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89화 (89/463)

89화: 수행하는 공주

“아, 맞아요. 아침에 주방에 생선 있길래 점심때 수어탕 끓이라고 말했어요. 고기 요리는 그거 한 가지고요. 나머지는 담백하게 하라고 했어요. 밥은 됐고, 만두 쪄서 오라고 했어요. 오후 차는 자등 화병을 만들어서 보내라고 했고요. 두어 번 더 만들어 먹으면 자등화도 지겠어요.”

녹운은 재빨리 화제를 바꿔서 즐거운 말투로 뭘 만들어서 먹을지 이야기했다.

장공주는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녹운이 주절주절 먹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자, 보림암이 보였다.

보림암 앞에 마차 두 대가 보였다. 복안 장공주는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린 채 마차를 바라봤다.

뒤쪽 마차에서 시녀 둘이 뛰어내리더니 앞쪽 마차로 다가가서 휘장을 젖혔다. 이동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돌아서서 나이 든 비구니를 부축해서 내렸다.

“영수암의 혜녕 사태예요. 응? 저 사람, 이씨 아닌가요? 혜녕 사태가 왜 저분을 데리고 왔지? 가서 알아볼까요?”

녹운이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장공주는 대답하지 않다가, 두 사람이 보림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천천히 대답했다.

“벌써 왔는데 뭘 알아봐? 가자. 어떤 사람인지 마침 궁금했어.”

복안 장공주는 녹운을 데리고 측문을 통해 보림암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전용 거처로 들어갔다.

거처 문 앞에 적명 사태가 서 있었다. 적명은 유난히 상쾌해 보이는 모습으로 양손을 합장하며 복안 장공주를 맞이했다.

“공주, 오늘 혈색이 좋으십니다.”

“음. 혜녕 사태가 왔던데? 무슨 일로 온 건가?”

“음? 전에 법화경을 듣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적명 사태는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법화경은 경성 일대에서 혜녕 사저가 가장 정통했습니다. 혜녕 사저를 모셔서 법화경을 설법해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그렇네. 생각났어.”

복안 장공주는 금세 그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했었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침 수업이 끝나면 혜녕 사태를 모시고 오게.”

복안 장공주는 적명 사태를 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는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적명 사태는 문밖에 서서 장공주가 영벽 역할을 하는 석가산 뒤로 돌아가는 걸 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돌아섰다.

요즘 내내 불안했다.

하지만, 상대는 주씨 가문 아닌가. 귀비, 미래의 태후. 내가 뭘 어쩌겠나. 감히 뭘 어쩌겠냐고. 공주는 속 깊은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걸 이해해 주시겠지.

이동은 혜녕 사태를 따라 보림암으로 들어갔다. 대웅보전 안에 보림암 비구니들이 모두 아침 수업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정림이 마중 나와 대웅보전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사태가 곧 오실 겁니다. 혜녕 사태와 이 시주, 두 분 먼저 수업하라십니다.”

대전으로 들어가서 이동이 막 혜녕 사태 옆에 놓인 방석에 무릎을 꿇자마자 적명 사태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혜녕 사태를 향해 합장하고 예를 갖춘 다음 곧장 불전으로 가서 경추(磬錐: 부처 앞에 절할 때 흔드는 종을 치는 막대)를 들고 종을 울리자 목탁 소리가 따라 울렸다. 절 안에 독경 소리가 유유히 퍼지고 아침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동은 주변의 기척을 살그머니 살폈다. 들어올 때 이미 한 번 둘러봤는데 복안 장공주는 대전 안에 없었다. 지금도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복안 장공주는 매일 수행하며 기거한다더니, 보림암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게 아니었나?

어제 영수암에서 경독을 들을 때, 혜녕 사태가 오늘 복안 장공주에게 법화경을 설법한다는 걸 들었다. 마음이 동해서 혜녕 사태에게 부탁해서 오늘 따라온 것이었다.

