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묻다 二
“여기엔 무슨 일로 왔나요?”
이동은 강환장의 분노한 물음을 상대하지 않고 되물었다.
“여기? 여기가 어딘데? 감히 이런 식으로 말을 해? 여긴 내…….”
강환장은 하려던 말을 다급히 삼켰다. 이곳은, 지금은 강가 별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아직 수녕왕부의 재산이 아니었다.
이동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이자는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못했어. 자기가 예전의 자기인 줄 알고, 내가 예전의 나인 줄만 알지.
“그래! 그래! 아주 좋아!”
강환장은 뒤로 물러나고 또 물러나고, 화청의 기둥에 기대고 손으로 짚었다. 숨을 고르며 분노와 조바심을 억누르고 다시 심호흡한 다음에 드디어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는 죽어라 이동을 노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보시오, 나 강환장, 우리 강가가 뭘 잘못했소? 미안한 일을 하나라도 했냔 말이오!”
이동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이렇게 묻는데 무슨 말을 더할까? 전생에도 현생에도,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지? 그렇지? 우리 강가, 나 강환장, 당신에게 미안한 일이 하나도 없소. 말해 보시오, 이렇게 날 속이고, 괴롭히고, 우리 강가를 해치고, 왜지? 그것만 묻겠소. 왜지?”
이동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혼인한 건, 당신이 내게 베푼 은혜고, 나 같은 상인 여식이 당신과 혼인한 건 당신의 굴욕이고 나의 영광이죠?”
강환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동을 노려봤다. 그게 아니면?
“예전에 당신과 혼인하기 전엔, 우리가 엇비슷한 집안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백부 공자, 세도가 귀족이지만, 당신네 강가는 가난해서 선조의 저택도 없었잖아요. 그렇죠? 나는 상인 여식이지만, 수녕백부를 우리 어머니가 되찾아서 당신들이 살고 있어요. 당신네 강가의 점포, 장원, 모두 우리 어머니가 되찾아서 당신들에게 주었어요. 지금 당신들이 쓰는 것, 종이 한 장, 풀 하나, 모두 우리 이가의 돈이에요. 그래서 난, 나와 당신이 걸맞다고 생각했어요.”
이동은 편안하고 태연했다. 전에는 그를 연모하기에 자신을 굽히고 굽혔다. 그때는 은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항상 자기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강환장은 얼굴이 시퍼레져서 이동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동이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당신이 강을 건너기도 전에 다리를 부술 줄은 몰랐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철이 없어서 만만한 건가요, 아니면 스스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가요?”
“우리 강가는…… 그래, 한때 궁핍했었소. 하지만 이제 내가…….”
이동은 강환장의 말을 잘랐다.
“그래요. 당신은 인간 세상의 용봉처럼 뛰어난 사람이죠. 당신이 있으니 강가의 어려움은 지나갔어요. 앞으로 당신은 탄탄대로가 펼쳐지겠죠. 강가의 어려운 시절이 다 지났으니, 나 같은 상인 여식도 쓸모없는 물건이 됐겠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알아요. 보세요, 그래서 강가에서 나가 줬잖아요. 그래도 부족하면, 휴처하든 화리하든 당신 마음대로 해요.”
이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온갖 수단을 써서…….”
“당신은 항상 날 그런 식으로 말하죠…….”
이동은 멈칫했다. 예전 이야기는 하면 안 돼!
“내가 무슨 수단을 썼다는 거죠? 하나하나 다 말해 봐요. 내가 강가 누구를 해쳤죠? 이름을 말해 봐요.”
“고씨!”
강환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분노한 듯 바라봤다.
“고씨를 해치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 있소?”
“멀쩡히 당신과 행복하게 지내잖아요? 첩이 되어 저택으로 들어오는 게, 고 이낭의 가장 큰 바람 아니었나요? 고 이낭을 첩으로 들이는 게 당신의 가장 큰 바람 아니었나요? 내가 뭘 해쳤다는 거죠? 떠들썩하게 저택으로 들어와서 당신과 은애하며 지내잖아요. 내가 뭘 해쳤죠? 아픈가요? 다쳤나요?”
고 이낭이 평생 화려하고 부귀하게 지낸 걸 떠올린 이동은 정말로 그녀를 해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고씨와 청매죽마고, 고씨 같은 서생 가문 여식이야말로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어진 아내죠. 안타깝게도 고가가 너무 가난하고, 당신네 강가는 저택도 저당 잡혀서 어쩔 수 없이 나와 혼인했죠. 그러니까 지금이 딱 좋은 거 아닌가요? 내가 드디어 주제를 알고 성 밖으로 물러났어요. 고씨를 아내로 여기고 앞으로 강가 안주인을 맡길 수 있게 되었잖아요. 앞으로 명분을 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죠. 당당하게 당신 곁에 서서 고 부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가장 바라는 일 아닌가요?”
강환장은 이동의 말에서 또 다른 사실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날 감시한 거요? 날 몰래 지켜본 거요?”
“당신 저택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걸 감시라고 생각한다면……. 수련!”
이동이 화청 밖에 서 있는 수련을 부르자, 수련이 후다닥 달려왔다.
“만 어멈에게 가서 전해. 내 배가 종복 중에 수녕백부에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다 불러오라고 해. 아무도 수녕백부에 남아 있지 말라고 해.”
이동이 분부하자, 수련은 무심결에 강환장을 힐끔 보고는 나가서 시녀를 불러 말을 전한 다음 자기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화청 앞을 지키고 섰다.
“고씨가 조금 뛰어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용납하지 못하다니.”
