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황상의 생각 二
“예! 소신, 바로 가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영원은 일어서지도 않고 두 손 두 발을 함께 쓰면서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입구까지 뒷걸음질 치다가 아차 하고 문턱에 걸렸다. 너무 빨리 움직인 바람에 문턱에 부딪쳐서 그대로 뒤집혀서 나뒹굴었다.
황상은 헉 하고 웃다가 콜록거렸다. 이 물건 때문에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영진산, 그 능구렁이 같은 자에게 어떻게 이런 아들이 있지.”
황상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대전 밖을 손가락질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래서 영 후야가 여기저기 서신을 보낸 모양입니다.”
상 태감은 어이없는 듯 웃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황상 곁에서 시중을 들어서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황상을 자신보다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상은 어릴 때부터 고지식하고 법도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선황이 그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마도 그런 그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황상은 주 귀비를 지극히 총애하면서도 주 귀비가 그 총애를 믿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와 조정의 일부 규칙을 무너뜨리는 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주가에서 2대째 황후를 낼 수 없다는 것. 예를 들어, 황후 자리를 비우면 안 되고, 후궁에 반드시 신분에 걸맞은 황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러했다.
예전에 계 황후가 주 귀비와 날카롭게 맞서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을 때, 계 황후의 모든 행동은 규칙과 법도에 맞았고, 근거와 이치를 갖추어서 황상은 매우 골치 아팠고 뒤에서 욕을 할망정 계 황후를 폐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황상은 번번이 계 황후를 훈계했다. 사실 훈계라고 하기엔 간곡한 부탁에 가까웠다.
‘당신은 세상에 모범이 될 국모, 황후요. 주씨와 사소한 것으로 따지지 마시오. 이번 일은 주씨가 생각이 짧았소. 하지만 주씨의 성격을 모르오? 일일이 따지지 마시오. 주씨는 그저 응석받이로 자라서 그런 것이니, 너무 따지지 마시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말해도 계 황후는 분명하게 따졌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극히 화가 났지만, 그게 다였다.
나중에 계 황후가 몸져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황상은 한시름 놓았다. 나중에 영 황후를 계후로 들였을 때, 예부에서 납폐를 보냈을 때부터 정북후와 영 황후는 예법에 맞고 사리에 밝게 굴었다. 그는 매우 흡족했고, 영 황후가 궁으로 들어온 뒤에도 주 귀비에게 내내 양보하고 물러서 주는 걸 보고 더더욱 흡족했다.
황후를 맞았는데, 후궁의 분란과 쟁투는 없었다. 주 귀비가 사흘돌이로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 콧물 흘리며 읍소하는 일도 다시는 없었고, 십여 년 동안 그는 영 황후, 주 귀비, 후궁에 대해 그보다 더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했다.
영 황후가 분별 있게 행동하기에 그녀의 모든 생활을 최고로 대우했고, 정북후부 역시 지극히 중용하고 은혜를 베풀었다. 정북후의 세 아들 중 가장 어린 영원은 눈곱만한 공도 없고, 임무도 받은 적이 없는데도 4품 어전 시위로 봉했고, 적장손은 태어나자마자 6품 시위로 봉했다. 이 모든 것이 분별 있고 예법을 아는 영 황후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런데 멀쩡히 있다가, 정북후가 막내 영원을 경성으로 보내서 4품 어전 시위 직을 진짜로 맡겠다고 하다니.
무슨 생각으로?
황제는 올해 금명지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리고 순간 너무나 골치가 아파졌다. 그러나 그 일과 영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들을 경성에 보내다니, 영진산이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망령된 생각을 품은 걸까? 고작 영 황후가 낳은 병약한 아들로?
