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77화 (77/463)

77화: 아수라장 二

마지막으로 안으로 들어선 복안 장공주는 멍하니 입구에서 굳은 세 부인을 보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소리를 내서 웃고는 다급하게 헛기침하며 아닌 척했다.

백 노부인은 얼굴이 잔뜩 굳은 채 복안 장공주를 힐끔 보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있는 손자 계소영을 힐끔 봤다. 그리고 손자가 얼굴을 시커멓게 칠해놓은 주 육소야도.

원 부인은 무슨 표정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무표정이라고 해야 할 얼굴로 묵칠의 얼굴에 커다랗고 검은 동그라미를 바라봤다. 아직도 계속해서 원을 그리는 아들 여염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묵 부인이 소자람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칼에 다친 것이냐?”

묵 부인의 목소리가 다 떨렸다.

“아니에요! 이 녀석이 물었습니다!”

소자람이 이를 갈며 묵칠을 노려봤다.

“그놈이랑 같은 붉은 옷이라서…….”

묵칠이 무기력하게 대답하고는 무의식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소자람 목의 상처는 죄다 자기가 때려서 생긴 것이었다.

그 도적놈을 때린 줄 알았다니까!

“너희들끼리 싸운 것이냐?”

묵 부인은 매우 빨리 반응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는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부인, 일단 앉으세요.”

계소영이 일어서서 묵 부인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고, 여염도 일어서서 자리를 비워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내 급하게 오느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전 노부인은 문 앞에 서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성큼성큼 묵칠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목을 만져 본 전 노부인은 손자가 얼굴 말고는 다른 곳은 다 멀쩡하고 억울한 듯 눈을 반짝이는 걸 보면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서 크게 안도하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묵 부인은 오소리 기름을 팔에 바른 채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짓는 아들을 그 곁에서 화가 잔뜩 난 눈으로 노려보고는 묵칠도 노려봤다.

“너희들끼리 싸운 게 아니면, 무엇이냐! 너, 너희들! 똑바로 말하지 못해?”

고모에게 한 소리 들은 묵칠은 더 억울해져서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전 노부인을 바라보더니 몹시 서러운 듯 ‘할머님’ 하고 외치며 그녀에게 안기려 했다.

“어이! 얼굴에…….”

여염이 한 손으로 고약 통을 들고 허둥지둥 묵칠을 끌어당겼다. 힘들게 얼굴에 고약을 발라줬는데, 이대로 전 노부인의 품에 안겨버리면, 전 노부인의 옷은 둘째치고 묵칠의 얼굴이…….

괜히 헛수고한 거게?

그러나 묵칠은 너무나, 너무나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서, 아까 영원과 싸우던 것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전 노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여염은 전혀 잡을 수가 없어서 오히려 끌려갔다. 묵칠이 전 노부인 품에 안기자 여염은 중심을 잃고 묵칠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손에 들고 있던 고약 통은 전 노부인 뒤에서 막 자리에 앉으려던 백 노부인의 품으로 정확히 쏙 떨어졌다.

여염의 모친 원 부인이 화를 내며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어찌 이리 덤벙대는 것이냐! 노부인, 괜찮으시지요?”

그녀는 서둘러 여염부터 묵칠에게 떼어놓고 얼른 백 노부인의 옷에 붙은 고약을 닦았다.

“난 괜찮네.”

백 노부인은 정말로 아무런 일이 없었다.

“얼른 주가 여섯째가 어떤지 좀 가 보게. 얼굴 가득 고약을 발랐지 않아.”

그 말에 원 부인은 서둘러 주 육소야를 살펴보러 갔다.

계소영은 누군가가 사달을 일으키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한바탕 두들겨 팬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영원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제법 지위가 있는 사환들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와서, 상대가 얼마나 거칠고 포악했는지 말을 보태고 부채질하며 설명했다.

전 노부인은 들을수록 냉정해지고 갈수록 화난 표정이 가라앉다가 마지막엔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군지 봤느냐? 경성으로 가더냐?”

전 노부인이 사환 하나를 향해 물었다.

“예, 틀림없습니다. 그 도적놈이, ‘가자, 성으로!’ 하고 외쳤는걸요. 성에 들어가면 어쩌고 어쩌고 라고도 했습니다.”