어째서인지 몰라도, 강환장은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는 이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동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건 고씨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난 혼인을 잘못했고, 당신도 잘못했죠. 서로 잘못된 걸 알았으니, 예전 일을 돌이킬 순 없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못된 상태로 지낼 순 없죠. 앞으로 고씨랑 잘 살아요.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이동이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자, 강환장이 싸늘하게 그녀를 불렀다.
“잠깐! 문 이야는 어떻게 된 일이오?”
그녀를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어서 오늘 찾아온 목적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이동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문 이야라. 문 이야가 어떻게 된 건지는 그 사람에게 물어야죠.”
“양고기 한 끼로? 웃기는 소리! 경고하는데, 날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강환장이 싸늘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이동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생긋 웃어주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강환장은 뒷걸음질 쳐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다니! 이씨가 이렇게 나오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지금 저 사람이, 이씨인가?
강환장은 화청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이동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건 이씨가 아니다. 이씨가 이런 식으로 내게 말할 리가 없어. 눈빛 하나에 벌벌 떨던 사람 아닌가. 어떻게 감히 나를 거역해?
저건 누구지?
화청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멀리서 한참 동안 지켜보던 장 태태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아무 일 없었지? 무엇 때문에 왔다고 하더냐?”
“난 괜찮아요.”
이동은 장 태태의 팔짱을 끼었다.
“죄를 물으러 왔더라고요. 내가 수단을 부려 고 이낭을 괴롭혔다고 질타했어요.”
담담한 이동의 말에 만 어멈이 혀를 찼다.
“쯧! 정말로 오통신이 씌었네. 고 이낭이 어떤 물건인지, 아직도 알아보지 못했나? 낭자가 고 이낭을 괴롭혀요? 고가 천것을 하늘 높이 떠받드는데, 낭자가 어떻게 괴롭힌다고! 대체 누가 누굴 괴롭히는데! 하늘이 있답니까, 없답니까!”
“저 사람이 문 이야한테 갔었어?”
이동이 만 어멈에게 물었다.
“예. 낭자가 안 계신다는 걸 듣자마자 대야를 묻더라고요. 대야도 안 계신다고 하니까, 마구 휘젓고 다니면서 문 이야를 찾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 이야에게 갔죠. 피해 있을 건지, 아니면 만나볼 건지 물었더니 만나보자고 하더라고요.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 데리고 갔죠. 겨우 일각 정도 이야기했어요. 환가아와 서가아가 줄곧 곁에 있었고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환가아에게 물었더니, 환가아 말이…….”
만 어멈이 잠시 멈칫하다가 조금 머쓱한 듯이 말했다.
“누가 물어보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다 이야기하라고, 문 이야가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보기 드문 똑똑한 사람이군.”
장 태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환가아 그러는데, 세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뜸 묻더래요. 누가 불러서 온 거냐고요. 어쩌다가 우리 대야 곁에 있게 됐냐고요. 문 이야가, 인연이라고 대답했대요. 밖에서 양고기 냄새를 맡고, 들어와서 양고기 얻어먹으면서 대야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고요. 원래 어디든 잘 적응하고 만족하는 성격이라 그냥 남기로 했다고요.”
이동은 내심 안도했다. 문 이야가 그렇게 말한 걸 보면 오라버니를 따를 생각이 확고하단 뜻이었다. 너무 잘된 일이었다.
“나중에 세자가 문 이야를 수녕백부로 모시고 가려고 했대요. 지금 이미 진왕 문하에 들어갔고, 임무도 받았다나 뭐라나 하면서, 앞으로 분명 장래가 밝을 거라고요. 자기랑 문 이야야말로 진정한 주인과 객이라고 했대요! 아이고. 태태,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죠? 우리 저택에 와서 우리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당당하게요! 얼마나 뻔뻔하면 이럴 수가 있지요? 우리 이가엔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거야 뭐야!”
만 어멈은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 사람 눈엔 그렇지. 이가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이가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문 이야를 모시러 온 건, 이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자기 것을 찾으러 온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온 이가가 다 자기 것이니까.”
이동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무슨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가!”
만 어멈은 기가 차서 손뼉을 짝짝 쳤다.
장 태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 어멈은 화만 내지만, 그녀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동동과 혼인했으니, 이가가 강환장의 것이 된 거야…….
“문 이야가 우리 대야와 성격도 맞고 말도 잘 통하는 데다가 우리 주방에서 만드는 음식이 좋다고. 그 두 가지만으로도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다고 했대요. 또 세자는 크게 될 인물인데, 자기는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이라 세자 같은 큰 인물을 보좌할 수 없으니까 마음 접으라고 했대요.”
한바탕 화를 낸 만 어멈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환가아가 그러는데, 세자가 포기하지 않은 것 같대요. 이야가 더는 상대하지 않는데도 눌어붙어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야가 더 듣기 싫은 듯이 할 일이 있다고 돌려보냈대요. 아이고!”
만 어멈은 오늘 적잖게 충격받은 듯했다.
“낭자, 세자가 어떤 모습인지 못 보셔서 그래요. 들어오자마자 자기 집인 것처럼 굴더라고요. 낭자가 등화원에 묵으신다고 하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곧장 거기로 가더라니까요. 들어오자마자, 태태는 집에 계신다고 했는데도 태태를 뵙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안부도 묻지 않고 곧장 등화원으로 달려가더니, 낭자가 안 계시니까 대야는 어디에 있냐고 묻지 뭡니까. 대야를 만나겠다고요. 우리 대야가 왜요? 미쳤어요, 진짜! 대야가 성에 문회가 있어서 갔다고 하니까, 얼마나 비웃는지. 그 꼴이…….”
만 어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로 오통신이 씌었다니까요! 그러고는 문 이야를 만나겠다고 갔다가 문 이야 거처에서 나와서는 곧바로 화청으로 가더라고요. 화청에 들어가서는 차 달라 물 달라, 미친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