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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94화 (94/463)

94화: 복안 장공주의 난제 一

복안 장공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변함없이 서쪽 회랑에 앉아서 찻가루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언짢아 보였다.

“적명 사태가 부적을 그려달라고 혜녕 사태를 모시고 갔어요. 급한 거라고요. 조금 늦게 오실 거예요.”

이동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 적명 사태의 말을 전했다.

복안 장공주는 눈도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앉으라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동은 찻자리를 살폈다. 자리에 잔은 두 개뿐으로, 하나는 복안 장공주 앞에, 또 하나는 그녀 앞에 있었다.

이동은 저도 모르게 복안 장공주를 힐끔 살폈다. 혜녕 사태가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었나? 그럼 조 노부인이 오는 걸 알고, 왜 오는 건지도 아는 건가? 그래서 혜녕 사태가 자리를 피할 것도 알고 있었나? 아니면 적명 사태가 분명 혜녕 사태를 끌고 가서 자리를 피하게 할 걸 알고 있었나?

“오늘은 다른 차야. 마셔 봐.”

복안 장공주가 찻잔에 찻가루를 넣으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복안 장공주가 은주전자의 끓는 물을 찻잔에 붓는 순간, 진한 말리 향이 물씬 풍겨왔다. 이동은 만끽하듯 향기를 맡는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이것저것 향을 섞은 차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향기가 차 본연의 청향을 다 덮는다고. 무슨 향을 섞든지, 차에 대한 모욕이라고. 오늘은 왜 이런 말리 향만 나고 차향은 전혀 나지 않는 이런 차를 마시는 거지?

조 노부인 때문에? 조 노부인이 이런 차를 좋아해서? 아니면 싫어해서?

이동이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자, 복안 장공주도 그녀를 바라봤다.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말리 향을 맡았다.

“이런 차는 향을 맡는 게 좋아요.”

“그래.”

복안 장공주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이 대답했다. 이동은 그녀가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자 찻잔을 들고 조금씩 음미했다.

막 두어 모금 마시는데, 밖에서 어린 비구니가 달려 들어왔다. 비구니가 가까이 오기 전, 복안 장공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이동을 바라봤다.

“잠시 자리를 피해서 안쪽 방에 들어가 있어.”

이동은 서둘러 일어나서 찻잔을 들고 녹운이 가리키는 대로 서쪽 방으로 들어갔다. 다섯 칸짜리 높고 너른 상방엔 가림막이 하나도 없었고, 전랑의 배치와 거의 비슷해서, 찻상, 의자와 갖가지 다구가 놓여 있었다. 날이 추울 땐 이곳에서 차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버성긴 문틈으로,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이동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문틈을 통해 바깥의 기척을 주시했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노부인이었다. 살짝 통통하고 선해 보이는 노부인은 한 손은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녀의 팔을 잡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센 노부인은 고동색 단화(團花: 둥근 꽃문양) 장의(長衣)를 입고, 그 안엔 짙은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목엔 통이 넓고 커다란 맑고 영롱하게 빛나는 비취 팔찌를 끼고 있는데, 딱 봐도 매우 귀한 비취였다.

이분이 조 노부인일 것이다.

이전 생에는 조 노부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대황자와 사황자 모두 파멸한 다음, 조 노부인이 쓰러졌고 반년 후엔 세상을 떠났으니까. 주 귀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이 말리화 냄새가 제일 싫습니다.”

예를 갖춘 다음, 조 노부인은 아까 이동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회랑 주변에 가득한 말리화 향을 맡으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향이 얼마나 좋은데요. 노부인은 어째서 싫어할까.”

복안 장공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자, 노부인이 웃음 지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게 다른 게지요. 의식기거, 누구는 이걸 좋아하고, 누구는 저걸 좋아하고,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정해진 이치랄 게 없어요.”

“옳은 말씀입니다.”

