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보림사
이동은 어머니와 같은 마차를 타고 한담을 나누면서 느긋하게 보림사에 도착했다. 시간이 아직 일러서, 마차는 복음각 후원에 세워두고 모녀는 차와 간식을 먹고 쉬다가 산에 오르기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복음각 모퉁이에 있는 독채는 세 면이 창인데, 한쪽 창은 보림사 산문 쪽으로 나 있고, 다른 쪽 창은 경성에서 오는 쪽으로 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탁 트인 복음각 대당을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막 손을 씻고 자리에 앉자마자, 경성 쪽에서 마차 몇 대와 사람들이 유유히 다가왔다. 맨 앞에 있는 마차 곁에 스물 남짓한 사내가 말을 타고 따랐다. 청수한 용모에 뛰어난 품격이 엿보이는 사내는 다른 곳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남색 두봉 사이로 월백색 장삼이 드러났다.
“어느 댁 공자일까. 기세가 비범하네. 다만 이런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구나.”
장 태태와 이동은 갈수록 가까워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속닥속닥 평가했다. 모녀 둘이 있을 땐 원래 말을 잘 가리지 않았다.
“마차에 문장이 있어요.”
이동은 말을 멈추고 사내 곁의 마차를 가리켰다.
“계 천관 댁이네요. 아마도 계 천관 아들이겠네요.”
“선황후 계씨 가문? 어쩐지, 기세가 비범하더라니. 계 황후라……. 휴, 혼인 운이 안 좋았지.”
장 태태는 혼인 운이 안 좋았던 딸을 연상하고 곧바로 얼굴이 흐려졌다. 이동은 어머니의 흐려진 얼굴을 못 본 채 여전히 계 천관의 장자 계소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전에, 진왕이 태자가 되기 전보다 한참 전엔 계소영과 강환장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수녕백부에서 고상한 척하며 여러 모임을 열 때, 계소영은 적극적으로 자리를 빛내면서 오래되어서 녹이 슨 청동 골동품을 여러 건 수녕백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그와 강환장의 사이가 틀어진 게 언제였더라? 주 귀비를 장의(莊懿) 태후로 추서했을 때였던가. 장의라는 글자가 문제였었는지, 아니면 추서를 하느냐 마느냐로 다퉜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주 귀비가 장의 태후로 추서된 후에 강환장이 수시로 욕해대던 사람 중에 계소영이 늘었다는 것만 기억났다.
나중에 전 노부인이 했던 이런저런 말들에서 조금씩 갈피를 잡았다. 계가는 계 황후의 죽음으로 주 귀비를 몹시 원망했고, 주씨 가문 전체를 통한할 정도로 깊은 원한이 생겼다. 그러나 황상과 양 태후는, 특히 양 태후는 줄곧 주가를 예우했다. 주가의 부귀영화는 양 태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졌다. 양 태후가 말하길, 사실 주 귀비는 그녀를 나쁘게 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적어도 목숨을 살려줬다고. 그러더니 갈수록, 주 귀비가 그녀를 자매처럼 대했다고 이야기가 변해갔다. 해가 갈수록 잘해줬다고 하더니, 나중엔 주 귀비가 그녀를 지극히 경애하고 언니처럼 여겼다고, 은혜가 태산 같다고까지 했다.
“동동, 앉아서 쉬렴. 이것도 좀 맛보고. 매우 향긋하단다.”
장 태태는 창가에 서서 넋을 놓은 이동을 살며시 불렀다. 이동은 정신을 차리고 장 태태 곁에 앉아 장 태태가 가리키는 백채(白菜) 포자(包子: 소가 들어간 만두)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향긋했다.
두 사람은 잠시 더 차를 마시다가 아래로 내려가 보림사 산문으로 들어가 산으로 올랐다.
대부분의 귀빈이 아직 길에 있을 테지만, 보림사에서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경번(經幡: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 불교 교리 및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음)이 펄럭이고, 향불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불상의 위엄이 느껴지는 장엄한 분위기 가운데 화려함이 느껴지는 절 안엔 거의 사람이 없어서 상당히 청정했다.
이번 생에는 처음으로 절에 발을 디디는 것이었다. 이동은 불전 안으로 들어가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미륵불 앞에 무릎 꿇었다.
이런 일이 어째서 내게 일어났을까. 불조께서 날 연민하신 걸까? 바로 잡을 기회를 주시려고?
이동은 미소 지으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미륵불을 올려다봤다. 불조의 눈은 삼천대천 세계를 본다고 했다. 그런 불조 앞에 자신은 개미처럼 하찮은 존재였다.
그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전생이 비참하고 슬펐던 건 다 자기가 어리석은 탓이지, 다른 사람 탓이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비참하고 슬펐던 걸 아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세상 사람 눈에 그녀는 평생 화려하고 부귀하게 보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나날이 더 호사스럽고 부귀해지고, 금상첨화의 나날을 보내며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존귀를 다 누렸다고 여겼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인과(因果)라고 무지 큰스님이 말했었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결과는 또 무엇일까?
