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묻다 一
“자네 어머니, 대단한 사람이야. 감탄해.”
잠시 후, 정자에서 나가서 높은 곳으로 한참 걷다가 장공주가 별안간 한마디 했다. 생각이 많은 듯한 말이었다.
“예.”
이동은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간단히 대답했다. 장공주 앞에서 최대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경성에서 자랐나?”
보림암 뒷산 정상에 오른 다음, 장공주는 뒷짐 진 채 거만하게 아래를 살폈다. 그렇다.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살피는 눈빛이었다.
“그런 셈입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경성으로 왔거든요.”
이동은 장공주 뒤에 살짝 떨어진 채 뒷짐 지고 서 있는 장공주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오랜 시간 수행한 사람 같지 않았다.
“경성은 복 받은 곳이지. 성 안팎에 경치 좋은 곳도 많고. 의식주행, 불편한 것이 하나 없고.”
복안 장공주가 멀리 경성을 내다봤다.
“예, 있을 건 다 있죠. 1년 내내, 매일매일 명절 같아요. 매일매일 떠들썩한 구경거리가 있고요.”
하지만 그녀는 명절도 싫고 매일매일 떠들썩한 명절 같은 건 더 싫었다. 명절마다 그녀는 팽이처럼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매일매일 떠들썩한 구경거리가 있다고? 전에 자주 나가서 놀았나?”
복안 장공주는 항상 색다른 면에 관심을 갖는 모양이었다.
“예. 어머니는 그런 쪽으로 단속하지 않으셨어요. 낭자 시절에 잘 놀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혼인하고 나면, 놀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다고요.”
“어릴 때 나도 자주 궁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녔지. 한번은 서와자(西瓦子: 와자, 유흥가)에서 발로 긴 막대를 잡고서 고개를 숙인 채 탕에 만 밥을 먹는 걸 본 적도 있어. 큰 그릇에 담긴 밥을 탕까지 싹 비우더군. 앉아서 먹은 것보다 더 편안하게 먹지 뭐야?”
복안 장공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걸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그땐 너무 좋은 일거리라고 생각했지. 신나게 먹을 것도 먹고, 돈도 벌잖아. 그땐 장난을 많이 칠 때라, 궁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을 흉내 냈지. 침상 가장자리에 거꾸로 매달려서 차를 마셨어. 결국 목에 걸리고 말았지만.”
“장삼이 물구나무서서 냉도(冷淘: 녹말가루로 경단을 만들어 식힌 것)를 먹는 것 말씀이시군요. 저도 아주 어릴 때 두어 번 봤어요. 장삼의 아들이 했죠.”
이동은 너무 옛날이라 이미 퇴색해 버린 그 기억을 떠올렸다.
“부자가 전수한 기예였군. 지금도 서와자에서 그렇게 돈을 버나?”
“예전에 없어졌어요.”
이동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장삼 아들이 묘기를 보이다가 냉도가 목에 걸려서 폐에 들어갔거든요. 반년 넘게 앓다가 죽었어요. 경성에는 이제 그걸 하는 사람이 없고요.”
복안 장공주는 잠시 멍해졌다.
“사람이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지.”
“지금은 서와자 동쪽으로 네댓 묘 정도 넓혀서 건물 몇 개를 지었어요. 그중 두 건물은 소창(小唱)을 전문적으로 해요. 호선무(胡旋舞: 당나라 때 성행한, 서역에서 전해 온 민간 무용)를 전문으로 하는 건물도 있고요. 상복(相扑: 씨름), 규과자(叫果子) 같은 잡기는 지금은 대부분 금명지 일대에서 해요.”
이동이 화제를 바꿨다.
“소창이 흥한 것도 고작 20여 년 정도지. 호선무는…….”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희미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동은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다. 소창은 주 태후가 좋아해서 최근 20년 전쯤부터 경성에게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호선무는 주 귀비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출 줄도 알고 제법 잘 춘다고 들었다.
복안 장공주의 말은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번루에 가 본 적 있나?”
장공주가 돌아보며 묻는 말에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갑니다. 그 집 입로양(入爐羊: 양전골), 자백토(煮白兔: 토끼찜), 채병(菜餠), 그리고 동피면(桐皮麵)이라는 게 있는데 경성에서 최고랍니다.”