“북부 말씨라고?”

전 노부인이 여염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직접 들은 건 아니고, 듣자 하니 그렇다고 합니다.”

여염이 유 장궤를 바라보자, 유 장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정통 북부 말씨였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고맙네.”

전 노부인이 유 장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유 장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칠소야가 소인의 점포에서…….”

“아까 어느 태태 한 분이 계셨는데, 자네 동가인가?”

가장 정신이 맑은 소자람이 묻자, 유 장궤가 여염을 한 번 보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수녕백 세자 부인 이씨와 이씨의 모친 장 태태입니다. 이가와 우리 동가 가문은 대대로 친분이 있습니다.”

여염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가서 전 노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도 아는 일입니다. 영수암 밖 자등 산장에 사는 이가 태태와 여식입니다. 그리고 장 태태의 아들 이신도 있었고요. 그것참 공교롭게도, 법회 전에 저와 계 형이 사찰 밖에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우연히 이신을 만나 차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노부인에게 기별한 사환이 바로 장 태태의 분부로 간 것입니다. 저와 계 형도 이신이 사람을 보내 불러서 왔고요. 이신이 하는 말이, 누이 이 낭자가 병이 깊이 들어 사찰에 가서 경독을 듣고 축원 기도를 하려고 했는데, 향 연기가 심해서 먼저 내려왔답니다. 모친과 누이가 너무 놀라서 이신이 두 사람을 데리고 먼저 돌아갔습니다.”

“그래.”

전 노부인은 여염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녕백부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엔 까닭이 있으리라고 여기고 더 묻지 않았다.

“유 장궤, 얼른 일어나게! 아이들이 소란을 피운 바람에 자네에게 폐를 끼쳤군. 그물을 참 잘 던졌네! 여봐라, 은자 백 냥을 상으로 내려라.”

전 노부인은 유 장궤를 일으키라고 여염에게 눈짓하고 사람을 시켜 은자 백 냥을 가지고 왔다.

“자네 점포에 망가진 물건을 배상하는 돈일세. 다들 놀란 마음도 좀 달래고.”

“가당치 않습니다!”

유 장궤는 연신 허리를 숙이고는 사양하지 않고 은자를 받고는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별것 아닌 일인데, 괜히 놀라셨겠습니다. 장공주.”

전 노부인은 일어서서 우선 복안 장공주를 향해 허리 숙여 사과했다.

“노부인,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별일 아니라니, 나는 이만 돌아갑니다.”

한참 구경한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까보다 흥미가 떨어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모두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녹운을 데리고 돌아갔다.

산문 안으로 들어가 뒷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로 들어선 복안 장공주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공주, 떠오른 사람이 있으세요?”

녹운은 시녀들에게 멀찍이 서라고 눈짓한 다음 복안 장공주를 따라가서 나직이 물었다.

“누구인지 생각해야 알겠어? 북부 말씨, 나이, 행동. 누가 또 있겠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경성이 더 혼란스러워지겠군.”

복안 장공주는 어두운 얼굴로 저 멀리 경성 쪽을 바라봤다.

“그 말씀은…… 영씨 가문이요? 정북후? 영원이 슬슬 경성에 들어올 때가 되긴 했네요. 영가 삼형제 중에 막내가 가장 골치라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사고뭉치였고, 이 나이 되도록 사고밖에 안 친다잖아요. 정말인 모양이네요. 영 후야는 왜 그런 사고뭉치 아들을 경성으로 보냈을까요? 영 황후와 가문에 화를 초래하는 거잖아요.”

어릴 때부터 장공주 곁에서 자란 녹운이 얼마나 영리한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녹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안 장공주가 코웃음 치고는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영원이 대체 어떤 물건인지, 정말로 사고뭉치가 맞는지 우리는 모르지. 하지만 영진산(鎭山)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아. 그거면 충분해. 영진산의 용병술은 원래 담대하고 세심해. 주도면밀한데 또 희한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 가장 용한 사람이야. 용병술이 그러니, 사람도 그렇게 다루겠지. 그런 사람이 사고뭉치를 경성으로 보낼까? 보물 같은 여식과 가문에 화를 초래할 일을 할까?”

