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85화 (85/463)

85화: 하나같이 만만하지 않아

오늘 문 이야와 오라버니가 강환장을 만났다. 강환장과 문 이야 사이에 사연이 없는 것 같아서 그 점은 일단 안심해도 된다.

하지만 문 이야가 왜 온 걸까. 그녀가 모시러 가서 온 건 분명 아닐 테다. 어떻게든 확실히 알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문 이야에 관한 일은 첫째 조심해야 하고, 둘째 쉽지 않을 테니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다.

문 이야가 강환장에게 의탁하지 않는 한, 다른 건 크게 문제없을 것이다.

강환장과 오라버니는, 그녀가 상상한 대로였다. 그는 이신을 반평생 미워했다. 이번에도 미워할 생각인 듯했다. 잘된 일이었다.

이동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이미 생각을 끝낸 상태였다. 예전에 일어난 모든 일은 꿈이라고 여길 생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아직 생기지 않은 원한을 지금부터 원망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그래서 그 꿈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강환장은…….

강환장은 몇십 년 동안 오만함과 자신감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니, 언젠간 깨닫고 언젠간 익힐 것이다. 다만, 그가 깨달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테다. 그녀가 상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자신도 그와 같다는 걸, 강환장도 짐작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이동은 걸음을 늦추고 불주금을 쓰다듬었다.

분명 매우 분노했겠지. 미워죽겠지. 돌아온 이래 순조롭지 않았던 모든 일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간교를 부려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겠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가 겪은 모든 난관과 불행이 모두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나올까?

이동은 미간을 단단히 좁혔다. 조금 망연했다. 짐작 가지 않았다. 예전엔 그와 수를 겨룬 적이 없었다. 모든 걸 그의 뜻을 따랐으니까. 조정 일은 거의 문 이야가 계획해주고 궁리해주었다. 가끔 그의 의중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 이야가 음험하고 과감한 건 알지만,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문 이야에게 많은 걸 배웠으니 강환장이 두 번째 문 이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문 이야라면 어떻게 나올까?

이동은 무심결에 가슴에 드리운 진주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문 이야라면, 가장 먼저 오라버니의 앞날을 망쳐버리겠지!

그 생각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지금 오라버니는 맨손이고 아무런 경계심이 없어서 대비할 길이 전혀 없어!

기회를 봐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야 해. 오라버니는 어떻게든 내년에 과거에 급제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3년이나 기다려야 해.

3년이나 기다릴 순 없어. 4년 후엔 진왕이 태자를 세우니까. 그때가 되면 강환장은 권세가 하늘을 찌를 테고, 이신이 급제하는 걸 막을 수 있어. 심지어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고.

오라버니의 춘시 일은 잘 생각해서 방법을 내야겠어. 반드시 급제해야 해!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회랑을 돌았다. 그러다가 다시 속도를 늦추고, 몇 바퀴 돌면서 서서히 진정하고 불안감, 두려움, 조바심을 억눌렀다.

서두르면 안 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대도 침착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랬어.

이번 생은 지난 생하고 달라. 영원이 경성에 온 일도 그러하고. 게다가 성에 들어오기 전에 큰 난리부터 부렸고.

강환장이 진왕을 모신 이래, 그녀는 한때 황가 사람들을 자세히 수소문했었다. 특히 황자들을 자세히 알아봤었으니 영 황후 일가도 당연히 수소문했다.

영가 부자 네 사람 중 영진산과 장자 영위, 차자 영무 모두 보기 드문 명장이었다. 유독 영원은 그때도 그른 떡잎이라고 들었다.

영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더는 영가에 관심 두지 않았다. 영 황후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영진산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영진산이 출가하고 영가 장남 영위가 작위를 이어받았다고 들었다. 조정의 군보와 군공책에 영위와 영무의 이름은 자주 보이지만, 영원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녀가 잊은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생사도 알지 못했다.

영진산의 세 아들이 하나같이 출중하고 탁월하다고, 백 노부인이 말했던 것만 기억났다.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위와 영무가 출중하고 탁월한 건 그녀도 알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알지만, 영원은 아무런 소식도 없건만 백 노부인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래서 물어본 적도 있는데, 백 노부인은 그저 웃기만 했고 그 후론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영원이 출중하고 탁월한 일을 한 적이 있나?

백 노부인 눈엔 똑같이 출중하고 탁월하게 보이는 그 영원이 지금 경성에 왔다.

문 이야는 영원과 영원의 경성행,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이 떠들썩한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 이야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건 지대한 변수임이 분명했다.

이동은 상방 문 앞에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변수가 어디 영원뿐이랴. 오라버니를 양자로 들인 일도 변수가 아닌가. 그녀가 강가에서 나온 것도 변수가 아닌가. 하물며, 그녀와 강환장이 꾼 황량몽도 변수다.

이동은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봤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나 너무 연연하고 있었다. 이번 생은 지난 생이 아닐지 어찌 알겠나. 지금 눈앞의 대천세계가 예전의 대천세계가 아닐지 또 어찌 알겠나. 어쩌면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변수도 없고. 모든 건 다 미지일지도 모른다.

고 이낭은 미칠 것만 같았다.

강환장이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며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미한 그의 모습에 다급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서둘러 의원을 모셨고, 의원이 왔다. 그러나 의원이 처방을 내리고 고약을 주고 돌아가기도 전에 청서가 발작했다.

“세자야잖아! 세자야가 병이 들었다고! 개나 고양이가 병 든 게 아닌데, 어떻게 돌팔이를 부를 수 있어? 세자야가 자넬 어떻게 대하는데? 심장까지 내어 줄 듯이 구는데, 어떻게 세자야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러니까. 저택의 상전이 병이 나면 호 의원, 조 의원, 그리고 손 의원을 모시는데, 자넨 어떻게 세자야가 이렇게 됐는데 아무 의원이나 부를 수가 있지?”

