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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81화 (81/463)

81화: 황명을 받고 하는 사죄 一

묵 승상은 경악했다. 영원이 찾아와서가 아니고, 너무 빨리 와서도 아니었다. 그런 일로 놀랄 사람이 아니었다. 황명을 받들어 사죄하러 왔다는 말에 놀랐다. 몇십 년 동안 살아왔고, 십여 년 동안 승상 노릇 하면서 황명을 들고 사죄하러 왔다는 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고한 것입니다. 황명을 받들어 사죄하러 왔답니다.”

문지기는 죽을상이었다. 승상부의 문지기는 웬만해선 볼 수 없는 영리한 자들이었고, 자기네 승상야가 ‘무어라?’ 하고 묻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그 말을 듣고 자기도 한참 동안 넋이 나갔었는걸.

“영원이라는 놈,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황명을 받들어 사죄를 한다니. 황상께서 이런 허튼짓을 용납할 리가 있습니까.”

묵 이야가 매우 빠르게 반응했다.

“음. 너도 같이 가자. 경성에서 아무도 함부로 황명을 받들었다는 말을 못 하거늘. 대체 무슨 일인지 같이 가보자.”

여염과 계소영은 문과 가까운 구석에 서 있었고, 문지기가 아뢰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여염은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황명까지 들고 나왔는데, 얼른 작별을 고하고 돌아갈 때가 아닐까. 이러다가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엮일라.

그러나 계소영은 눈을 빛내며 여염을 잡아당겼다.

“가자, 우리도 가 보자!”

여염은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계소영에게 꽉 붙들려서 묵 승상과 묵 이야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대문으로 향했다.

묵부 대문 밖, 저 멀리서 한가하거나 한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문 앞 계단 아래, 영원은 완전히 새로운 붉은 4품 시위복을 입고 승상부를 등진 채 대문 옆 사자 석상을 한 발로 밟고 서 있었다. 손엔 금과 보석이 박힌 광채가 흐르는 채찍을 쥐고서 따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가끔 채찍을 휘두르면서.

영원 앞엔 상자가 열몇 개 주르륵 놓여 있었다. 예쁘고 향긋한 간식, 약재, 그리고 빛이 흐르는 능라주단, 그 예물 상자 뒤엔 영 사노야를 필두로 관사와 종복 여남은 명이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서 있었다.

영원만 없다면 사죄하기엔 상당히 그럴싸하게 격식을 갖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량이오, 내가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 하는 얼굴로 서 있는 영원 덕에 느낌이 확 달라졌다.

대문 밖으로 성큼 나온 묵 승상은 영원을 위아래로 살폈고, 뒤따라 나와서 영원을 바라보는 묵 이야의 눈빛엔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계소영이 여염을 끌고 나왔지만, 여염은 좌우를 둘러보고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대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여기에 있는 걸 누가 보면 좋지 않아. 지금도 꽤 많은 이가 본 것 같은데.

계소영은 신경이 온통 영원에게 쏠려 있었다. 순간 실망이 치밀어 올랐다. 설마, 정말로 사고뭉치 한량이었던 건가?

“계 형! 이리 들어와!”

여염은 넋이 나간 것 같은 계소영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조금씩 당겨서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계 형, 우리는 돌아가야 해. 내 말은, 나는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 더는 머무르지 못해. 묵칠에게 가서 인사하고 오겠네. 나는 반드시 가야 해. 자넨 어쩔 텐가?”

여염은 묵부 주변에 숨어서 이쪽을 주시하는 눈빛들에 조마조마해졌다. 묵칠과 그의 사이는 꽤 나쁘지 않은 벗이지만, 자신의 조부와 묵칠의 조부는 세상이 다 아는 정적이었다. 그가 묵부에 오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고, 묵칠은 한 번도 그의 저택에 간 적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른 가야만 해. 아까 저택에 들어왔을 때……. 아니 성으로 들어오자마자 이 상황에서 벗어났어야 하는데!

계소영도 여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사과하러 왔다고 하니……. 우리는 일단 들어가세. 묵칠이 어떤지 보러 가자고.”

