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과거는 지나갔다
“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
강환장은 침상 가장자리를 부여잡은 고 이낭의 손을 잡았다. 고여 있던 고 이낭의 눈물이 톡 떨어졌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젯밤에 정말로 의원을 불렀어요. 여러 번 불렀는데, 오지 않았어요. 오 어멈이 그랬어요. 우리 가문에선 황 의원을 부른다고, 호 의원하고 조 의원을 못 부르게 했어요. 대내내 친정에서나 부를 수 있는 의원이라고요. 오 어멈이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다.”
강환장은 골치가 징징 아파서 눈을 감았다. 심호흡 몇 번 하고 짜증을 가라앉힌 다음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다. 잘 들어라, 너는 안주인이다. 수녕백부의 안주인. 오 어멈은 일개 종복에 불과하다. 오 어멈의 말은, 그래 듣긴 들어야지. 하지만 잘못된 것 같으면 흘려들어라! 너야말로 안주인이다!”
“하지만…….”
고 이낭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안주인이야. 하지만, 오 어멈의 말을 안 듣고 뭘 할 수 있을까?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건데!
“하지만이라고 하지 말아라!”
강환장은 이마가 쿡쿡 쑤셔서 말을 멈췄다.
“잘 들어라. 호 의원과 조 의원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
“응, 응!”
고 이낭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에 대한 그녀의 진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면 불러라!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냐? 이 집안, 이 온 집안 위아래 모두, 중문 안으로 들어온 순간, 나조차도 네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냐? 네 주견이 있어야 한다! 안주인의 주견! 그것이 이치다! 기억해라. 너는 이 집안의 안살림을 맡은 안주인이다! 이 저택, 중문 안에서는 네 말이 법이다. 네가 그들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불렀어야 한다!”
강환장의 목소리가 커지자, 고 이낭은 몹시 서러운 듯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다 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느냐 말이다. 부인이 있고, 후야가 있고, 그리고…… 많은 이가 있어서 그녀의 말은 법이 될 수 없는 것을.
고 이낭은 입을 뻐끔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강환장의 목소리에 이미 짜증이 느껴졌다. 거역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환장은 짜증이 나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지금 그는 고 이낭의 서러움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안주인이면 어떤 의원을 불러야 하는지, 진료비는 대충 얼마인지 알아야 한다. 설사 몰랐더라도, 전엔 몰랐더라도, 의원을 부르기 전에 확인했어야 한다. 어림은 잡았어야 한다! 의원이 오기 전에 진료비를 준비했어야 한다! 안살림을 맡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더냐? 그런데 왜 아직도 은자 몇십 냥도 내놓지 못하는 것이야? 어째서 적은 금액 은자, 은표로 바꿔 놓지 않았지? 평소에 아랫것들에게 상금을 주지 않은 것이냐? 이런 당연한 이치도 몰랐단 말이냐?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냐?”
고 이낭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몹시 서러운 듯 강환장을 바라봤다.
관사 어멈도 아닌데, 이런 걸 어떻게 안다고. 어머니는 평생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모도 이런 일에 관여하는 걸 본 적 없고. 적은 금액 은자를 바꾸는 것도 물론 본 적 없어. 상금을 내려? 누구한테? 집안에 손님도 오지 않는데, 상금을 누구에게 줘?
그러나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강환장의 목소리에 짜증과 분노가 가득했다. 지금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것이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언제나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내가 수녕백부를 너에게 맡기지 않았느냐. 그럼 마음을 써야지! 고가를 신경 써주고 싶어도 조금은 기다려야지!”
“정말로 친정에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옥묵이 잘 지내고 있는지 부탁해서 알아본 것뿐이에요. 정말로 아니에요…….”
이 말은 서둘러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친정에 뭘 보낸 적이 없었다.
“옥묵이 궁금하면 바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면 된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안주인, 안주인이다! 옥묵은 어릴 때부터 네 시중을 들었으니, 옥묵을 데리고 오고 싶으면 당당하고 대범하게 데리고 오면 된다. 부탁하다니? 왜 몰래 한 것이냐?”
