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초대
문 이야가 몇 가닥 없는 수염을 문질렀다.
“오황자를 만나볼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다만, 영원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적어도 매우 건강하단 이야기겠지.”
“우리 장원 중에 별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안 되지!”
영해의 말에 문 이야가 매섭게 저지했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안 돼! 명심해라. 첫째, 절대로 일부러 그 영 칠야를 수소문해선 안 된다. 둘째, 황자들도 마찬가지야. 누구도 안 돼.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셋째, 명심해라. 함부로 입을 놀리면 죽음뿐이다.”
“예!”
영해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나라. 사환들한테 쓸데없는 말 캐내지 않은 건, 참 잘했다. 네가 영리한 아이일 줄 알았다. 명심해라. 넌 대야의 눈, 귀, 손과 발이다. 대야가 잘되어야, 너도 잘된다.”
“예.”
영해는 방향을 틀어 이신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서 일어나라.”
이신의 말에 영해가 일어나자 문 이야가 손을 저었다.
“이만 물러가서 쉬어라.”
영해가 물러난 후, 문 이야는 지극히 흡족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영해 하나로는 부족하네. 자네는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종복들을 잘 모르겠지. 내일 태태에게 찾아가서 사람을 골라 달라고 하게. 영해에게 맡겨서 잘 가르치고.”
“예.”
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물었다.
“이야,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영원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이렇게 돈을 마구 뿌리고 다니다가 정북후부에 화를 초래할까, 걱정되지 않는 걸까요?”
문 이야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북후부에 돈이 넘친다는 건 조정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병사를 거느린 가문 중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이지 않은 집안도 있는가?”
이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글공부하는 사람의 폐단이지.”
문 이야가 이신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울 때 세운 법도 중에 유독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자 죽는다는 조항이 없었네. 군인이 되어 싸운다는 건, 까놓고 말해서 머리를 내놓고 높은 벼슬에 오르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걸세. 관리라고 누구나 승관하는 게 아니고, 재물 역시, 누구나 벌 수 있는 게 아니지. 이건 자세히 생각하면 안 되고, 자세히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네.”
문 이야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이렇게 이야기하세. 나라가 흥하면 백성이 고달프고, 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고달프네.”
“그렇군요.”
이신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내 조상도 그랬지. 한때 원 대장군 밑에서 막료 생활을 하며 원 대장군의 군량을 통괄하면서 대장군에게 크게 신임받았지. 당시에 금을 몇십 수레로 옮길 정도였다고 하네. 우리 문가도 형편이 좋았고.”
문 이야는 양손을 배 위에 올리고 어두운 얼굴로 한참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 숙부는 한때 도수감 심리 관아에서 전량 사야로 있었지. 내가 숙부를 따라 전량을 배운 것도 바로 그 심리의 수리 업무 관아에서였네.”
이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문 이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하는 옛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심리, 이자는 개국 이래…… 아니, 개국 이래일 뿐만 아니라, 숙부의 말대로라면, 자고이래 치수 방면으로는 세 사람 안에 드는 자일세. 당시 양강 지역 수리 업무는 그의 치하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되었지. 그때 진행한 공정 중에 온 천하에 이로운 공정이 매우 많았다네.”
문 이야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랑에 걸린 등롱 아래 드리운 유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심리는 지극히 사치스러운 사람이고, 명성과 이득을 탐하는 마음이 강했네. 하도에 쓸 은자를 남용한 것이 밝혀졌지. 수리 업무에서 독직한 것은 큰 죄라, 심리는 옥에 갇혔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성품이 우직한 숙부가 심리의 재주를 아껴서 재산 절반을 내놓고 심리가 독직한 은자를 배상했네.”
이신은 너무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지만, 문 이야의 말을 자르진 않았다.
“그런데 웬걸…….”
문 이야가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리가 옥에서 나온 다음, 모든 죄를 숙부에게 뒤집어씌웠지. 재기하려고 음모를 꾸며서 내 부친까지 사지로 내몰았어.”
“심리는…… 은자를 독직하고도 머리가 잘리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신은 목이 다 칼칼해지는 듯했다. 사람 마음이 이런 것이라면, 정말 뼛속까지 식을 것 같았다.
“내가 옛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모든 은자를 다 내던지고도 가족은 구하지 못했네. 복수만 했을 뿐이야.”
문 이야의 냉담한 목소리에서는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이야, 가문을 이루셔야지요.”
이신은 한참 만에 겨우 그 말을 했다.
“가문을 이루긴 개뿔!”
문 이야가 별안간 발을 구르며 욕을 했다.
“어차피 남은 목숨은 거저 얻은 걸세! 평생 잘 먹고 잘 자고, 다리 쭉 뻗고 죽으면 모든 게 끝나네. 얼마나 자유로운가!”
위봉낭은 연향루 아래 서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옛것처럼 투박하고 청아한 연향루는 건물과 그 이름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아라의 시녀 다다가 통통한 몸으로 발끝을 세우고 위층에서 고분고분 내려오더니 위봉낭을 향해 예를 갖췄다.
“언니, 우리 소저가 오늘 몸이 좋지 않다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대요.”
위봉낭이 다다를 밀치고 위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이고! 언니! 우리 소저가 만나지 않겠다고 한 건, 올라오란 소리가 아니에요! 언니, 어서 내려와요! 언니, 들어가면 안 돼요!”
다다는 잠시 멈칫하다가 뒤늦게 치맛자락을 들고 후다닥 따라갔다. 그러나 위봉낭을 따라잡을 수가 있을 리가 있나. 헐레벌떡 위로 올라갔을 때 위봉낭은 이미 뒷짐을 진 채 긴 서안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아라 앞에 서 있었다.