금을 삼키고 자진한 사람을 한 번 본 적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복안 장공주가 바로 금을 삼키고 자진했다고 들었다. 태생부터 운이 좋았고 평생 영화를 누리던 공주가, 무엇 때문에 자진했을까. 양 태후가 몰래 준비한 혼인 하나 때문에?

십여 년 동안 밤마다 그녀를 괴롭힌 고통, 그리고 임종 전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느낀 후회. 혼인하기 전에 그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 역시 금을 한 상자 삼키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침 수업이 금세 끝났다. 적명 사태는 우선 정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복안 장공주가 부르길 기다리자고 열정적으로 혜녕 사태와 이동에게 인사했다.

대전을 막 나서는데, 맞은편에 어린 비구니가 다가와 복안 장공주의 말을 전했다. 혜녕 사태와 같이 온 시주를 함께 모셔오라고 했다는 말에 이동은 의외로 생각했다. 복안 장공주가 자신까지 부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서둘러 혜녕 사태 뒤를 따라서 어린 비구니를 쫓아 암자 뒤로 향했다. 적명 사태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복안 장공주가 세운 규칙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동은 자등이 드리워진 석가산을 도는 순간, 눈앞에 탁 트인 광경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마당 좌우에 느릅나무로 지어진 꽃 틀이 초수(抄手) 회랑 역할을 대신했고, 길고 긴 꽃 틀에 생기 가득한 장미가 가득했다. 지금 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라서 활짝 피진 않았고, 푸른 잎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일찍 핀 분홍과 붉은 작은 꽃봉오리가 유난히 청아했다.

(※초수 회랑: 수화문을 들어서서 좌우 상방을 따라 정방까지 이어진 회랑. 양손으로 껴안은 모습에서 온 이름이다.)

정면의 본채는 다른 본채보다 배는 넓은데, 그 반으로 아주 넓은 전랑(前廊: 건물 앞에 놓인 지붕 달린 회랑)을 만들었고, 회랑 정중앙에는 나지막한 나한상이 놓여 있었다. 동쪽에 놓인 긴 탁자엔 서책이 쌓여 있고, 서쪽엔 찻주전자가 놓인 찻상이 있었다. 비어 있는 곳엔 갖가지 난초가 들쭉날쭉 운치 있게 놓여 있었다.

복안 장공주는 찻상에 앉아서 느긋하게 차를 갈고 있었다.

“장공주를 뵙습니다.”

혜녕 사태는 전랑으로 들어가서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동은 혜녕과 살짝 떨어진 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곳은 속세를 떠난 곳이라 속세의 예를 갖출 것 없네. 자네도 앉아.”

복안 장공주는 혜녕 사태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에 이동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은 그래도 대례를 갖춘 다음 일어서서 혜녕 사태 옆 의자에 앉았다.

“궁에서 나온 상궁에게 예의를 배웠나?”

장공주는 잔 세 개를 꺼내서 갈아놓은 찻가루를 은수저로 떠서 넣으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이동은 순간 철렁했다.

소홀했다!

전에 진왕이 태자가 된 후로 자주 궁에 출입해서 궁의 예법을 뼛속까지 숙지했었다. 지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니 바로 드러난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이동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해명할 방법이 없으니 해명하지 못할 수밖에.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배운 게 궁중 예법이라는 소리를 세 번째 들었습니다.”

“아.”

복안 장공주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며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그녀의 시선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마주했다.

“그렇구나. 재미있네.”

복안 장공주는 느릿느릿 말하고는 다른 말 없이 찻가루를 나누고는 작은 은주전자를 들어 차 석 잔을 내렸다. 가장 먼저 혜녕 사태에게 밀어주고, 자기 잔을 들어 올린 다음 이동에겐 가지고 가라고 눈짓했다.

