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노을빛
강환장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 그 자리를 찾아서 천천히 앉은 다음 황궁 방향을 바라봤다.
태자가 죽었다!
강환장은 천천히 가슴을 눌렀다. 태자가 죽은 것이 며칠 전 일인 것만 같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미칠 듯이 기뻤던 마음이 지금도 여전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문 이야는 태자의 지위가 공고하고 진(秦) 황후가 세력이 강하고 과감하니 모함하지 말라, 그동안의 계획을 수포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모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신은 태자의 스승이었고, 이신의 아들은 태자 소속 관리였다. 태자는 그를 신뢰하고, 진 황후도 그를 신뢰했다. 태자가 등극한다 해도 이신 같은 필부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은? 작위는?
그는 아들을 세자로 세우겠다는 상주서를 연달아 십 년 가까이 올렸었다. 그런데 바로 이신 그 필부, 그리고 묵칠이 번번이 중간에서 훼방했다.
모험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다른 길이 없었다.
모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더니, 문 이야가 은퇴하겠다고 했다.
강환장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드러났다.
하나같이 다 똑같아. 어째서 날 위해 생각해주지 않지?
아들, 그렇게 출중하고 훌륭한 아들을 다들 억압했다. 도저히 억압할 수 없게 되자, 출신을 들고나와 공격했다. 서출이라고, 작위를 세습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작위는 반평생을 걸고 얻은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줄 수 없다면, 반평생 무얼 위해 분투했나. 그 분투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고씨도. 현명하고 덕이 높은 고씨, 그런 고씨의 재능, 인품은 경성에서 평판이 자자했다. 고씨의 고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황상도 허락했는데, 그것들이 격렬히 반대했었다.
가장 깊이 은애한 사람이거늘.
그도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험하지 않으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어쩌나? 고씨는 어쩌나? 온 저택 사람들은 어쩌나?
어째서 날 위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나.
그래서 할 수 없이,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 다 그들이 핍박한 탓이었다. 그들이 그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웠다.
가슴을 누른 강환장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렇게 해야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다 어쩔 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지 않았다.
태자가 죽었는데, 죽어서 사라져 버렸는데, 진 황후가 미친 짓을 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렇게까지 미친 짓을!
강환장은 다시 황궁 쪽을 바라봤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진 황후가 그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진씨 가문 형제들이 그렇게 미친 짓을 할 줄을 몰랐다. 감히 정말로 칼을 치켜들고 도륙할 줄이야. 조정 대신 반을 도륙했다. 경성에 산 사람을 다 도살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반역을 일으켰다!
강환장은 어디에 눈을 돌려도 가득하던 선혈이 다시 보이는 기분이었다. 끈적끈적하게 서서히 흐르던 선혈, 여기저기 나뒹굴던 머리통,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에 피가 솟구치던 목…….
강환장은 부르르 진저리쳤다.
진가가 다 미치광이일 줄 어찌 알았으랴.
바로 여기에서, 아마도……. 바로 이때쯤이었지.
강환장은 하늘 저편에 지기 시작한 저녁노을을 올려다봤다. 그날의 노을도 오늘처럼 이상할 정도로 찬란했다.
무지 큰스님이 와서 말하길, 돌려보내 줄 수 있다고 했다. 몇십 년 전으로,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그때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고.
강환장은 멍하니 노을빛을 바라봤다. 노을을 바라보다가 다시 황궁 방향을 바라봤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칼이 목덜미까지 들어왔는데, 저승사자가 눈앞에 서 있는데, 다른 선택이 어디 있겠나.
무지 큰스님은 그의 몸에 부적을 가득 붙였다. 이마에 붙인 부적이 눈을 가렸지만, 시야를 가리진 못했다.
혼백이 육신을 이탈하는 격렬한 고통이 폭발하기 바로 전,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느끼기 바로 전, 황궁에서 솟구치는 무수한 노을빛을 본 듯했다. 완전히 다른 두 색의 노을이 뒤엉키더니, 서로 싸우는 듯이 격렬하게 뒤엉켰다. 그 노을빛이 저녁노을을 뒤덮더니,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밝게 빛났다.
그 노을빛을 생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혼백이 이탈한 다음 처음으로 본 것인지 모른다. 그 하늘을 뒤덮은 노을빛이 얼마나 눈부시고 화려했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여전히 살이 떨렸다.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혼백이 육신을 이탈하던 고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아파서 허리가 수그러졌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온 이래, 지금 처음으로 그 장면을 떠올렸다.
이씨가 어떻게 된 건지, 곰곰이 생각해야만 했다.
그랬다. 노을빛이 번쩍인 후, 이씨를 봤었다. 젊은 시절 이씨를. 이씨가 보드라운 하얀빛에 싸인 것처럼 그를 바라봤다. 웃는 것 같더니, 돌아서서 노을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다음 노을빛이 그를 덮쳤다. 아니면 자기가 그곳으로 돌진했는지도 모른다. 그 노을빛이 그를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정말로 돌아왔다.
강환장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이씨를 보았었지.
눈을 뜬 다음에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순간엔 가장 마음에 걸리는 사람을 본다던데, 어째서 이씨를 봤을까?
이제 보니, 그건 죽기 전 돌이켜본 주마등이 아니라, 그의 혼백과 이씨의 혼백을 본 모양이었다.
