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설득
황상은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의지하고 경모하듯이 올려다보는 영원의 모습에 갈수록 분노가 잦아들고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글을 잘 쓰는 막료를 들여라. 글 좀 쓰는 막료를 몇 명은 데리고 있겠지?”
“있습니다. 다만 글을 잘 짓는지 아닌지를 제가 모를 뿐입니다.”
영원이 막힘없이 대답하자 황상은 어이도 없고 말문만 막혀서 ‘흥흥’ 소리를 냈다.
“일단 써 보라고 해라. 네 변론 상주서를 써달라고 하고, 그런 다음에 우선, 우선 여 승상에게 보여주어라. 여 경, 자네가 수고 좀 해주게. 적합하면 들고 들어오고, 안 될 것 같으면 다시 쓰라고 돌려보내게! 그리고 너는 명심해라! 앞으로 오늘처럼 짐이 탄핵 상주를 네게 줄 것이니, 너는 변론 상주를 써야 한다! 변론 상주를 써서 짐에게 제대로 해명해야지, 이렇게 상주서를 끌어안고 무릎 꿇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여기가 네 집인 줄 아느냐! 오늘 일이야 별일 아니라지만, 앞으로 큰일이 닥치면? 그때도 무릎만 꿇을 것이냐? 무슨 소용이 있어서? 탄핵당하는 건 무릎 꿇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명심해라, 묵 승상, 여 승상에게 가르침 받아라!”
황상이 한마디 할 때마다 꼬박꼬박 대답하던 영원은 황상의 말이 끝나자 뒷걸음질로 물러나서 한 광주리 가득한 상주서를 끌어안고 쪼르르 한림원으로 달려갔다.
논의를 마치고 나온 여 승상은 마차에 올라서 마부에게 황성 주변을 돌라고 명령했다.
고민해야 할 중대사가 생기면 항상 이렇게 했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황성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생각하는 것이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성 밖 보림암, 적명 사태는 성안 복수암으로 가고 대상국사 주지 청공 큰스님이 추천한 도생 사태가 보림암 주지로 왔다.
전 노부인은 이른 아침에 마차를 타고 집을 나서서 성문 앞에서 딸 묵 부인과 합류하여 함께 보림암으로 향했다. 보림암의 주지가 바뀌어 새 주지가 온 일은 큰일이었다. 오늘 백 노부인을 만나 보림암에 들러서 장공주를 만나는 김에 도생 사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묵 부인이 전 노부인을 부축하고 들어갔을 때, 이동이 복안 장공주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혜녕 사태는 법화경 설법을 이미 끝냈고, 요즘은 이동 혼자 매일 보림암을 찾았다. 복안 장공주는 혜녕 사태의 법화경 강독을 듣는 것 외에 달리 수행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 두 사람은 일단 뒷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와서는 뜨락에 앉아 차를 마셨다. 점심엔 장공주는 황가 별원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쉬었고, 이동은 마차를 타고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가끔 점심시간 전에 복안 장공주는 관음전 혹은 지장전에서 향을 피우기도 했다. 아마도 법화경을 듣는 것 말고 유일한 예불 수행이리라.
복안 장공주는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해서 역대 군왕, 대신, 그리고 명사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혹은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언제나 정곡을 찌르며 날카롭게 판단했다.
그녀는 이동이 이야기해주는 대상 가문의 발전 역사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장사할 때 갖가지 수단, 갖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사실 이동 역시 이런 화제를 매우 좋아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는 침상에 누워서 예전에도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예전에 그녀는 전 노부인, 백 노부인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참 좋았다. 두 분과 이야기할 때 가장 들뜨고, 물 만난 물고기 같다고나 할까. 반나절 동안 통쾌하게 이야기 나눈 날엔 짜릿하고 다시 태어난 기분까지 들곤 했다.
전 노부인과 백 노부인은 지금 복안 장공주 같은 대화 상대였다. 다만 그녀들은 주로 각 가문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과거에 일어난 큰일 중에 자기들이 아는 세세한 내용들, 그런 큰일, 그리고 세세한 내용이 일으킨 막대한 파괴력…….
