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71화 (71/463)

71화: 우연한 만남 二

여염은 이신에게 배웅할 것 없다고 손짓하며 돌아서서 정자에서 나갔다. 그리고는 계소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림사 측문으로 달려가 안으로 들어갔다.

“영해, 여 공자와 계 공자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문 이야는 멀리서 여염과 계소영이 측문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돌아섰다. 시선은 이신에게 향했는데, 말은 영해에게 물었다.

이번 ‘우연한 만남’은 아무래도 승상의 뜻이로군. 자신을 이신 곁으로 보내고 또 여염을 보내서 친분을 맺어 문회에 참가하도록 하다니…….

아무래도 오늘 밤에 승상께 서신을 써서 이신에 대해 제대로 말씀드려야 할 듯했다.

“여 공자는 분명 여 승상의 적장손이겠지요. 아들, 손자 중에 여 승상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바로 이 여 공자라고 합니다. 계 공자는 계 천관의 적장자고요. 계 황후가 계실 때 가장 아끼던 조카라고 하더라고요.”

영해가 웃으며 매우 빠르게 대답했다.

경성의 만사통으로서 여 승상과 계 천관 댁에서 가장 출중한 자제를 모른다면 웃음거리가 될 일이지! 하물며 상대가 이름을 밝혔는데!

“정말…… 이런 우연이!”

이신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경성에 오자마자 양자가 되더니, 문 이야처럼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선생을 만났다. 그러고 오늘은 여 승상 손자와 계 천관의 장자 같은 경성 권문 세도가 자제를 우연히 만나서 매우 유쾌하게 대화를 나눈 데다가 문회까지 초청받다니.

“깊이 생각할 것 없네.”

문 이야는 쥘부채로 이신을 두드리며 사찰에 갈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경성은 세도가와 관리가 넘치는 곳이네. 승상 가문의 공자가 아니라 황자, 황손을 마주치는 일도 흔하디흔하네. 가세, 곧 법회가 시작되네. 구경이나 하세.”

오늘 보림사엔 귀한 사람들이 운집하는 매우 비범한 때라서, 여염 일행은 측문으로 들어가지만, 이신과 문 이야는 산문으로 돌아가서 정문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보림사 산벽을 따라 모퉁이를 돌면 정문이었다. 맨 앞에서 가던 영해가 막 모퉁이를 돌아서 제대로 중심을 잡기도 전에 진왕이 보였다. 뒤이어 진왕 곁을 바짝 따르는 강환장이 보였다.

영해는 후다닥 다리를 거두고 뒤로 물러나서 이신과 문 이야를 돌아봤다.

“대야, 이야, 진왕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야도요.”

이신은 영해를 밀치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서 몸을 빼꼼 내밀고 산문 쪽을 바라봤다.

“진왕 곁에 푸른 장삼을 입은 사람이 바로 고야입니다.”

강환장이 누구인지 보려는 걸 짐작한 영해가 뒤에서 나지막이 알려주었다. 이신은 진왕을 보지 않고 오로지 진왕 곁에 있는 남색 옷을 입은 강환장만 주시하며 그들이 절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내 바라봤다.

문 이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망할 입이 용한 때가 있군. 황손, 황자도 흔하디흔하다고 하자마자 정말로 황자를 마주쳤잖아. 자네 제부도 꽤 영리하군. 진왕을 잡다니. 아무도 가지 않은 한적한 길을 노릴 생각을 다하다니, 쉽지 않은 일이야.”

“속셈이 너무 깊은 겁니다.”

요즘 들은 일을 떠올린 이신은 말로 다 못 할 분노와 혐오를 느꼈다.

“우린 좀 기다렸다가 들어가세.”

문 이야는 다들 뒤로 물러나라고 눈짓했다. 이신이 왜 분노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건 이들의 집안일이라 상관할 이유가 없었다.

“제부가 진왕 줄을 잡았다니, 자네는 진왕을 멀리하는 게 좋네. 둘 다 같은 줄을 잡을 필요가 없고, 또 하나는 현재 상황에서는 순수한 신하가 되는 게 가장 앞날이 밝으니까.”

