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95화 (95/463)

95화: 복안 장공주의 난제 二

“노부인, 황상이 아니었다면, 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이 삼천 번뇌사를 잘라냈을 거예요. 지금도 아직 버리진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작 버렸답니다. 세상사도 다 꿰뚫어 보았고요. 어서 윤회하길 바랄 뿐이에요. 어쩌면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복안 장공주가 손에 든 찻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아이고, 진저아.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러면 안 됩니다! 어제 궁에 들어갔더니 황상이 날 보자마자 공주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공주 이야기만 나오면 황상이 미간을 찌푸리신답니다. 황상의 그런 모습을 못 봐서 그래요. 공주를 잘 돌보겠다고 선황과 태후에게 약속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외롭게 홀로 지내는 걸 보면…… 눈도 감을 수 없답니다! 공주가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는데, 나중에 무슨 얼굴로 선황을 뵙냐고요. 태후는 또 어떻게 뵙냐고요. 해마다 제사를 지내러 향전(享殿)에 들어갈 때도 너무 죄스럽답니다! 진저아, 솔직히 말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황상 때문에라도 그만 자기를 괴롭히세요.”

조 노부인은 정말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동은 조 노부인,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차를 홀짝이는 복안 장공주를 번갈아 봤다. 처음에 장공주와 이야기 나눴을 때 장공주가 자기 어머니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머니가 조 노부인처럼 나와 강환장이 부창부수하며 자손을 많이 남기길 오매불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 노부인은 황상의 애통한 마음부터 시작해 태후의 유지 이야기를 거쳐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지 않는 여인은 여인이 아니라고, 혼인하고 자식을 낳아야만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되풀이하고, 되풀이하고, 해가 머리 위에 높이 뜰 때까지 되풀이했다. 이야기가 끝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동은 매우 감탄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전혀 지치지 않고 변함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한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고, 또 한 사람은 오전 내내 단정하게 앉아서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심지어 성질도 내지 않은 채 눌러 듣고 있었다.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조 노부인이 드디어 일어서서 장공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진저아, 내 말을 잘 생각해 보세요. 휴. 공주도 이제 어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집만 부릴 일이 아니에요. 첫째, 황상을 위해 생각해야 하고, 둘째, 진저아, 내 말 좀 들으세요. 혼인하고 아이가 생기면 내 말이 얼마나 옳은 이야기였는지 깨달을 겁니다. 여인은 아이가 있고 없고, 아예 사람이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요. 세상이 변합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알게 될 겁니다! 진정한 여인이 무엇인지요!”

“노부인이 올해 쉰일곱이지요? 나이도 들었는데, 쓸데없는 일은 상관하지 말고 잘 요양하세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자, 내가 모시고 나갈게요.”

복안 장공주도 일어섰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관할 일이 뭐가 있어서요. 진작 다 내려놓았어요. 내가 신경 쓰는 건 공주 문제뿐입니다. 상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신경 쓰겠어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태후께서 눈 감기 전에 내 손을 꼭 잡고 당부했어요. 공주를 내게 맡긴다고요. 혼인해서 제대로 살지 않는 한, 나는 신경 쓸 겁니다. 하루도 편안하게 못 살아요! 아이고, 태후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복안 장공주는 앓는 소리를 하는 조 부인을 마당 문 앞까지 배웅하고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섰다.

“가자, 나랑 뒷산을 좀 거닐자.”

복안 장공주는 이제 막 문을 열고 나오는 이동을 지나치며 분부했다.

이동은 그녀 뒤를 따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보림암 뒷문으로 나갔다. 복안 장공주는 걸음을 전혀 늦추지 않고 작은 산 정상에 오른 후에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서 햇살 아래 한참 서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동도 서둘러 따라갔다. 복안 장공주는 아까보다 느린 걸음으로 산자락까지 걸어가서 불룩 튀어나온 바위 뒤로 돌아서 올라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어머니가 첫 번째로 한 일이 내 서가를 비운 일이야. 더는 글선생 밑에서 공부하지 못하게 했지. 교양 상궁도 싹 다 바꾸고, 그날부로 나는 여효경(女孝經)이니 여사서(女四書) 같은 책만 읽었어. 아버지가 나를 오냐오냐해서 망쳤다고, 어머니가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나중엔 혼인해서 수국공부로 들어가라고 하셨어.”

벼랑 가장자리에 서서 이야기하던 복안 장공주의 말이 거기서 멎었다. 이동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장공주를 바라봤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걸까. 이런 황실의 비밀 이야기를, 아직은 낯선 사이나 마찬가지인 나에게 왜 이렇게 털어놓는 걸까.

장공주는 한참 만에 쓸쓸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비록…… 하지만 나를 제일 아끼셨어. 어찌 됐든 친딸이니까.”

한동안 장공주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거의 들리지 않을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는 게 그래. 갈수록 힘겨워지지.”

이동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랬다. 장공주의 삶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몇 년 뒤엔 금을 삼키고 자진할 정도로 힘겨워지고.

“어째서, 혼인하지 않으세요?”

한참 만에 이동이 힘겹게 묻자, 복안 장공주가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자네는 어째서 강환장과 계속 살지 않아? 이 세상 부부 대부분 그렇게 살잖아? 지아비는 허튼짓하고, 아내는 참고. 다 그렇게 살잖아. 온갖 수단을 써서 모든 것을 막으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잖아?”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가 가볍게 하, 소리를 냈다.