추미가 금방 맞장구치자, 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의원이 진료했는데도 깨어나지 못하잖아!”

“이런 의원은 그 자리에서 환자를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깨어나겠어?”

청서의 침이 고 이낭의 얼굴에 가득 튀었다.

“이런 의원을 불러서 세자야를 보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세자야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네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어서?”

“안살림을 안 해 봐서 안살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면서 헛소리하지 마! 전에도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이 의원을 모셨어! 오 어멈이 한 말이야!”

고 이낭은 화가 나서 입술이 다 떨렸다. 지난번에 호 의원, 조 의원을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세 사람도 다 아는 일이었다. 오 어멈은 그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에 먹칠했다. 안살림을 맡은 이낭이, 이분이야말로 수녕백부에서 자주 모시는 의원인지도 모르냐고.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일로 트집을 잡아?

청서가 가차 없이 고 이낭을 향해 혀를 찼다.

“쯧! 그럼 물어보자! 대내내가 누워있었을 때, 어떤 의원을 불렀어? 그런데 세자야가 쓰러졌는데 이런 돌팔이를 불러? 이러니까 세자야의 작은 상처가 낫기는커녕 갈수록 심해지지. 자네가 부른 돌팔이, 사람을 구하러 온 거야 아니면 해치러 온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세자야를 해쳐서 자네가 좋을 게 뭐가 있어서!”

“뭐가 좋을지는 모를 일이니까요.”

추미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고 이낭을 흘겨봤다.

“어쩌면 양자를 들일 생각인지도 모르죠. 마침 오라비도 있고, 아우도 있잖아요.”

“개소리하지 마!”

고 이낭은 추미의 말에 기가 차서 어질어질했다. 그녀가 뭐라고 더 하기도 전에 청서가 성큼 나와서 혀를 찼다.

“그럴 작정이었군! 어림없는 꿈도 꾸지 마! 정말로 좋은 건 모두 고가에 떨어질 것 같아? 너 같은 나쁜 년하고 이야기하지 않겠어! 부인께 말씀드려야겠네. 세자야를 해치려고? 꿈도 크다! 추미, 넌 여기서 지키고 있어. 세자야를 해치면 어떡해. 난 부인에게 다녀올게.”

청서가 바람처럼 나가자, 추미가 춘연을 끌고 와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강환장의 침상 앞에 나란히 서서 고 이낭을 노려봤다.

“두 사람을 끌어내! 어서 약 지어오고, 우선 고약을 꺼내 와!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어서 상처에 약을 발라야 해!”

고 이낭은 떼쓰는 세 여인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함쳐도 자기가 직접 고른 시녀 영란이 몇 걸음 뗐을 뿐, 다른 사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곡란원 사람은 청서가 직접 고르고 가르쳤다. 게다가 고 이낭이 온 저택 종복의 자산을 털어간 바람에 다들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그녀를 원망했다. 조금이라도 해롭게 할 기회가 있다면 다들 앞다퉈 나서려고 했다.

아무리 불러도 다들 꿈쩍하지 않자, 고 이낭은 직접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추미의 모습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할 수 없이 추미와 춘연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애원했다.

“형님들, 내가 아무리 거슬려도 이러지 말아요. 날 손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오라버니 목숨을 가지고 이러면 안 돼요. 지체하면 안 돼요. 형님들, 내가 마음에 놓이지 않으면 영란, 아니면 두 형님이 약을 발라요.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고 이낭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추미는 질린다는 듯이 고 이낭을 흘겨봤고, 춘연은 그런 추미와 침상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는 강환장을 바라보다가 주저하며 추미를 끌어당겼다.

“그러지 말고…….”

“약을 고 이낭이 가지고 왔어. 무슨 약인지 어떻게 알고? 속이 얼마나 시커먼 나쁜 년인데. 지금도 봐. 자기가 하지 않고 우리더러 하라잖아. 춘연, 잘 들어.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고 이낭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긴 순수하고 무고하다고 할 거야. 다 우리 잘못이라고 하겠지. 맞고, 죽는 건 분명 너와 나야. 저 얼굴, 저 입,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니? 난 안 돼. 죽는 게 무섭지 않으면 네가 해. 난 절대로 안 해!”

춘연은 목을 움츠리며 끽소리도 더 하지 못했다.

추미는 팔짱을 낀 채 타협할 뜻이 눈곱만큼도 없는 눈빛으로 고 이낭을 흘겨봤다.

아직도 말끝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말 뻔뻔하네. 오통신이 붙은 이 오라버니가 정말로 이대로 죽는다면 정말로 좋을 일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꼴을 보니 그냥 기절해서 자고 일어날 것 같았다.

고 이낭은 추미의 말에 얼굴 가죽이 다 팽팽해졌다. 수치스럽고 화도 나서 그 자리에서 욕을 퍼부었다.

고 이낭이 욕을 하자, 추미도 뒤지지 않았다. 욕하고 싸움하는 건 전혀 무서울 게 없었다. 욕하는 것만 따지면 춘연은 더더욱 고수였다. 고 이낭은 추미를 손가락질하고, 추미와 춘연은 고 이낭을 손가락질하고. 서로 손가락질해대며 갈수록 흥분하고 몰입했다.

몰입해서 욕해대던 세 사람은 침상의 강환장이 천천히 깨어나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추미와 춘연은 침상을 등지고 서 있어서, 침상에 누운 강환장에겐 고 이낭만 똑똑히 보였다.

강환장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추미와 춘연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는 고 이낭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러운 욕설과 침을 함께 내뱉는 고 이낭을 바라보며 자신이 악몽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건 고씨가 아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고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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