대문 앞, 묵 이야가 살며시 잡아끌자 묵 승상이 걸음을 멈췄다. 대신 묵 이야가 냉큼 계단 중간으로 내려가 영원을 향해 공수했다.

“자네가 영 칠야인가?”

“오!”

영원은 채찍을 거두고 돌아서서 묵 이야에게 공수하려고 손을 들다가, 채찍을 아직 들고 있는 걸 보고 재빨리 종복에게 던져 주었다.

“소생, 정북후 넷째, 영원입니다. 성으로 들어오는 길에 귀부의 칠소야와 작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죄하러 찾아왔습니다!”

말을 마친 영원은 허리 숙여 장읍했다. 태도와 말투, 모두 성의가 느껴지는 사과였다.

묵 이야는 영원의 시커멓게 멍든 눈가와 퍼렇게 부은 한쪽 얼굴을 바라봤다. 아들도 이렇게 얼굴 한쪽이 퍼렇게 부은 게 떠올랐다. 둘 다 겉만 다친 상처였다.

철없는 젊은것들이 다툼이 일어난 모양이지. 둘 다 다쳤다니,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묵 이야는 그런 생각에 화를 억눌렀다.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영 칠야, 이럴 것까지 없네. 내 아들이…….”

“아들이요? 아이고! 묵 승상이 아니셨군요! 그러게, 묵 승상께서 이렇게 젊을 리가 없지요!”

영원은 그제야 계단 맨 위에 서 있는 묵 승상을 못 본 듯이 놀란 목소리로 고함쳤다. 묵 이야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없길래, 나를 부친으로 알았어? 내가 그리 노안이란 말이냐?

막 기분이 조금 좋아졌던 묵 이야는 아까보다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묵 이야시군요. 아들보다 더 잘생기셨습니다! 묵 칠소야는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까? 다친 곳은 어떻습니까? 아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묵 이야는 영원의 말에 괴로울 정도로 속이 답답해져서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이 앞을 막아섰다.

“아들은 별일 없으니, 수고할 것 없…….”

묵 이야가 슬쩍 영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영원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이 묵 이야 옆을 지나치더니 곧장 계단 위로 올라가서는 돌아서서 그를 불렀다.

“묵 이야, 가시지요. 별일 없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몇 대 맞은 것뿐 아닙니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형이 굳이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하시니, 와야지 어쩌겠습니까! 자형이 말을 꺼냈는데, 오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사과 같은 건, 자주 해서 능숙합니다. 이야, 가시지요. 얼른 이 댁 칠소야에게 사과하고 그 뭐더라, 국공부에 가야 합니다. 또 어디였더라.”

묵 이야는 이 눈치 없는 무지렁이 때문에 가슴이 턱 막혀서 피를 토하고 싶은 기분이다가 ‘자형’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계단 맨 위에 선 묵 승상이 영원을 향해 공수하며 대답했다.

“원가아, 그럴 것 없다. 서로 치고받은 것을, 사과는 무슨. 마침 잘 왔다, 자네도 다쳤으니 태의에게 얼굴을 보여라. 아버지는 잘 계시더냐?”

s “묵 승상!”

영원은 이제야 묵 승상을 본 듯이 냉큼 장읍했다.

“아버지는 평안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승상야. 저는 자주 싸움해서,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괜찮아요!”

“황상을 뵈었느냐?”

묵 승상은 살짝 몸을 틀어 영원에게 눈짓하고 그와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뵈었습니다. 역참에 도착하자마자, 밥도 먹기 전에 자형이 부르셨습니다. 호되게 혼났지요. 사치한다니, 싸움을 했다니, 칠소야는 묵 승상이 애지중지하는 손자라고 얼른 가서 사과하라고 하시지 뭡니까. 이게 뭐 별일입니까? 게다가, 심하게 때리지도 않았는걸요. 하지만 자형이 말씀하시니, 와야지 어쩌겠습니까!”

영원은 느긋하게 어깨를 흔들며 얼뜨기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묵 승상과 나란히 걷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모습이었다.