어전 시위가 된 이상 경성에 와서 일하는 건 당연하긴 했다. 영명한 황제가 될 일념뿐인, 지극히 법도를 지키는 그는 정북후의 상주서를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되돌려 보내는 건 법도에 맞지 않으니까. 그래서 허락했지만, 매우 후회했다. 애초에 어전 시위로 봉하는 게 아니었다면서. 4품 장군으로 봉했어야 했다면서. 너무 후회한 나머지, 정북후, 영가, 심지어 영 황후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영원이 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묵 승상 일곱째와 싸우고, 묵 소칠, 안원후 세자, 심지어 주가 여섯째까지 돼지머리처럼 때려주었다는 걸 들었을 때, 그리고 조금 전에 영원을 만나고 자기가 괜히 깊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조금씩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진산이…….”
황상은 상 태감이 주워온 상주서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런 아들을 낳았을까. 휴, 저런 아들이 있다니, 영진산도 골치가 아프겠군. 하지만 저런 무지렁이를 짐에게 보내다니, 무슨 짓이란 말인가. 짐더러 아들을 단속해 달라는 건가? 짐이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어! 음, 네 생각은 어떤지 말해 보아라.”
“소인 생각엔, 영원이 어리석긴 하지만, 겉모습을 보면 우직하고 선량해 보입니다. 영진산이 그를 경성에 보낸 것도 영진산의 말대로 경성에 와서 고생 좀 하고 교훈을 얻길 바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 태감은 황상의 의중을 가늠하면서 황상이 바라는 대로 이야기했다. 모든 걸 황상의 뜻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인생 철칙이었다.
“영진산의 처가 막내를 매우 총애한다고 들었습니다. 영원이 어릴 때부터 잘난 얼굴로 유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어린 신선 같다더니, 그 말은 헛된 소리가 아니었군요.”
상 태감의 말에 황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긴 건 매우 잘났더구나.”
“어릴 때부터 매우 예쁘장했답니다.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싫어하고, 무술 수련을 싫어한 것 말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었고, 영진산 부인이 그를 너무 끼고 돈 바람에 이 아들이 떡잎 그른 사고뭉치가 된 걸 영진산이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답니다. 북삼로에서 정북후부 네 글자 아래 누가 감히 영원을 건드리겠습니까. 영 후야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고생 좀 하라고 경성으로 보낸 걸 겁니다. 두려움이 무언지 깨달으라고요.”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상이 미소를 지었다.
“별궁 쪽은 요즘 별일 없지?”
“언제나처럼 별일 없습니다. 오가아의 병은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작년보단 나아졌습니다.”
“음, 짐의 자식은 하나같이 건강하고 뛰어난데 어째서 그 아이는…… 이 이야기는 됐다.”
황상은 성가신 듯 손을 저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신경 쓸 일도 없었을 것을. 후! 자식이란 부모의 빚이라더니. 아이가 변변찮으면 걱정스럽고, 아이가 너무 뛰어나면 더 걱정스럽고. 후우,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일이군.”
영원이 성큼성큼 궁문을 나왔을 때, 경성 영가에 주둔하는 영가 대표 영 사노야가 달려와서 복백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둘 다 걱정 가득한 긴장한 얼굴로 영원의 안색을 살폈다.
“칠야, 황상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물론 괜찮지! 흥!”
영원은 걸음도 늦추지 않고 두 사람을 지나쳐서 말에 타면서 코웃음 쳤다.
“내가 생각한 거랑 똑같더구나!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얼른 가자.”
복백은 얼굴을 흐리며 영 사노야를 잡아당겨서 걸음을 서둘러 말에 타고 쫓아갔다.
“칠야, 어디에 가십니까? 중요한 일이라니요? 성상을 뵀으니, 부로 돌아가야지요.”
“돌아가긴 개뿔! 나는 황명을 받고 사과하러 가야 한다!”
영원은 툴툴거리며 대답하고는 별안간 고삐를 잡았다.
“황명을 받고 사죄하러 가는데 ‘빈 발’로 갈 순 없겠군. 자네가 다녀오게. 그리고 숙부, 사람을 보내서 좀 알아보십시오. 아니다, 알아볼 것 없겠군. 경성에서 사과할 땐 다들 어떤 선물을 준비하는지 분명 잘 아시겠지요. 가장 큰 선물보다 두 배로 준비해서 모두 세 개 준비해 주세요. 얼른 가세요!”