“예.”

이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분은 더 우울해졌다. 강환장은 겉보기엔 출중한 인재처럼만 보이고 전혀 추잡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동을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데, 자기는 분노할 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강가와 강환장을 무너뜨려? 그러나 강가와 강환장을 무너뜨리면, 강가 며느리인 이동도 따라서 무너지는 것일 텐데.

얼른 위로 올라간 다음 강환장 목을 틀어쥐면 아동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지. 강환장의 목을 틀어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언제 올라갈지는 둘째치고, 설령 1, 2년 안에 강환장의 목을 틀어쥐게 되어 아동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핍박한다고 해도, 그렇게 강요해서 얻는 감정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화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동이 해탈할 수 있으니. 정 안 되면 나중에 지방직을 요구해서 어머니와 아동을 데리고 경성에서 멀리 떠나 좋은 혼처를 찾아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개국이래, 작위 있는 집안에서 휴처(休妻)하거나 화리한 선례가 없었다. 이미 자세히 조사해 봤는데, 칠거지악을 저지른 여인도 기껏해야 집안 사당에 가두고 평생 수절하게 할 뿐이었다.

이야 말이, 예부에 그런 규정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 규정을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문 이야가 넋이 나간 이신을 쥘부채로 쿡쿡 찔렀다.

“아동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이신은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자기가 생각해낼 방법이 별로 없으니, 아동의 일을 해결하려면 문 이야처럼 어둡고 음험한 면도 통찰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 이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눈빛으로 이신을 삐딱하게 보다가 한참 만에 느릿느릿 말했다.

“자네 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모르네. 다만 자네 누이, 눈빛이 깊고 그윽해. 겨우 여남은 살인데 눈빛은 마흔, 쉰이 된 사람처럼 깊지. 단순한 사람이 아닐세. 다른 건 모르겠지만, 구질구질한 강가 일은 자네 누이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만 까딱하면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네.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지,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네.”

이신이 되물었다.

“구질구질한 일은 처리한다지만, 마음은 어찌합니까.

국사(國士: 온 나라에서 받들고 추앙하는 서생)가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주군이 그를 국사로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강환장은 지금 아동을 일심동체인 아내로 대하지 않습니다. 아동이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강환장의 진심을 얻을 수 있답니까? 그가 진심으로 아동을 아내로 대하겠습니까?”

이신이 자제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따지듯 묻자, 문 이야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이런 일은 나도 모르네. 나는 시녀도 부려본 적 없는걸! 이런 일은 몰라!”

“제가 조바심을 냈습니다.”

이신은 기운이 빠졌다. 여인이 혼인 상대를 한 번 잘못 고르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서가아는? 진왕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오너라. 우린 피해서 가자.”

문 이야가 서가아에게 분부했다.

이가 낭자가 몹쓸 사내와 혼인한 일은 앞으로 거론하지 않는 게 좋겠군. 나는 공무로 온 것이지, 집안일에 끼어들려고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신과 문 이야가 사찰 밖에서 진왕과 강환장을 봤을 때, 이미 사찰 안에 있던 이동과 장 태태 역시 두 사람을 봤다. 이동과 장 태태 일행은 천왕전에 휘날리는 경번 뒤에서 진왕과 강환장이 사람들을 따라 긴 회랑을 지나 천왕전을 지나가는 걸 바라봤다. 장 태태가 이동을 바라보자, 이동은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만 내려가요. 법회는 됐어요. 저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

장 태태는 시원스럽게 대답했고, 모녀는 돌아서서 천왕전에서 나와 긴 회랑에 바짝 붙어서 인파를 거슬러 밖으로 나갔다. 산문에 도착했을 때, 서가아가 인파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선생과 대야는?”

만 어멈이 서가아의 어깨를 탁 내리치자, 서가아가 화들짝 놀라다가 만 어멈인 걸 보고 순간 활짝 웃으며 장읍했다.

“어르신이었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과 대야는 저쪽에 계십니다. 조금 전에…….”