아라는 이 연향루라는 이름과 지극히 잘 어울렸다. 키가 그리 크지 않고, 적당히 마른 몸매, 매우 가는 허리, 하늘하늘한 몸매, 요염함이 흐르는 눈매, 딱 봐도 조심스럽게 아끼고 지켜야 하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아라는 붓을 든 채 살짝 몸을 틀고 위봉낭을 노려봤다. 화난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그 얼굴에, 위봉낭은 전혀 화도 나지 않고 부드럽게 토닥이며 예뻐해주고만 싶었다.
“아라 소저, 우리 칠야는 경성의 다른 소야들과 다릅니다. 어서 가는 게 좋아요. 기분 거스르지 말고요.”
위봉낭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웠다. 아라 소저, 정말로 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어여쁘네! 내가 봐도 이런데, 하물며 사내는 어떨까!
“누가 올라오라고 했지?”
아라의 목소리는 연약하고 나긋나긋해서 분명 매섭게 고함치는데도 위봉낭 귀엔 어리광을 부리는 것으로 들렸다.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혼자 올라왔어요! 제 탓이 아니에요! 어이! 얼른 내려가요! 어서요!”
다다가 위봉낭 뒤에서 밀치고 나오더니 용맹한 자태로 소저 앞을 가로막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봉낭이 별안간 다다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리자, 다다가 날카롭게 고함쳤다.
“내려놔! 헉. 숨을 못 쉬겠어! 내려놔!”
위봉낭이 다다를 든 채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다다를 밀었다. 다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서, 위봉낭이 조금이라도 손 힘을 풀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질 듯했다.
다다가 겁에 질려 꽥꽥 비명을 지르자, 위봉낭이 대번 고개를 돌려 돌아봤다. 그리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떡 벌리고 바보처럼 바라보는 아라를 향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높은 건물이 아니라서, 설사 손을 놓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떨어져서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지 죽진 않아요.”
“하기만 해! 너…… 너, 감히…….”
아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야만인은 처음이잖아!
“저는 말주변이 좋지 않답니다. 우리 칠야를 모실 땐 말주변이 필요 없거든요. 소저 시녀가 저한테 소리 지르는 거 보셨죠? 오늘 제가 기분 좋아서 그렇지, 기분 안 좋을 때였으면 진작 내던졌어요. 우리 칠야가 항상 저더러 마음이 너무 약하고 성격이 너무 좋다고 하시죠. 음, 알아들으셨나요?”
“뭘? 뭘 알아들어? 얼른 내려놓아……. 아니, 아니! 가지고 와! 아니, 아니. 잘 들어! 네가 감히…….”
아라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위봉낭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손에 힘을 풀었다. 다다가 바로 사라졌다.
아라는 흐응,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더니 그대로 기절했다. 위봉낭은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고는 손을 털며 기절한 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인중을 꼬집었더니, 아라가 흐응, 거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아라는 위봉낭이 바로 앞에 있는 걸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뒤로 달아났다.
“내가 한 말, 알아들으셨나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칠야의 연회, 정각에 도착하세요. 후, 아니다, 일찍 오세요. 적어도 반 시진. 그때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내 탓은 하지 말고요. 내가 소저를 살려주면 난 우리 칠야 손에 죽어요. 갑니다. 여기 열 냥, 저기 뚱뚱한 시녀 애 약 사주고 놀란 가슴 달래줘요.”
위봉낭이 은표 몇 장을 꺼내서 아라 손에 찔러주고 돌아서서 아래로 내려갔다. 갈 곳이 아직 남아서 서둘러야 했다.
아래층, 마침 펼쳐둔 비단 천막 위로 떨어진 다다는 은남색 비단을 두르고 숨도 쉬지 못하고 훌쩍이고 있었다.
다다가 아직 살아있는 걸 본 아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혜녕 사태는 연달아 사나흘 복안 장공주에게 법화경을 강독하러 갔고, 이동도 그때마다 따라갔다.
이날은 화창하게 맑은 날이었다. 두 사람이 보림암 입구에서 마차에서 내려서 막 암자 안으로 들어가는데 적명 사태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이동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혜녕 사태를 붙잡아 가까이 끌었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조 노부인이 곧 올 건데, 왜 오셨습니까.”
목소리를 낮췄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암자라 이동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혜녕 사태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장공주가 특별히 당부해서…….”
“조 노부인이 곧 당도합니다! 그분은 우리 같은…… 비구니를 제일 싫어해요. 사저가 장공주에게 불법을 이야기하는 걸 봤다가는…….”
적명 사태는 초조하게 혜녕 사태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린 비구니가 달려나와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혜녕 사태! 오셨습니까! 장공주께서 어서 모시고 오래요!”
“내가 혜녕 사태에게 부적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장공주께 전해주세요. 급한 거라고. 설법은 이따 가서 해드린다고 말씀드려주세요.”
적명 사태는 혜녕 사태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은 채 이동에게 말했다.
이동은 아까 적명 사태가 한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녹매를 데리고 어린 비구니를 따라 복안 장공주의 작은 별원으로 향했다.
조 노부인이라면, 수국공부의 노부인인가? 주 귀비의 모친, 주 태후의 손아래 동서? 그녀가 무슨 일로 온 거지? 복안 장공주를 만나러? 적명 사태는 왜 혜녕 사태를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그럼 나는? 내가 있는 걸 조 노부인이 봐도 괜찮은 걸까?
복안 장공주의 마당에도 천붕이 처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이동은 마당 중앙 허공에 걸친 천붕 꼭대기를 바라봤다. 넓고 텅 빈 마당이라, 바람이 세게 불고 큰비가 내리면 이런 가는 그물로는 버티지 못한다. 1년에 적어도 서너 번은 새로 바꿔야 할 텐데, 황가 공주가 설사 출가했다고 해도 그렇게 고달프게 지내진 않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