복안 장공주는 가르침을 받은 표정이었고, 녹운은 새로 차를 우려 조 노부인에게 건넸다. 조 노부인이 한 입 머금어 보고는 미소 지었다.

“향이 참 좋군요! 나는 이런 매화빙편(梅花冰片)이 좋습니다.”

“난 빙편의 향이 제일 싫어요. 말리화 향이 얼마나 좋은데, 왜 그렇게 싫어하실까.”

복안 장공주의 말에 이해할 수 없음과 불만이 느껴지자, 조 노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 젊을 때부터 말리화 향이 싫었습니다. 차향은 말할 것도 없고, 화원에도 말리화를 심지 않았어요. 이젠 고치지도 못합니다. 공주께서 빙편을 싫어한다니, 그럼 싫어하세요. 큰일도 아닙니다.”

“음. 하긴 그렇지. 알겠어요. 다음에 노부인이 올 땐 말리화차를 내놓지 않을게요.”

복안 장공주의 뼈있는 말에 조 노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찾아뵐 때는 또 잊으시겠지요.”

“육가아는 어때요? 다친 곳은 괜찮아요? 심하게 다쳤다던데.”

복안 장공주는 화제를 돌렸다. 주가 육소야가 자신이 마련한 법회에 참석했다가 보림사 산자락에서 맞아서 다쳤으니, 조 노부인을 만난 이상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겉만 다친 것이라 괜찮습니다. 거의 다 나았어요. 며칠 전부터 나가겠다고 난리를 부립니다. 저택에만 있어서 답답해 죽겠다고요. 제가 못 나가게 했습니다.”

조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어제 승록사(僧彔司: 승려를 감독하던 관직)가 적명 사태를 성안에 있는 복수암 주지로 보낸다고 하던데, 공주도 들으셨습니까?”

한담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조 노부인이 본론을 꺼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겠어요.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닌데.”

복안 장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상관있지요. 공주가 암자에서 수행하는데, 암자의 주지는 안심할 만한 사람으로 두어야지요. 적명 사태가 이 암자에 있던 게 두어 해 되었지요? 줄곧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승록사에서 무슨 허튼짓인지. 복수암에 보낼 사람이 없을까, 하필 적명을 보내겠다니요.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을 보내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공주가 계신 암자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는 건지 하고요.”

조 노부인은 몹시 화가 나고 불만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현덕으로 소문난 이 노부인은 무던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평소에 수행하면서 내 거처에만 있고, 암자 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아요. 1년 동안 적명 사태를 만나는 것도 몇 번 안 되는데, 사태가 있든 말든, 다른 곳으로 가든 말든,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복안 장공주는 말투도 담담하고 표정은 더 담담했다. 수행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은 사람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복수암은 성안에 있어서 향불이 왕성한 곳이고, 청빈한 보림암과 비교할 수 없죠. 승록사가 그런 기회를 주었는데, 내 욕심 하나 때문에 적명 사태를 이런 청빈한 곳에 붙잡아 둘 수 있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것도 내 죄업이 될 텐데? 내 수행에 지장이 될 수도 있어요. 떠나라고 하세요.”

조 노부인은 매우 언짢은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명도 참. 출가한 사람이, 청정할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 굳이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다뇨. 진짜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모양입니다.”

“속세를 떠나서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속세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마다 수행하는 방식이 다른 겁니다.”

복안 장공주가 하는 말이 갈수록 묘해졌다.

조 노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난 공주 입에서 수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싫습니다. 아진, 내가 나이로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과 의리가 깊은 분인 거 압니다. 효심이 지극하지요. 하지만 태후께서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치른 것만 해도 이미 효심은 충분합니다. 자식이 할 수 있는 효도는 다한 겁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고 자식이 출가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암자에서 계속 지내면 안 돼요.”