복백은 곧바로 알아듣고 영 사소야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사람을 때렸으니, 선물을 들고 가서 사과하라고 황상이 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걸 황명을 받고 사죄하는 거라고 할 수 있나? 사죄하라는 황명도 있나?
됐다, 깊이 생각할 것 없다. 칠야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칠야 말이 맞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니, 칠야를 따라서 돌진할 수밖에.
복음각을 나온 이래, 영원 일행은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역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묵칠은 전 노부인의 마차에 드러누운 채 빠르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묵부는 온 저택이 큰 난리가 났다. 전 노부인이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관사를 보내 조 의원과 외상 명수 호일첩을 불러왔다. 소식을 들은 묵 승상은 서둘러 공무를 처리하면서 어지럼증 치료에 가장 능한 주 태의를 집으로 보냈다. 아들이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묵 이야는 탁자를 뒤집고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가서 태의정(太醫正) 오 태의를 모시라고 사람을 보냈다.
그렇게 묵칠이 저택에 들어오기도 전에 의원 대여섯 명이 저택에서 대기했다.
복음각에서 나온 묵칠과 소자람은 각각 전 노부인과 묵 부인 마차에 탔고, 백 노부인이 주 육소야를 바래다줄 리가 없으니 원 부인이 서둘러 그를 자기 마차에 태웠다. 골치 아픈 일이 분명하지만, 그녀가 주 육소야를 데리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소영은 여염을 붙들더니, 죽어도 같이 묵부에 가서 묵칠이 머리를 다쳤는지 아닌지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염은 잠시 고민했다. 계소영과 구경하러 묵부에 가지 않으면 모친과 함께 주 육소야를 데리고 수국공부에 가야 한다. 육소야가 그 꼴이 됐는데 자신은 멀쩡한 걸 주가에서 본다면……. 주가 사람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이치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역시 계소영과 함께 묵부에 구경하러 가는 게 낫겠어!
여염은 계소영과 함께 묵부로 들어가자마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매우 조심하고 신중하게 어수선한 주변을 바라봤다.
“온 저택이 어수선해. 우린 최대한 조용히 있자고. 조심하고.”
여염이 옷자락을 당기며 나직이 하는 말에 계소영이 사족을 붙이듯 해명했다.
“그야 그렇지. 사실 난 묵칠이 대체 얼마나 다친지 몰라서 걱정되어서 온 거다.
게다가 묵칠이 심하게 다치긴 했잖아. 아까 묵칠은 정신이 없었으니, 묵 이야나 묵 승상이 물으시면 우리도 반은 당사자인 셈이니 묵칠 대신 잘 설명해야지.”
여염은 헛웃음 치며 계소영을 흘겨봤다. 자신의 할아버지 여 승상은 겸손하고 사람을 잘 이해하고 너그럽기로 유명했다. 그런 점은 그도 꽤 소질 있었다. 계소영이 무슨 말 못 할 꿍꿍이를 품은 건지,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이번 일에 계소영의 반응이 평소와 매우 달랐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묵부까지 따라온 것은 묵칠을 신경 써서가 아니라 영 칠야에게 관심이 생긴 것이리라.
계소영의 그 꿍꿍이, 그리고 그 꿍꿍이 뒤에 감춰진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을 떠올린 여염은 더 신중해졌다. 오늘 이 일로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모른다.
영원이 묵부 대문 앞에 왔을 때, 묵 승상은 사람이 바글바글한 묵칠의 거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여섯이나 되는 의원이 손자의 병세를 이야기하기도 전에, 문지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들어와 다급하게 고했다.
“승상야! 대문 밖에 4품 어전 시위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정북후부 칠야 영원이라면서, 황명을 받들어 사죄하러 왔답니다.”
“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