“안다! 소리 죽여라!”

만 어멈이 서가아의 말을 막았다.

“예! 어르신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이야가, 피해서 가자고 그…… 어디로 가는지 보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천왕전을 지나갔다. 태태와 낭자는 경독을 듣지 않고 산에서 내려가서 복음각에 가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고 대야께 전해라. 어차피 점심 먹고 돌아갈 거니까 서두를 것 없다고 말씀드리고.”

만 어멈이 강환장이 간 방향을 가리켜 알려주고 분부하자, 서가아는 공수하고 돌아서서 날렵한 물고기처럼 인파를 헤치고 천왕전으로 동정을 살피러 향했다.

산문 앞엔 법회에 참석하러 온 선남선녀로 가득했다. 이동과 장 태태는 아예 길을 돌아서 작은 길을 통해 산에서 내려와서 복음각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독채로 들어갔다.

진왕은 강환장을 데리고 보림사 제일 뒤 마당으로 들어가 주지 스님 거처 맞은편의 정실(靜室: 불교나 도교 사원에서 승려나 도사들이 거주하는 방) 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고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사환을 시키지 않고 뵙길 청한다는 말을 직접 했다.

진왕은 요절한 이황자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자마자 주 태후 궁에서 자랐다. 이황자가 요절했을 때, 그는 이미 철이 들었을 때였고 충격으로 병이 났다. 회복한 후에는 툭하면 거처 밖에 나가서 놀던 예전과 달라졌다.

그가 성장하기 전, 그리고 복안 장공주가 궁 밖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유일하게 드나들던 곳이 복안 장공주의 거처였다. 감히 그를 주 태후 거처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는 것도 복안 장공주뿐이었다. 장공주는 그를 데리고 화원에 가고, 조회에 가고, 궁 밖으로 꽃등 구경도 데리고 갔다. 심지어 성 밖으로 멧돼지 사냥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주 태후가 눈을 감으면서 그를 복안 장공주에게 부탁했다. 복안 장공주는 발인하러 궁을 떠난 이래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성 밖에 기거했지만, 진왕의 종복들은 진왕의 일상생활 모두를 복안 장공주의 지시에 따랐다. 진왕이 출궁하기 전에 곁에서 모시던 사람도 모두 복안 장공주가 고른 사람들로, 그가 무사히 자란 것은 고모인 복안 장공주가 세심히 돌본 덕분이라고 해도 좋았다. 게다가 가장 즐겁고 신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엔 항상 고모가 곁에 있었다.

그에게는 복안 장공주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그녀를 향한 친근감과 존경심은 생모인 양빈을 훌쩍 뛰어넘었다.

정실로 들어간 진왕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은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며 깊이 장읍했다.

“고모님.”

복안 장공주의 시선은 진왕이 아니라 같이 들어온 강환장에게 향했다. 장공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진왕은 재빨리 그를 소개했다.

“왕부에 새로 들어온 장사, 수녕백 세자 강환장, 자는 소화입니다. 소화는 학식이 깊고, 안목이 독특하고, 견해가 매우 고명합니다.”

강환장은 공손하지만 거리낌 없이 미소를 지으며 장삼을 젖히고 무릎을 꿇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그는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지 않고, 복안 장공주 아래 앉은 전 노부인과 백 노부인을 쉴 새 없이 힐끔거렸다.

이 두 노부인 모두 매우 장수했다. 이른바 나이 들어 죽지 않은 것은 악인이라고, 이 두 악인 때문에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모른다. 두 여인이 제때 깔끔하게 죽었더라면, 계 천관은 상을 치러야 했을 것이고, 조금만 조작하면 천관 자리는 자신의 수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묵칠 아비도 그랬다. 속 시커먼 묵칠 아비가 조정에서 사사건건 묵칠을 위해 계략을 세우고 꾀를 내주지 않았다면, 묵칠이 사사건건 그의 앞길을 막을 일도 없었고, 기껏해야 두어 달이면 조정에서 정정당당하게 묵칠을 배척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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