“아니야? 강환장과 강가, 최고는 아니지만 중간은 가잖아. 그런데 왜 버티지 않지? 왜 참지 않아? 수완을 좀 부려서 첩이든 종복이든, 아니면 강가 사람들이든, 심지어 강환장과 머리 싸움하면서 평생 지내면 되잖아? 왜 도망쳤지?”

“공주는 온 세상의 사내를 고를 수 있잖아요.”

잠시 침묵하던 이동이 대답했다.

공주는 나랑 다르잖아요. 안 그런가요?

“세상 사내를 고르면 뭐가 달라져? 세상 사내가 다 똑같은 물건이면?”

복안 장공주의 말투엔 경멸과 무시가 가득했고, 이동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와 그녀는 달랐다. 신분, 지위가 다르니, 안목도 다를 수밖에.

“앞으로 어쩔 계획이지?”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슬쩍 보며 물었다.

“강환장, 강가와 함께 살 생각은 없어요. 강가는 백부예요. 개국한 이래 작위가 있는 가문에서 휴처하거나 화리한 선례는 없죠. 지금으로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아마 강가를 벗어날 방법은 없을 거예요. 앞으로 어쩌면 저도 출가할지 몰라요. 다만…….”

이동은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일단 목숨을 부지해야 해요. 제 목숨, 어머니의 목숨, 우리 이씨 가문 모두의 목숨을요.”

복안 장공주의 눈썹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건 너무 간 것 아닌가? 고작 수녕백부가 그럴 수 있어?”

“장공주 눈엔 수녕백부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우리로서는 대단하게 느껴져요. 우리는 상인 가문이고, 줄곧 여인이 이끌었어요. 얼마 전에 오라버니를 양자로 들였지만, 이제 막 들어온 거고요.”

“그 오라버니, 자네 혼인이 잘못되어서 일부러 양자로 들인 건가?”

“맞아요. 오라버니를 양자로 들이지 않으면, 강환장이 이가 모든 것을 휘두를 수 있어요. 저와 어머니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요.”

이동이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율법이 그렇고, 세상사가 그렇지. 어머니가 판단을 내리고 양자로 들인 건 잘한 거야. 하지만 등에 칼 찔리지 않게 조심해.”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오라버니는 인품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도 오라버니가 자라는 걸 계속 봐온 셈이고요.”

이동은 이신과 이가의 과거를 나지막이 이야기했고, 복안 장공주는 매우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 인연이 다 있었군. 오래전부터 뒷일을 위해 포석을 깔아두었다니, 참 대단한 어머니네.”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그때 오라버니가 너무 불쌍해서 도와준 거예요.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살지 못했을 거예요.”

복안 장공주가 웃는 듯 아닌 듯 삐딱하게 이동을 바라봤다.

“순진하네. 어머니가 이신을 도운 건, 그래, 처음엔 불쌍해서 도와줬겠지. 하지만 나중엔…… 그래서 고수의 포석이라고 한 거야.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국을 이루었으니까. 네 오라비, 내년에 급제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지?”

“학문, 글솜씨 모두 충분해요. 밖을 돌아다니면서 단련하고 식견을 넓혀서 세상 물정, 경제도 조금 알고요. 얼마 전엔…… 상원현의 문도, 문 선생을 오라버니 막료로 들였어요. 문 선생은 막료 가문 출신이래요. 전량, 형명에 모두 정통했다고 하네요. 내년 춘시는 운에 달렸지만요.”

“상원현이라. 원청강의 군사 참모였던 문가?”

복안 장공주의 물음에 이동이 얼떨떨해하자, 장공주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 대장군의 막내딸이 바로 여지안(呂芷岸)의 큰 며느리야. 여지안이 바로 여 승상이고.”

“아! 맞아요. 그 문 선생의 손자예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원 대장군의 이름이 원청강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며 단련하게 하고,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문도를 붙여주고, 이런 건 소위 세도가 관리 가문의 전통이야. 가난한 서생은 죽어라 글공부만 하지, 이런 건 몰라. 자네 이가엔…… 서생이 거의 없지? 자네 어머니는 세도가 가문의 법도대로 오라버니를 키웠어. 자네 오라버니도 지금은 모르겠지만, 장차 벼슬길에 오르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얼마나 고마워하겠어. 이게 그저 호의였다고? 그저 호의로 이렇게까지 마음 쓸까? 이렇게 큰 공을 들일까? 그 많은 은자를 써서? 자네를 가르치지 않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장공주의 시선에 이동은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붉어졌는지도 모를 일이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라비도 영리한 사람 같네. 적어도 자네보다 영리해. 영리하면 많은 일이 쉬워지지. 그런 은혜를 베풀었으니, 거기에 자네가 그렇게 영특한 사람이 아니니, 나중에 출세하면 분명 자네를 평생 잘 돌봐 주겠군. 어쩌면 평생 아끼고 보살필지도 모르지.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이니까.”

“사람을 자꾸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저와 어머니를 진심으로 가족으로 생각해요.”

이동이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이신 오라비가 진심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대한다는 건, 매우 단호하게 확신하는 일이었다.

“그건 그래.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만한 정이 생기는 법이지. 게다가 꽤 깊은 정이야. 하지만!”

복안 장공주가 나른하게 대답하더니 돌아서서 이동을 마주 봤다.

“잘 들어. 정은 이익과 한 몸이야. 변하지 않는 정은 없어.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그 정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해. 이익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아. 이익이 변하면, 아무리 깊은 정이라고 해도 오래 가지 못해.”

이동은 멍하니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이러니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선황이 ‘사내였다면 천고의 황제가 될 만하다.’라고 칭찬할 수밖에. 적어도 이 냉혹함은 천고의 황제의 기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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