강환장은 갈수록 머리가 아팠다. 속은 더 타고,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라와서 마지막엔 거의 고함쳤고, 고 이낭은 겁에 질려 웅크린 채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고가가 몰락했다고 해도 어찌 됐든 서생 가문이다. 너도 글공부를 할 만큼 했고. 그런데 어떻게 시정 아낙네처럼 쌍심지를 켜고 욕을 할 수 있지? 그런 말, 그 더러운 말들을 어찌 입에 올릴 수 있어!”
강환장의 눈앞에 혼자서 두 사람을 상대로 게거품을 물고 쌍심지를 켠 채 욕하던 고 이낭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묘한 분노와 함께 수치심이 몰려와서 가슴이 들끓었다. 그런데 그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추미, 그리고 춘연이 먼저 욕했어요. 나는 아니에요…….”
고 이낭은 무의식적으로 변명부터 했다.
“말하지 않았어! 아직도 몰라? 너는 안주인이다! 수녕백부의 안주인! 욕을 하면 벌을 주면 된다! 벌을 주고, 때리고, 팔아 치우면 된다! 너는 강가의 안주인이다. 어떻게 천박한 그것들과 같이 욕을 할 수가 있어? 대체 왜 몰라? 대체 왜 이렇게…… 모르느냐!”
강환장은 침상을 쿵쿵 내리쳤다. 이마가 욱신거려서 가슴까지 아프고 피도 또 나오는 듯했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알았어요. 정말로 알았어요. 다음엔, 오라버니……. 오라버니, 걱정하지 말아요…….”
고 이낭은 얼굴을 감싸고 소리 내서 울었다.
“오라버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오라버니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내 말을 안 들어요. 내가 뭐라고 해도, 다 못 들은 체해요. 아완과 아녕도 나를 원수 보듯 해요. 아녕은 내가 두 사람의 혼수를 가로챘다고 욕해요. 오라버니, 난 그런 적 없어요. 오라버니가 날 제일 잘 알잖아요.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요. 무슨 말인지, 나도 다 알아요. 하지만 난 대내내가 아니에요. 일개 이낭이, 신분도 없고, 은자도 없고, 아랫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내가 뭘 어떻게 해요. 오라버니, 내가 얼마나 힘든지…… 힘든지……. 오라버니는 몰라요.”
고 이낭은 우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강환장은 넋이 나간 채 그녀를 바라봤다. 집안 전체를 넘겼는데,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했는데. 무얼 하든 뒤에서 지지해주는데, 그런데도 힘 들다니. 무엇이?
아완과 아녕 일도, 상대할 것 없다고 이미 말했다. 상대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는데, 왜 아직도 신경 쓰나.
종복들이 명령을 듣지 않는데 왜 벌을 주지 않나? 상벌을 분명히 하면 말을 안 들을 일이 어디 있다고.
안주인은 덕행으로 사람을 복종시켜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 모든 이가 고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칭찬했다. 온 집안 위아래 모두 고씨를 이씨보다 더 존경했다. 전엔 가능했던 일을 지금은 왜 못하나.
아무것도 없다고 하다니. 전엔…… 전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안은 은자와 아랫사람이 아니라 수완과 덕행으로 다스리는 것이라 했고, 고결한 덕행에 영리한 지혜가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했던 고씨였다. 은자 같은 아도물을 가장 혐오한 고씨였다. 그런데 은자가 없다? 아랫사람이 없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안주인은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야 한다.”
강환장은 한참 만에야 겨우 말을 꺼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말은 고씨가 자주 했던 말이었고, 그도 매우 동의했다. 윗사람이란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야 하는 게 맞다.
“덕으로 사람을 감화해야지, 엄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우리 같은 집안은 너그러움과 의로움으로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 덕행이 우선이다. 백 년 동안 지켜온 이런 자산이 가장 중요하다…….”
강환장은 아득한 가운에 조금 혼란스럽게 말을 이었다. 고씨가 예전에 그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깊이 동의했고, 그래서 기억한다. 아주 똑똑히 기억한다.