“그럼…….”

녹운의 안색이 조금 변해서 눈살을 찌푸리며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말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가아가 올해 여덟 살이지? 영 황후가 참 긴 세월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네. 쯧! 우리가 알게 뭐람. 난 출가한 사람이고, 번뇌사(煩惱絲)인 이 머리카락을 몽땅 밀어버릴 일만 남았는데,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야! 청정하게 수련하기도 바쁜데 이런 쓸데없는 일에 관여할 겨를이 어디에 있어. 누가 황상이 되든 다 똑같아!”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돌연 성가신 듯 손을 저었다.

“정말 짜증 나네. 법회를 여는데도 이렇게 성가시게 하다니. 그만둘래, 돌아가자!”

복장 장공주는 뒷짐 진 채 방향을 틀어 다른 작은 길로 올라서 성큼성큼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복음각에서 말에 오른 영원은 고삐를 흔들며 단숨에 5리를 달렸다. 그리고는 자기를 기다리는 복백 일행이 보이자 그제야 고삐를 잡고 속도를 늦췄다.

길가 숲에서 기다리던 복백 일행은 말을 몰고 그의 뒤를 따랐다. 복백은 영원에게 다가가서 목을 내밀고 영원의 목에 퍼렇게 든 멍을 바라봤다.

“보긴 뭘 봐!”

영원이 고개를 비틀고 버럭 고함쳤다.

“이렇게 다친 건 오랜만이군요.”

영원이 고개를 틀자, 복백이 얼른 다른 쪽을 살폈다.

“흥!”

영원이 고개를 돌리고 목을 좌우로 비틀었다.

“제기랄. 내가 미친 여인네처럼 싸우다니 창피해 죽겠군! 내 형제들이 그런 꼴을 본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고생하셨습니다, 칠야.”

복백은 얼른 다정하게 한마디 하고는 실수는 하지 않았냐고 덧붙였다. 위봉낭을 향해 한 말이고, 위복낭은 영원을 힐끔 보고는 미소 지었다.

“예. 확실히 힘들게 싸우시긴 했지만요.”

복백은 길게 안도했다. 반나절 동안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자기네 칠야가 체면 떨어지게 싸웠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너무 심하게 때리지 않았는지, 오로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랬다가는 큰 사달이 날 테니까.

위봉낭은 고개를 저었다.

“다들…… 병아리 같아서, 원. 칠야의 실력이 점점 훌륭해집니다. 기력도 딱 알맞게 쓰셨고요.”

영원이 혀를 찼다.

“이러니 경성에 사내가 없고, 있어도 여인보다 못하다고들 하지. 우리 북부의 여인이 그것들보다 낫겠네.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영원이 또 혀를 찼다. 여간 화가 난 게 아닌 듯했다.

복백은 빙긋이 웃으면서 아무리 봐도 고소한 얼굴로 가차 없이 영원의 말을 받아쳤다.

“본인이 생각해 낸 작전이잖습니까.

말씀하실 때 저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굳이 하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굳이 몸소 나서야겠다면서요. 칠야, 말씀 좀 해 보세요. 오는 내내 친 사고만 해도 적지 않습니다. 경성에 계신 사노야는 요즘 걱정이 심해서 흰 머리가 다 생긴답니다! 칠야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것 있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경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명성이 이 꼴인데, 경성에 가까워진 지금 굳이 묵 승상이 쥐면 터질까 불면 꺼질까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쥐어패다니. 칠야, 왜 이렇게 하는지는 알지만, 민심은 어쩝니까? 온 경성 사람이 칠야를 어찌 생각하겠냐고요. 누가 상대나 해주겠습니까? 네? 그리고 황상은……. 아이고!”

“묵 승상의 보물 같은 손자뿐만 아니라, 묵 승상 외손자이자 여 승상의 조카 손자인 안원후 세자 소자람, 그리고 수국공 주가 육소야 주유민도요. 주 귀비가 제일 아끼는 조카 주유민은 반숙 돼지머리로 만들었고요.”

위봉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의 움직임을 따라 위아래로 몸을 흔들며 한가롭게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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