“인연 때문에 간 게 아니라 먹는 것 때문에 간 거였군?”
복안 장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희 집안과 번루 동가 탕(湯)씨 가문이 가볍게 왕래하는 사이라서 소내내(少奶奶: 소야의 아내)를 만난 적 있어요. 송씨인데, 제가 만났을 땐 쉰 정도였어요. 삐쩍 마르고 나이 든 사람이 염주를 들고 있었죠. 어머니 말이 그분이 참 속 태우며 산다고 했어요.”
“속을 태워? 왜지?”
“소내내 친정이 향수가(香水街) 뒷골목에 있었는데, 형편은 평범했어요. 탕씨 가문은 산서(山西) 사람이고, 복융 전장에 그 집안도 돈을 댔어요. 소금 판매 허가도 받아서 소금 점포도 많았고, 남쪽엔 차밭도 잔뜩 있었죠. 관외로 나가는 차는 거의 탕가 거예요. 장공주께서 아까 드신 용산 백차도 탕가 차밭에서 나온 거죠. 부자일 뿐이 아니라, 탕씨 일족에 거인, 진사도 많았어요. 탕씨 일족의 학당은 산서에서 매우 유명했죠. 조정에 강서가 본적인 관리 중에 탕씨 가족 학당에서 글공부한 사람이 많답니다.
하지만 송씨는 환경이 그래서 글공부한 적도 없고 글도 몰랐대요. 그런 사람이 그런 집안과 혼인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요.”
복안 장공주는 매우 집중해서 들었다.
“송씨가 자리 잡고 쉰까지 산 것만 해도 쉽지 않았겠네.”
“네.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탕 오야……, 송씨의 지아비예요. 탕 오야는 지극히 단순하고 성격이 충동적인데 성질은 있고 능력은 없었대요. 여인은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고 자부하면서 밖에서 애틋한 미인을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책임지려고 했다네요. 집안에 첩이 가득하고, 별별 사람이 다 있었대요. 아이 달린 홀어미까지 집에 들여 애틋하게 돌봤다네요. 외실도 줄을 지었고요. 다행히 송씨의 운이 나쁘지 않아서, 혼인한 지 3년 안에 아들 둘을 낳았어요. 자식이 딱 아들 둘뿐인데, 그중 아들 하나는 거인이 되었고요. 번루에 먹으러 가는 건 몰라도, 인연을 찾는다라……. 그건 아니에요.”
이동이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려함 뒤에 엉망진창인 실제 모습이 있는 법이지. 탕가가 장사는 잘하는 모양이네.”
“네. 탕가 노태야가…….”
이동은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의 노태야는 그녀가 예전에 교류하며 손잡았었던 노태야가 아니었다.
“탕가 가주는 자식에게 넘기는 게 아니라, 직계의 같은 대에서 골라요. 직계 사내는 일정 나이가 되면 문중 사업을 고를 수 있어요. 아니면 장사 밑천을 받던가요. 각자 능력에 따라 골라요. 가주를 고를 땐, 장로 스무 명과 족장이 한 표씩 던지고 3분의 2를 넘으면 가주가 되고요.”
“참 많은 걸 아는구나.”
복안 장공주는 의미 모를 눈빛으로 이동을 바라봤다.
“다 같은 장사꾼이니까요. 게다가 비밀도 아니고요.”
이동은 문득 자기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린애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각했다. 어머니와 있을 땐 괜찮은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한창 청춘인 열몇 살 소녀처럼 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몇십 년 살아온 사람이라, 청춘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나이에 그런 마음 씀씀이라니, 흔하지 않군.”
복안 장공주는 이동을 위아래로 살폈다.
“다만 너무 나이 들어 보여서 그렇지. 가자, 혜녕 사태도 책을 다 봤겠네. 앞으로 시간 나면 자주 와. 이야기나 나누자고.”
“예.”
복안 장공주가 돌아서서 산에서 내려갔다. 이동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복안 장공주와 친분을 맺어 보려 했던 건 맞았다. 하지만 쌀쌀맞은 말투에 그 생각은 이미 접었다. 가까워지기 쉬운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그저 탕가 이야기를 좀 해서?