강환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태생부터 우아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질고 현명한 적도 없고.
고 이낭처럼 향 종이 하나에 몇 달 동안 공들이고, 격자가 조금 넓어야 할지 좁아야 할지 같은 문제로 며칠 내내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런 건 너무나 시시했다. 그저 글씨 쓰는 데 쓰이는 종이일 뿐인데, 향이 나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담. 격자가 조금 넓든 좁든, 정말로 구분할 수나 있을까?
어쨌든 그녀는 그런 걸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합향(合香: 여러 가지 향료들을 직접 조합하는 제향 공예)도 그랬다. 어떤 향이 조금 더 많고 적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차이를 맡아 낸 적도 전혀 없었고.
향을 만들지도 모르고, 향을 맡지도 못했다. 똑같이 2년 전에 만든 금률지(金栗纸: 송대의 명지名紙)인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시든 연꽃의 아름다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화사하게 만개한 연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원 역시 그랬다. 몇십 년 동안 안살림을 맡으면서 여인들이 부리는 작은 수단, 꼼수, 수작이 짜증 났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굳이 무수한 속내를 감춰도 똑똑히 알아들었지만, 일일이 반응하고 상대하기 싫었을 뿐이다.
수녕백부 후원의 여인들이 서로 수완을 부리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여인들이 부리는 수작을 무수히 맞서 넘기기도 했고.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옷 한 벌, 머리 장식 하나, 이런 사소한 일로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녀는 장사가 좋았다. 문 이야를 도와 온 세상의 전량을 좌지우지해서 호부를 몰아세웠던 일을 지금 떠올려도 흥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동은 일어서서 전 노부인과 묵 부인에게 예를 갖췄다. 복안 장공주는 찻잔을 쥔 채 계속 홀짝이다가 이동이 예를 갖춘 후에야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앉아 있으면 돼. 여기는 속세를 벗어난 곳이라 속세의 예법은 통하지 않아. 두 분도 앉으세요. 녹운, 차를 올리렴.”
“장공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뜨락으로 들어오면 속세를 벗어나서 인간 세상과 멀어진 것이지요. 장공주, 요즘 잘 지내셨습니까?”
전 노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복안 장공주는 그렇다는 말로 대충 대답했다.
“적명 사태가 복수암으로 가고 암자에 도생 사태라는 분이 새로 왔다면서요. 장공주, 도생 사태를 만나셨습니까? 마음에 드시던가요?”
전 노부인은 복안 장공주의 행동에 매우 익숙한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녹운에게 감사한 다음 웃으며 물었다.
복안 장공주는 차를 머금으며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 노부인은 안심한 모습이었다.
“그럼 다행이군요. 우리 집 노야가 어제 퇴청해서 하는 말이, 황상께서도 이 소식을 들었답니다. 장공주를 매우 걱정하신답니다. 우리 노야는 장공주께서 오랜 시간 수행했고 오래도록 속세의 일은 묻지 않았으니 이런 범속한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실 거라고 하더니, 지금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묵 승상에게 고맙군요.”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틀어 드디어 제대로 전 노부인을 바라보며 지극히 정중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이동은 문득 암자의 주지가 바뀐 것이 장공주의 뜻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날이 더워집니다. 장공주, 수행하더라도 몸조심하셔야 해요. 너무 힘들면 안 됩니다.”
전 노부인도 뭔가 할 말을 찾는 듯 보였다.
복안 장공주가 할 말이 그게 다인지 또 그렇다고 대답했고, 전 노부인도 차를 홀짝였다.
막 한 모금 머금는데 마당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계소영이 백 노부인을 부축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회랑으로 들어선 후, 계소영은 백 노부인을 잡은 손을 놓고 장읍하고 뒤로 물러나 돌아서서 나갔다.
평생 꼿꼿한 성정의 백 노부인은 자리에 앉으면서 일어서서 예를 갖추는 이동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체면 차리지 않고 물었다.
“어느 댁 며느리인가. 몹시 낯선 얼굴인데.”
“노부인은 처음 만나는 겁니다.”
복안 장공주가 대답하자 전 노부인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수녕백 세자 부인, 이씨랍니다.”