묵 승상은 지금 이 순간, 황상이 느낀 것과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울적하고, 답답했다. 용병술이 신처럼 뛰어난 정북후가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 어쩌면 이런 물색없는 물건일까. 이런 어리석은 물건을 어찌 감히 경성으로 보낸 걸까? 영가에 화를 초래하려고 일부러?

대지약우(大智若愚),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일수록 재능을 뽐내지 않아서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더니, 그런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분은 황상이다.”

묵 승상은 수석 승상으로서 영원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상을 말끝마다 자형이라고 부르다니,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요! 내 자형은 황상이지요! 온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영원은 엄지를 치켜들고는 뿌듯한 듯 흔들었다. 묵 승상은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 이건 멍청한 게 아니라, 얼뜨기다!

“난 자네 부친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

묵 승상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일단 관계를 맺어 보려 했다.

“오, 그렇군요.”

영원은 전혀 거리낌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제 부친과 몇 번 만난 적 있다는 묵 승상의 말을 너무나 건성으로 넘겨 버렸다.

묵 승상은 물 곳이 없는 고슴도치를 만난 개가 된 기분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놈은 벽창호 같은 얼뜨기다!

“황상이 사과하라고 분부하신 건, 황명을 받고 선물을 바치러 왔다고 하면 안 된다.”

묵 승상은 더는 아까 하던 화제를 잇지 못했다. 그는 뒷짐 진 채 몇 걸음 걷다가 깊이 심호흡하고는 본론으로 돌입해서 까놓고 말하기로 했다. 이놈은 완곡하게 말해서 알아들을 놈이 아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황명을 받고 사과하러 왔다고 합니까?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영원은 묵 승상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몹시 무시하는 눈빛이었다.

“황상이 선물을 가지고 가서 사과하라고 한 건,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려 하신 것이다. 그건…….”

묵 승상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았다.

“황상이 그 말씀을 하신 건, 자네 자형의 신분으로 한 말이라고 여겨라. 자형의 신분으로 한 말이니, 이건 가법이지…….”

황명이 아니라는 말이 묵 승상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천자의 말 한마디, 심지어 글자 하나까지 거역할 수 없는 황명이 맞다. 황명이 아니라는 말 같은 걸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삐딱하게 묵 승상을 보던 영원은 그가 나머지 말을 삼키자 그대로 삐딱하게 시선을 떼어 곁에 있는 높은 나무 쪽을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흥! 황명이 아니라는 말은 도저히 못 하겠지? 황명이 아니면 뭔데? 말해 보시지?

“황명이 맞긴 하나, 이 황명은 원가아 속으로 알면 됐지, 떠벌릴 일이 아니다.”

묵 승상은 대화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그야 알지요!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댁 칠소야가 맞은 곳은 아프고 속은 탈 텐데,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도 않으면 어쩝니까? 그렇게 되면, 황명을 거역한 건 누가 되는 겁니까? 제가 칠소야와 싸우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칠소야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승상야? 싸운 건 싸운 거고, 싸움이란 정정당당한 것입니다. 나, 영원은, 보십시오, 이렇게 떳떳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뒤에서 남몰래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못 합니다!”

묵 승상은 피를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영원이 하는 말대로라면, 조금 전에 그가 남몰래 수작 부리는 법을 가르쳤다는 말 아닌가!

영원은 묵 승상을 흘깃 보고는 시선을 돌리고 뒷짐 진 채 엄숙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묵 승상은 한참 눈을 깜빡이고는 피 토하고 싶은 심정을 심호흡하며 억눌렀다. 영원이 한 말을 곱씹어 보면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얼뜨기가 하는 말도 이치에 맞으니 트집 잡을 수가 없었다.

알았다. 황명을 받고 사과하러 온 거라면 그런 거지.

영씨인 이놈이 이렇게 황명을 받고 사과하러 간다는 명목조차 들고 가지 않으면 수국공부에서는 정말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묵 승상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영원이 어쨌든 황명을 받고 사과를 하러 왔다니, 아무리 사과하러 온 것이라고 해도 황명을 받고 온 흠차(欽差: 황명을 받은 파견인)였다. 흠차인 이상 직접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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