무지 큰스님이 그의 혼백을 빼낼 때, 이씨는…… 그래, 그 며칠 이씨는 임종 직전이었다. 아마도 공교롭게도, 무지 스님이 술법을 쓸 때 이씨의 혼백이 육신을 이탈한 바람에 인연이 얽혀서 같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에게 붙어서, 같이 돌아왔구나.
강환장은 힘껏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원망을 애써 잠재웠다.
이씨! 나를 놓아줄 순 없나! 평생 들러붙은 것도 모자라, 또 한평생을 들러붙을 셈인가?
아니지!
강환장의 이마가 쿡쿡 쑤셨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양손으로 난간을 잡고 호수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마셨다.
진정해야 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화를 내면 이성을 잃는다. 침착해야 해! 침착!
지난 생에 그녀는 평생 그에게 달라붙었다. 평생을 괴롭혔다. 평생을 망쳤다.
이번 생에서는 아마도…… 그래, 들러붙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수를 쓰려는 것이다. 벌써 수를 쓰고 있어. 고씨를 죽이려고, 이 집안 모두를 죽이려고. 어쩌면 나도 죽이려고 하겠지!
그 생각이 들자 이마가 미친 듯이 쑤셔서 이마를 부여잡고 의자에 앉았다.
이런 악독한 여인네! 이렇게까지 악독하다니!
같이 돌아온 날이 바로 그녀가 넘어진 그날이었다. 어쩐지 살갗이 까진 정도로 일어나지 않더라니. 어쩐지 그런 일들이 벌어졌더라니. 어쩐지 이 집안에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더라니. 어쩐지!
그 일들, 모든 일이 그녀의 소행이다! 나를 해치려 하고 있어! 경계하지 않은 동안, 나를 해치려고 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해치고 있었어!
이 천것! 이 악녀!
내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어서? 상인 가문 출신 여인이, 재물을 탐하고 저속한 여인이, 악랄하고 간계가 많은 여인이, 어질지 못하고 불효하고 자비롭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여인이,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인이!
그런데도 어찌하지 않았거늘.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줬거늘! 평생 고명 부인으로 지내게 해줬거늘. 심지어 이 집안 안살림도 맡게 해줬거늘. 대체 뭘 더 바라는 걸까?
평생 내 영광 아래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위세와 부귀를 다 누렸으면서. 죽어서도 내 덕에 다시 태어났으면서. 감사하기는커녕 처음엔 나를 속이고 나중엔 간계를 부려 저택에서 나가? 무엇을 하려고? 대체 뭘 더 하려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분노가 치솟은 강환장은 이마가 욱신욱신 아팠다. 아파서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복두를 휙 잡아챘다. 복두는 이미 축축해졌고, 이마에선 피가 또 솟구쳤다.
기둥을 붙잡고 일어서서 비틀비틀 고 이낭의 거처로 향했다.
화를 내면 안 된다. 화를 내면 안 돼. 진정하자. 침착하자. 화를 내면 안 돼!
그러나 울화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머리가 점점 더 징징 울렸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 같아서 나무를 덥석 잡았다. 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뻐끔뻐끔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쉬었다.
여기서 기절해 쓰러질 수는 없지. 지금 내 수녕…… 백부는 예전의 수녕왕부가 아니라서 사람이 많지 않아. 아무도 없는 텅 빈 화원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그럴 수는 없지.
어질어질한 가운데, 어렴풋이 사람들이 보였다. 강환장은 정신이 번뜩 들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소리를 지르자마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무를 잡은 채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길 저쪽 끝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청서와 추미가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강환장이 나무를 붙들고 주저앉는 걸 보고, 추미는 흥분해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청서는 비명을 지르며 치맛자락을 들고 달려갔다.
청국은 대교를 배웅하고 서둘러 이동에게 달려가서 대교의 말을 전했다. 이동은 얼굴이 잔뜩 가라앉았고, 수련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인 듯 말했다.
“영해에 관해서는 왜 물으신 걸까요? 영해를 어떻게 알고? 제가 영해에게 가서 물어볼까요?”
“그럴 거 없어.”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고 차를 머금었다. 영해 일을 물었다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 이야를 모셨을 때 예상한 일이라서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만 어멈한테 저택에 있는 사람에게 말 전하라고 해. 강환장과 고 이낭이 이상한 건 없는지 알아보라고 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번거롭다고 빼놓지 말고 다 와서 말하라고 해.”
“네! 제가 갈게요.”
청국은 서둘러 만 어멈을 찾으러 갔고, 이동은 일어서서 회랑으로 나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등롱 아래 드리운 유소(流蘇: 깃발이나 마차, 등롱 아래 다는 술, 태슬)가 미풍에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그 자잘한 그림자가 생기 넘치게 자란 불주금(佛珠錦: 알알이 구슬처럼 자란 다육 식물)에 드리워졌다.
이동은 불주금을 쓰다듬었다. 언제부터 회랑에 불주금을 잔뜩 놓았더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인 듯했다.
그녀는 지금도 불주금을 좋아했다. 동글동글, 비취처럼 영롱한 불주금. 어머니는 비취를 가장 좋아했고, 그녀도 좋아했다.
이동은 구슬발처럼 드리운 불주금을 손가락으로 훑으면서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모른다. 생각이 많거나, 슬플 때는 이렇게 했다.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을 때, 잎을 드리운 불주금이 그녀와 함께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지켜보는 것처럼.
오늘 일어난 일을 잘 곱씹어 보고 생각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