“노부인, 말씀드렸듯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내 마음도 죽었어요. 원래 속세가 싫었어요. 부모님이 키워준 은혜가 너무 깊어서, 어쩔 수 없이 속세에 살면서 부모님을 봉양했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도 떠나셔서 삶에 미련이 없어요. 암자에서 살지 않으면, 어디로 가라는 거예요?”

장공주의 말투가 냉담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태후께서 눈 감기 전에, 다른 걱정은 하나도 없었는데 오로지 공주 걱정을 했습니다. 그때 태후께서 뭐라고 당부하시던가요. 좋은 짝을 골라 어서 혼인하라고 하셨지요. 지아비를 내조하고 자식을 기르고, 태후가 눈 감기 전에 그 큰일을 제게 부탁했습니다. 아진, 태후는 공주가 잘 되기만 바란답니다. 태후의 그런 마음을 거역하면 안 되지요.”

조 노부인은 매우 골치 아파 보였다.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조 노부인, 복안 장공주에게 혼인하라고 설득하려고 온 거였구나!

“어머니가 그렇게 나를 아끼셨기 때문에, 평생을 바쳐 어머니의 복을 빌려는 거예요.”

“진저아! 그런 건 진짜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입니다. 진저아, 효심이 깊다는 걸 나도 알아요. 하지만 태후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잖습니까. 부모는 원래 자식보다 먼저 떠납니다. 슬픈 것도 알아요. 하지만 슬퍼도 어쩌겠습니까. 살아가야지요. 우리는 살아가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조 노부인이 노파심이 가득해서 하는 말에, 이동은 좀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복안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은 건 효도 때문이 아님을 자신도 알아보는데, 조 노부인은 정말로 모르는 걸까? 정말로 장공주가 효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저러는 걸로 아는 걸까?

복안 장공주는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차를 우렸다.

“진저아,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출가, 수행, 이런 건 다 큰일을 겪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랍니다. 공주가 긴 세월 동안 이런 암자에서 고되게 수행하는 일로 황상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관리든 서생들이 말을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황가가 아니라 평범한 집안이라고 해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잘사는 집안인데 누이가 출가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가문의 가주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다들 입방아 찧지 않겠어요? 진저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황상을 위해서 생각해야지요! 황상이 공주를 얼마나 아낍니까!”

조 노부인이 방향을 바꿔 설득하는 말에 이동은 조마조마해졌다. 의미가 너무 많은 말이었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복안 장공주의 지금 이런 행동은 황상이 자비롭지 않다는 이름을 씌울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노부인, 나는 정말이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아요. 귀비 마마는 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진 거라고 해요.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다가 쓰러진 거라고요. 노부인, 난 그 생각만 하면, 내 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복안 장공주가 눈을 내리깔고 상심한 어조로 말하자, 조 노부인이 더 마음 아픈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공주도 참. 효심이 너무 지극하다니까요. 진저아, 내 말 들으세요. 부모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부모는 가슴이 찢어진답니다.

육가아만 해도 그래요. 사실 겉만 조금 다친 것이라, 약을 쓰니 나날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너무 괴로워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매일매일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낫는 걸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그래서 또 보면,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럼 육가아가 불효한 걸까요?

그건 아니지요? 공주의 혼사로 태후께서 매우 근심한 건 맞아요.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쓰러졌다기엔, 설령 그 때문에 쓰러졌다고 해도, 그건 부모 마음이 원래 그렇습니다. 공주 탓이 아니에요.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부모는 원래 자식 걱정뿐입니다. 설사 죽는대도, 다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어머니가 날 그렇게 생각해주시는데, 나도 보답은 해야지요.”

“이런, 이런.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말입니까. 아이고, 내가 뭐라고 해야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왜 모르십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잘해주는 건, 자식도 그렇게 하길 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식이 잘 지내기만 하면 됩니다. 시부모 공경하고, 부부가 마음이 맞고, 아들딸 잔뜩 낳고, 자손을 많이 보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바람대로 하는 거랍니다.”

조 노부인은 목이 타는지 녹운에게 차를 더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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