고 이낭은 얼이 빠져서 강환장을 바라봤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겠지?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킨다고 해도, 일개 이낭이 무슨 덕이 있어서? 무슨 덕행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이 집안에서 누가 내 덕행에 고개 숙인다고?
황명을 받고 사죄하러 간 영원은 묵 승상이 친히 점지해준 관사도 함께 있어서 순조롭게 수국공부에서 나와 안원후부에 들러서 휙 돌아본 다음에 나왔다.
서둘렀다고 해도 벌써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 시간이었다. 영원은 퍼렇게 멍든 얼굴을 하고 말에 올라서 이미 불이 화려하게 켜진 마행가로 직행했다. 마행가를 한 바퀴 구경한 다음 번루(樊樓: 송나라 때 유명한 주루. 주루의 통칭)에 들어가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말에 올라 가슴을 활짝 펴고 주인 없이 항상 텅 비어 있는 경성 영가 저택으로 유유히 향했다.
사환 몇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위봉낭이 고약을 들고 들어왔다. 영원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약은 됐다. 쓰면 안 돼. 이 얼굴…… 휴, 당분간은 부어있어야 한다.”
거울을 좀 더 높이 들라고 사환에게 손짓하고 얼굴을 삐딱하게 기울여서 거울에 비친 붓고 멍든 한쪽 얼굴을 바라봤다.
위봉낭이 가까이 다가와서 한 번 더 유심히 살펴봤다.
“까진 곳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흉은 남지 않아요. 다만, 약을 안 쓰면 닷새는 더 부어있을 거예요.”
“그럼 약은 내일 저녁에 쓰자.”
영원은 거울을 잠시 더 쳐다보다가 물었다.
“최신은 왔나?”
“벌써 왔어요. 밖에서 기다리는데, 들어오라고 할까요?”
“그래.”
영원은 뒤로 물러나면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춰보고는 거울을 치우라고 손짓했다.
최신은 마흔 남짓한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보통 몸매의 사내였다. 장궤로 보이는 차림으로 사람들 사이에 던져 놓으면 못 찾을 흔한 얼굴이었다.
“칠야!”
안으로 들어온 최신은 바로 무릎을 꿇었고, 그가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기 전에 영원이 성큼 다가가 부축해 일으켰다.
“최숙, 일어나야지! 이렇게 대례를 갖추면 아버지가 보고 나를 때린다고!”
“예는 갖춰야지요. 몇 년 동안 집안사람을 못 만났는데, 이렇게 칠야를 만나니…… 정말이지 너무 기쁩니다!”
최신이 목이 멘 듯 말했다.
“나도 최숙을 만나서 기뻐. 예전에 최숙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통곡했다고! ‘최’자만 들어도 너무 슬퍼서 한동안 듣지도 못했다고!”
은근히 불평이 느껴지는 그 말에 최신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칠야, 정말……. 그때 칠야가 요만했는데……. 어느새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최숙, 앉아, 앉아. 봉낭, 가지고 온 설봉차로 차 한 잔 드려라. 잊지 마, 깻가루 두 숟가락 넣고, 잣도 한 움큼 넣어야 해. 최숙은 우리 고향에서 나는 설봉차를 가장 좋아해.”
영원은 최신을 화항으로 잡아끌면서 위봉낭에게 분부했다.
세세히 분부하는 영원의 모습에 최신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칠야, 소인의 취향까지 다 기억하시는군요……. 소인, 여기가…….”
최신은 가슴이 끓어올랐다. 이런 주군이 있다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영원은 화항에 앉아서 어서 앉으라고 최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최신은 영원이 아무리 말해도 화항 앞 둥근 의자에 살짝 걸터앉기만 했다. 함께 진한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이야기하다가 영원이 본론에 돌입했다.
“두 황자 이야기 좀 해 봐.”
“예!”
최신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대황자는 어릴 때부터 국본 대우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건 칠야도 아시겠지요. 하지만 황상은 사황자를 지극히 총애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자주 곁에 데리고 있었습니다. 묵 승상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사황자에게 정무를 설명해 주었고요. 따지고 보면 사황자 역시 국본으로 자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