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97화 (97/463)

97화: 연회 二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출 수 있다고, 배경이 있는 만큼 수완도 좋은 여염은 사교에 능했다. 싹싹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에 모두가 여 대랑이 자기를 특별히 챙겨주고 특별히 친밀하게 군다고 여겼다.

역시 이중엔 여 대랑이 겸손하고 사리 분별한다니까!

한 바퀴 인사치레를 한 여염이 계소영을 바라보자 계소영이 바로 알아듣고 함께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호수 깊은 곳에 있는 정자까지 걸어간 다음 여염이 쓴웃음을 지으며 모두를 가리켰다.

“저것 좀 봐라. 초대한 사람들 좀 보라고. 오늘 반가 화원에 경성의 모든 망나니 자제를 일망타진해서 모았군.”

“그렇지.”

계소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흘러가듯 대답했다. 요 며칠 그와 부친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이 영 칠야였다. 사람과 일을 보려거든 바로 봐야지 뒤집어서 보면 안 된다는 부친의 말씀이 맞긴 했다. 영원이 경성에 온 보름 동안 벌인 일이 하나같이 허튼짓 같아도 지금 상황으로 보니 어느새 자리를 잘 잡았다.

전전사로 들어간 영원은 조회 때 황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시탐탐 사람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녹봉으로 받은 비단 한 필이 색이 바랬다고 호부를 찾아가 난리를 부리면서 관련된 관리 일고여덟을 채찍으로 후려친 일로 영원이 황상에게 걷어차이는 걸 그와 몇몇 승상이 똑똑히 봤다. 황상은 영원의 귀를 잡아끌고 바닥에 무릎을 꿇렸지만, 영원에게 내린 벌은 그게 다였고 호부는 매섭게 훈계 당했다.

부친 말이, 묵 승상과 여 승상도 이 구제 불능 영 칠야를 매우 신중히 대한다고 했다.

“시간이 다 됐는데, 주인은? 이것 좀 보라고. 이게 무슨 꼴이냐.”

여염이 정자 한쪽에 모래시계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온 것 같군.”

계소영이 호숫가에 있는 대난각을 가리켰다. 난각 안이 술렁거리는 게 보이자 두 사람은 서둘러 난각으로 향했다.

몇 걸음 다가가자 영원이 바로 보였다.

영원은 옅은 은남색 장삼과 백옥 허리띠에, 머리에는 복두 대신 머리카락을 감아올려 양지옥 비녀를 꽂고 있었다. 관옥 같은 얼굴, 창처럼 곧은 자세로 뒷짐을 진 채 난각과 바짝 붙은 작은 언덕에서 성큼성큼 내려왔다. 바람에 장삼이 휘날리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다고나 할까. 그 뒤로 온몸이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면서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고 몸이 쭉 빠진 세견(細犬: 그레이하운드 모양의 사냥견 종) 여러 마리가 영원을 에워싼 채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여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영원이 지극히 잘생겼다고 하더니, 이런 풍채이니 정북후가 어찌 싫은 소리를 하시겠나.”

계소영 역시 진심으로 감탄이 나오는 풍채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계소영은 눈을 깜빡이며 세견을 바라보다가 주 육소야를 휙 돌아봤다.

주 육소야는 세견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흥분해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쯤 벌린 입에서는 침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주 육소야는 개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세견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 조 노부인은 털 달린 짐승이라면 죄다 싫어했다. 고양이며, 개며, 집 안에 절대로 들이지 않았고, 몸에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밖에서 기르는 것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묵칠은 아라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느라 영원을 보지 못했다. 아라는 다다를 데리고 기녀들과 함께 난각과 그리 멀지 않은 곁채에 고분고분 앉아서 부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이 언덕에 나타나자, 창가와 문 앞에 앉아 있던 기녀들이 순간 나직이 환호했다. 아라도 일어서서 바라봤다. 세견을 거느리고 언덕에서 성큼성큼 내려오는 영원을 보는 순간, 한눈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런 기세, 풍채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이게 그 나찰녀(羅刹女: 지옥의 식인귀.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가 말한 흉악하고 횡포하다는 그 사람? 말도 안 돼!

“영 칠야, 정말 잘생기셨네!”

아라 곁에 서 있는 홍수가 도화눈을 빛내며 탄성했다.

“응? 널 부르러 갔었지 않아?”

