고 전해달랬어요.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앞으로 세자야가 직접 낭자를 모시러 오는 날이 있을 거라고, 일단 고가 그 천것이 수녕백부 체면에 단단히 먹칠하길 기다리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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