전 노부인은 이동만 소개하고 이동에게 백 노부인을 소개하지 않았다. 백 노부인은 아, 한마디만 하고는 고개를 돌려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암자에 주지가 바뀌었다지요. 도생이라는 분이 원래 있던 분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장공주의 담담한 말에 백 노부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찧으며 말했다.
“상관이 있든 없든, 이 경성에서 청정한 곳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백 노부인의 그 말에, 그 뒤로 길고 긴 이야기가 펼쳐질 걸 아는 이동은 잠시 주저하다가 웃으면서 일어서서 복안 장공주를 향해 무릎을 구부리며 예를 갖췄다.
“저 뒤에 차 준비가 거의 됐을 거예요. 제가 가볼게요.”
“음, 가봐.”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동은 세 사람에게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왔다. 월동문을 통해 뒤로 나간 그녀는 후조방에 있던 수련을 불러 곧장 보림암에서 나왔다.
이동은 암자 밖에 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뒷산으로 향하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암자 밖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보림암도 보림사와 비슷해서, 담장 밖으로 화초를 공들여 가꿨고 담장을 따라 깔린 자갈길에는 꽃과 나무가 가로질러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고 정교한 정자가 있었다. 보림사보다 보림암의 꽃들이 화사하고 무성하게 피었고, 정자도 훨씬 더 정교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이동과 수련은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맞은편에서 계소영이 다가왔다. 은백색 장삼을 입고 쥘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동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이동을 본 계소영은 의외라는 얼굴로 부채를 거두고 공수하고는 청석길을 따라 다른 쪽으로 꺾어서 걸어갔다.
이동이 자갈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뒤에서 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낭자,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이가입니다. 호주 이가.”
이동은 돌아서서 계소영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대범하게 대답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계소영은 몇십 년 뒤, 항상 표정이 굳어 있던 그와는 전혀 같은 사람이 아닌 듯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완고한 소년 느낌이 물씬 풍겨서 안쓰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강이(姜李)씨?”
계소영의 반응이 빠른 걸 보니,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아본 모양이었다.
“예.”
“아깐 실례했습니다. 소생, 계가입니다. 영형(令兄: 남의 형을 높여 이르는 말)과는…… 벗입니다.”
계소영이 반쯤 읍했다.
“나도 알아요. 계 천관부의 계 대공자시죠. 오라버니에게 들었습니다. 오라버니가 계 대공자를 매우 존경합니다.”
이동은 무릎을 구부려 답례했다. 이동의 솔직한 대답이 계소영은 조금 의외인 모양이었다.
“영형은 큰 인물입니다.”
이동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는 얼굴로 무릎을 구부려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의 오라비는 큰 인물이 맞으니 사양할 것도 없었다. 이동이 말을 하지 않자, 계소영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서서 작별을 고하지도 않아서, 이동은 잠시 기다리다가 먼저 인사하려는데 계소영이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가는 형편없는 집안입니다. 이…… 낭자,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나도 알아요. 감사해요. 고가 때문이 아니에요.”
이동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계소영이 젊었을 때는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당신은 강가 며느리입니다. 대세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연연하지 마십시오.”
“네. 계 공자는 올해 과거를 보지 않을 생각인가요?”
이동은 살짝 마음이 동해서 물었다. 계소영은 수재가 된 후로 더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나중엔 출신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바로 그런 이유로 줄곧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나중엔 천관 자리에 머물러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출신 때문이기도 했다. 정도가 아닌 음서로 출사한 데다가 계가는 세습할 작위가 있는 공훈 가문도 아니었다.
계소영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오라버니가 계 공자의 재능을 칭찬했어요. 과거를 보면 틀림없이 급제할 거라고요.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이번 과거를 놓치면 4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4년이나 걸리는 건 너무 아깝고요. 만사 준비해 두어야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이동은 애석한 마음에 조금 길게 설득했다. 지난 생에 계소영은 큰 기회가 왔을 때 수재 출신에 불과한 것에 발목이 잡혀 벼슬길이 험난했었다.
계소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동을 똑바로 바라봤고,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예를 갖춘 후 돌아서서 수련을 데리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