류만이 옆에서 물었다.

“오긴 왔는데, 나는 못 만났지. 사부와 몇 마디 하고는 가버렸어. 응? 너한테도 갔었니? 너 저분이랑…… 좋은 일 있었어?”

류만과 사이가 좋은 홍수가 그녀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오시긴 오셨는데, 차 한 잔도 안 드셨어. 슬쩍 보고 바로 돌아가셨거든. 아래층으로 내려갈 틈도 없었다고. 영 칠야가 이런 분인 줄 알았다면 대문 앞에서 기다렸지!”

류만도 매우 아쉬운 듯 말했다.

기녀들이 수군거리는 말이 아라의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영 칠야가 이런 사람이라면 무얼 시키든 다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영원이 빠른 걸음으로 어느새 난각 입구에 도착해서 휘파람을 불자, 세견들이 금세 한 줄로 서서 난각 입구에 앉았다.

난각으로 들어선 영원이 모두를 향해 공수했다.

“다들 이렇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나 영원, 체면이 서는군요. 오늘은 통쾌하게 즐기길 바라겠습니다! 이게 나 영원이 손님 접대하는 법도이며, 이 화원에서는 모든 것이 여러분 마음대로입니다. 준비되었느냐?”

영원이 고함치자, 곁채 문 앞을 지키던 어멈이 서둘러 기녀들에게 손짓했다.

“얼른, 얼른! 잘들 모시세요! 우리 나리 기분 거스르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맨 뒤에 있던 아라가 난각에 들어서기도 전에 멀리서 묵칠이 단번에 알아보고 다급하게 손을 휘둘렀다.

“아라! 아라! 나다, 나야! 나 여기 있다!”

묵칠이 손을 휘두르며 난간을 넘어서 만개한 목단을 마구 밟아가며 아라를 향해 달려가자, 아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싫다는 듯 묵칠을 힐끔 바라봤다. 다다는 흥분해서 영 칠야와 체통도 잊은 묵 칠소야를 번갈아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영 칠야의 풍채랑 비교하니 묵 칠소야는 신발 들어주기도 부족하겠네! 영 칠야 댁 그 언니가 너무 사납고 무서운 게 안타깝네.

아라의 타박에 익숙한 묵칠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아라 곁으로 다가가서 아라 뒤로 돌아갔다가, 앞으로 돌아서 반대쪽에 섰다가, 졸졸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

“아라, 며칠 동안 만나러 가지 못했는데, 원망하진 않았지? 머리 장식은 다 만들어졌는데 오늘 가지고 오진 않았다. 이따 연향루로 보내주마. 아라, 며칠 동안 만나러 가지 않았는데 보고 싶진 않더냐? 아라, 난 매일매일 네가 보고 싶었다. 꿈에서도 보고 싶었어…….”

아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소자람 일행은 묵칠의 그런 태도에 진작 익숙했다. 영원은 굳어있는 아라를 힐끔 보고는 난각 밖에 서 있는 위봉낭에게 눈짓했다.

위봉낭은 지나치게 다정한 묵칠과 상대도 하지 않는 아라를 진작 보고 있었다. 너무 눈에 띄는 한 쌍이라 안 보는 게 더 어려웠다. 영원의 눈짓에, 위봉낭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 소저, 다들 너무 오냐오냐해서 버릇이 안 좋구나!

위봉낭은 술 시중드는 시녀에게 자연스럽게 쟁반을 받아서 성큼성큼 다다에게 다가가 쟁반을 안겨 주었다.

“묵 칠소야는 우리 칠야의 귀빈이라고 네 소저에게 말해라. 네 소저…….”

위봉낭이 아라를 힐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칠야의 체면에 먹칠하고 있다.”

다다는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우리 소저는 칠소야를 늘 저렇게 대하시는걸요.”

“늘 그러든 말든 모르겠고, 예전엔 어쨌든지, 앞으로는 어쩔 건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오늘은 우리 칠야의 연회고, 칠야의 손님은 다 잘 모셔야 해. 얼른 가라! 이러다가 우리 칠야가 성질을 부리면 늦는다!”

위봉낭이 쿡 밀자, 다다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서 쟁반을 묵칠 앞에 내밀었다.

“칠소야, 술 드세요.”

“역시 다다가 철이 들었구나!”