장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보림암으로 돌아갔더니, 혜녕 사태가 법화경 한 권을 다 정리해 둔 상태였다. 세 사람은 회랑에 앉아, 한 사람은 강독하고 두 사람은 듣고, 그렇게 반 시진이 흐른 후 복안 장공주는 혜녕 사태가 잠시 쉬도록 녹운을 불러 차를 우리게 했다.
일어서던 이동은 수련이 눈짓하는 걸 보고 서둘러 나갔다. 꽃 틀 아래에서 수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만 어멈이 사람을 보냈어요. 세자가 산장에 오셨대요. 물어볼 게 있다고요. 낭자는 암자에 불경을 들으러 갔다고, 한참 걸릴 거라서 저녁에나 돌아온다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말씀드렸대요. 그런데 세자가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고, 답을 듣고 갈 거라고 하셨대요.”
이동은 가슴이 철렁했다. 뭘 물으려고? 예전 일? 아니면 지금 일?
그녀는 회랑 아래 앉아 차를 마시는 혜녕 사태를 바라봤다.
“저녁에나 돌아갈 거라고 만 어멈이 이미 말했다며. 강독이 아직 조금 더 걸려. 돌아가면 저녁쯤일 거야.”
“낭자, 그러지 말고…… 어찌 됐든 부부잖아요. 세자가 오셨는데 낭자가…….”
수련이 ‘고집을 부리면 좋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이동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온 거 아니야. 게다가 설사 정말로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온 거라고 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좋은 쪽으로 생각할 것 없어. 그런 생각은 모두 망상이야.”
“네.”
수련은 한참 만에 슬픈 듯이 작게 대답했다.
혜녕 사태의 강독은 점심이 지나서야 끝났다. 복안 장공주는 별원으로 돌아가서 쉬었고, 이동과 혜녕 사태는 보림암에서 사찰 밥을 먹었다. 사태가 좌선할 때 이동은 잠시 눈을 붙였다가 보림암에서 나왔다. 사태를 영수암까지 바래다주고, 거기서 차를 마치면서 잠시 이야기하다가 자등 산장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찬란하게 빛났다.
강환장도 자기가 정말로 종일 기다릴 줄 몰랐다. 화청에 앉아서 꼬박 하루를 기다리다니.
화청, 화청 주변, 이곳 종복들, 이 산장, 모두 그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곳이었다.
이 산장이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번 왔었으니까. 산장 입구엔 자등 덩굴이 없었지만, 이곳 화청은…… 그대로였다. 고씨가 이 화청을 매우 좋아했다. 배산임수인 좋은 경치라고, 나이 들어도 여기에 나른하게 앉아 있을 거라고 종종 말했었다.
이곳에 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수녕왕부로,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금상첨화의 나날로.
이동이 화청 문 앞에 섰을 때, 강환장은 찻잔을 쥐고 호수 가득한 푸른 연잎과 연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이 문틀을 톡톡 치자, 강환장은 진저리를 쳤다. 찻물이 쏟아져서 손을 적시자, 옆에 서 있던 문죽이 허둥지둥 다가가 찻잔을 받고 손 닦을 손수건을 건넸다.
“다들 물러가.”
“돌아오긴 했군!”
원래 기분이 매우 좋았던 강환장은 종일 기다려서인지, 조금 전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아마도 이동을 만나서겠지만, 기분이 나빠지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동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내가 왔다고 전하지 않았나?”
“했어요.”
이동은 살짝 걸음을 떼서 화청 입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강환장은 이동의 대답에 얼떨떨해졌다. 말을 왜 하다가 마는 것이며, 어째서 알고도 바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면, 당신이 온 거 안다고요. 알고 있었다고요.”
이동은 낯선 사람을 보듯 강환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의 그는 확실히 낯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눈빛이 혼탁한 것이 온몸에 암울한 기운이 넘쳤다. 예전엔 대체 왜 이런 사람에게 반한 걸까.
“알면서 어째서 바로 돌아오지 않은 거지? 감히 나를 꼬박 하루를 기다리게 해?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강환장은 이동의 시선에 지극히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치미는 분노가 그 묘한 느낌을 금세 덮었다. 반항하는 것인가? 내가 온 걸 알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굴어? 어떻게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할 수 있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