세 사람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혜녕 사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혜녕 사태는 승려는 과묵해야 한다는 법도를 따지는 사람으로, 눈빛으로 할 수 있는 말은 기본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가 동쪽에 있는 긴 서안을 눈짓했다.

“법화경을 여러 번 봤네. 가지고 있는 것도 몇 권 있고. 책마다 내용이 다르더군. 사태, 일단 이것부터 읽어 보게. 내용이 다른 걸 보면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겠지. 일단 진위부터 가리고 강독하고 배워야겠지. 이래야 진리 아니겠나, 그렇지, 사태?”

“지극히 옳습니다.”

혜녕 사태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먼저 읽어봐 주게. 자네는 나와 좀 걷지.”

복안 장공주가 일어서자 이동도 서둘러 일어서 뒤를 따랐다. 본채 옆의 보병문을 지나서 작은 화원을 빠져나가면 보림암의 뒷산이었다.

“어떻게 혜녕 사태와 함께 올 생각을 한 거지?”

보림암을 나가자, 복안 장공주가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이동은 순간 얼떨떨해졌다.

정말 단도직입적이시구나!

“혜녕 사태는 법화경에 조예가 깊으신 분인데, 과묵함을 추구하시지요. 장공주께 강독해 주신다기에, 귀한 기회여서 사태께 부탁드려 따라왔습니다.”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깃 바라봤다.

“아, 자네 어머니가 선행을 좋아해서 적선을 베푼다지. 영수암도 절반은 이가가 세운 것 아닌가? 법화경을 듣고 싶은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혜녕 사태는 오랫동안 수련에 집중하셨습니다. 이런 속세 일은 몇 년 전부터 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저는 신도지만 귀의하지 않았고, 불법에 큰 공을 들인 적도 없습니다. 법화경을 듣고 싶은 것도 그저 궁금해서이고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어요. 들어도 잘 모를 수도 있고요. 오늘 같은 기회가 아니었다면, 혜녕 사태를 번거롭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이동은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 장공주는 예리한 데다가 성격이 가차 없었다. 가냘프고 나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성격이라 꽤 의외였다.

잠시 후, 복안 장공주가 겨우 입을 열었다.

“본분을 잘 지키는구나.”

이동은 내심 안도했다. 좋은 말이니까.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친정으로 돌아온 거지?”

두 사람이 말없이 몇 걸음 걷다가, 복안 장공주가 먼저 물었다. 이동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쌀쌀맞네.

아니면, 나한테만 이렇게 쌀쌀맞은 걸까?

“넘어져서 이마를 다쳤는데, 머리에 충격을 입었습니다. 반드시 정양해야 한다고, 의원이 그러더군요. 불법, 경문을 들으면 더 좋다고요. 강가의 성 밖 다른 장원은 멀기도 멀고, 긴 세월 황폐해서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친정 장원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매일 영수암에 가서 아침, 저녁 수업을 들었더니 한결 나은 것 같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옆에 있는 정자로 돌아 들어가서 고개를 돌리고 이동을 바라봤다. 그렇게 삐딱하게 한참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말했다.

“헛소리.”

이동은 깜짝 놀라서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내가 자넬 수소문했다는 것, 자네도 알아냈을 텐데?”

복안 장공주는 반 바퀴 돌아서 이동을 마주 봤다. 이동은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수소문했다는 걸 알면서,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이동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쩌겠어요?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복안 장공주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수완이 없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첩이 분수를 모르는 정도의 작은 일인데, 깔끔하게 해결하면 그만 아닌가? 자네처럼 피하기만 하면, 잠시는 피할 수 있어도 평생 피할 수 있나?”

이동은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바라봤다. 전엔 깔끔하게 해결했었지.

“아무리 잘 해결하면 무얼 하겠어요. 밝은 달이 도랑을 비추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동이 나지막이 대답하는 말에 장공주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이동의 시선을 따라 저 멀리 햇살 아래 빛나는 푸른 숲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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