묵칠이 칭찬하면서 자연스럽게 매실주를 들어올렸다.

“응? 아라가 좋아하는 석류주는 없지 않아?”

다다가 헛웃음 치며 아라 곁으로 다가가서 소곤거렸고, 아라가 고개를 휙 돌려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위봉낭을 노려봤다. 위봉낭이 한 손을 가슴 쪽에 올리고 빙그레 웃으며 아라의 분노한 시선을 맞이했다. 손가락을 꿈틀하자, 손가락 끝에 매서운 빛이 번쩍였다.

아라는 부르르 떨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묵칠은 아름다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라, 이미 손을 내린 위봉낭을 번갈아 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왜 그래? 무엇을 봤길래? 왜 이렇게 놀란 게야? 안색이 다 변했는데, 괜찮은 것이냐?”

“괘, 괜찮아요. 그냥, 저기 목단이 예쁘게 핀 것 같아서요. 저와, 아니 제 말은, 목단 보러 가실래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아라는 반사적으로 묵칠에게 다가가서 저 앞 목단을 가리키며 웅얼거렸다.

“좋지! 물론이지! 네 말이라면 뭐든 좋다! 넌 옥부용을 제일 좋아하지 않으냐? 사실 말이다, 난 목단이 제일 좋다. 옥부용은 꽃잎도 많지 않고, 크고 둔해 보이고……. 아, 크고 둔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옥부용이 가장 아름답고 청아하지! 암! 가자, 목단 보러 같이 가주마! 여기에 있는 목단은 평범하단다. 있잖냐, 저쪽에 있는 목단이야말로 진짜로 진귀한 것이다.”

아라가 찰싹 붙은 데다가 웃는 얼굴을 보이자, 묵칠은 순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들고 있는 술도 쏟으면서 눈은 잠시도 아라에게서 떼지 못하고 주절주절 떠들며 목단보다 더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위봉낭은 아라의 웃는 얼굴 하나에 정신이 나간 묵칠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저렇게까지 단순한 아이는 정말 보기 드물지.

주 육소야는 미녀나 좋은 음식은 안중에 전혀 없었다. 좋은 술은 더더욱 안중에 없고, 보이는 건 오로지 난각 앞에 단정하게 앉은 세견뿐이었다.

주 육소야는 난각 앞에 앉은 세견을 빤히 바라보며 한 마리, 한 마리 살펴보고는 다시 한 마리, 한 마리 되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세견이었다. 품종도 그렇고 모든 면이 그러했다.

모두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아 온몸이 반질반질 새카맸다. 눈빛은 밝고 침착하고, 긴 다리, 가는 허리, 온몸 근육이 탄탄한 것이, 정성껏 공들여 먹이고 기른 것들이었다.

주 육소야는 마음이 근질근질해져서 만져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러자마자 개들이 거의 동시에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 육소야는 식겁해서 손을 움츠렸다. 세견이 얼마나 포악한지야 너무나 잘 알았다. 게다가 이건 그놈의 개가 아닌가. 그놈이 기르는 개니 분명 사람을 물겠지. 그것도 아주 사납게 물겠지.

주 육소야는 일어섰다가 쭈그렸다가, 쭈그렸다가 다시 일어섰다가, 만지고 싶은데 엄두는 나지 않고, 만지지 않자니 괴롭고, 그렇게 한참 동안 움찔대다가 도저히 못 참고 일어서서 영원을 찾으러 갔다.

“어이, 저기 세견들, 팔 거냐 말 거냐?”

주 육소야는 단숨에 영원 앞으로 달려가서 한창 영원과 이야기 중인 뉘 댁 자제인지도 모를 소야를 덥석 밀쳤다. 그는 주먹을 움켜쥔 양손을 뒤로 감춘 채 고개를 치켜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서 ‘난 너 따위가 무섭지 않아!’라는 듯 물었다.

영원은 몹시 놀란 모습이었다.

“팔아? 판다는 게 뭐냐? 이 나이 먹도록 사는 건 알아도 판다는 건 모르는데.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다만.”

“저기 세견, 한 마리만 팔아라. 한 마리면 된다.”

잠시 버틴 주 육소야의 기세가 금세 벼랑 아래로 떨어지듯 쪼그라들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고개를 치켜든 채 영원을 바라봤다. 말투에 은근히 부탁의 기세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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