세상만사를 통찰하는 불조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장 태태는 넋 나간 것 같은 딸의 얼굴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이 아팠다. 딸이 차츰 정신을 차리는 것 같더니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고 일어섰다.
“다리 저리지 않으냐?”
장 태태는 깊이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은 참을 수가 없어서 허리를 숙여 이동의 치맛자락을 두드려 주며 나직이 물었다.
“어머니, 나 괜찮아요.”
이동은 몹시 쓰린 마음으로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함께 뒤쪽에 있는 정전으로 들어갔다.
정전 앞 거대한 적동(赤銅) 향로 옆에 스물 남짓한 젊은 여인 둘이 반질반질한 향로를 닦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잿빛 마 승복을 입고 손엔 두껍고 커다란 하얀 천을 들고 향로를 꼼꼼히 이리저리 닦고 있었다. 향로 저쪽, 이동과 장 태태 맞은편에 선 여인은 키가 크고 눈매가 담박했고, 이동 쪽에 가까운 여인은 덩치가 작은데 뒷모습만 봐도 가냘프고 나약한 느낌이었다.
이동 쪽에 선 가냘픈 여인이 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여인의 시선을 마주친 이동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굳었다.
복안 장공주잖아?
복안 장공주는 얼이 빠진 듯한 이동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동은 서둘러 무릎을 깊이 숙이고 지극히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복안 장공주는 향로를 닦던 손을 떼고 조금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이동과 장 태태, 그리고 두 사람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이동은 예를 올리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서 장 태태를 잡아끌고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계속 문턱까지 뒷걸음질 치면서, 어리둥절한 장 태태를 끌고 돌아서서 왔던 길을 따라 전전으로 돌아갔다.
복안 장공주는 가볍게 하, 하더니 다시 하얀 천을 들고 마음이 붕 뜬 듯 대충 향로를 문질렀다. 그러다가 목을 빼고 자기를 바라보는 심복 시녀 녹운을 향해서 이동이 사라진 방향을 턱짓했다.
“어느 가문 식솔인지, 좀 알아봐.”
“네.”
녹운은 한 어멈을 향해 손짓하고는 대전 안에서 재빠르게 나갔다가 금세 돌아와서 보고했다.
“수녕백부 세자 부인 이씨 이동과 모친 장 태태입니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이 향로를 문지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녹운을 바라봤다.
“우리 예전에 저들을 만난 적 있나?”
“아닌 것 같아요.”
녹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녹운은 기억력이 좋아서 한 번 본 건 웬만해서는 모두 기억했다.
“자주 보림사에 오는 게 아닐까요? 이씨는 공주 전하를 봤었고, 전하는 못 본 거죠.”
“그런 거라면 공손하게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지, 귀신 본 것 같은 저 꼴은 뭐야?”
복안 장공주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너도 이씨 봤지? 몇 살로 보였어?”
“열몇 살로 보였어요. 어리더라고요.”
녹운은 이동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는 고개 숙인 채 자리를 피하는 것만 보았을 뿐 표정이나 눈빛은 보지 못했다.
“열몇 살? 그래, 그렇게 보이긴 했지. 하지만! 이씨라……. 재미있네. 이씨에 대해서 좀 알아봐. 그리고 수녕백부랑 세자도.”
“수련하면서 청정하게 지내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심심풀이일 뿐이야!”
복안 장공주는 향로를 툭툭 치며 가차 없이 녹운의 말을 잘랐다.
“전 노부인은 왜 아직이야? 갈수록 늦게 오네? 팔 떨어지겠다!”
녹운은 어이없다는 듯 복안 장공주를 흘깃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하얀 천을 쥔 채 향로에 기대서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백 노부인은 사리에 밝은 사람인데, 어째서 그렇게 내려놓지 못할까. 계 황후가 세상을 떠난 게 언젠데, 뼈도 다 녹아 없어졌겠네. 뭘 더 하려고? 뭘 더 할 수 있어서? 나조차도 이런 귀신도 살지 않을 곳으로 도망 온 거 안 보인데? 어째서 하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들뿐일까.”
“나이 들수록 고집스러워진다잖아요. 그냥 안 만나시면 되잖아요.”
녹운은 계 황후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산문 밖에서 달려들어 온 사미승 하나가 녹운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전 노부인 오셨네요!”
“드디어 오셨네요!”
녹운이 매우 반기며 말했다. 그녀 역시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복안 장공주가 천을 녹운에게 던져 주었다.
“빌어먹을 향로를 그만 닦아도 되네. 됐어, 들어가자. 향 피우고 인사치레 몇 마디 하다 보면 전 노부인이 오겠지.”
장 태태는 영문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눈치 빠르게 이동을 따라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모습으로 뒷걸음치며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저게 누구냐?”
“복안 장공주예요.”
이동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나가서 이야기해요.”
장 태태는 놀라움을 감췄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예 전전 옆의 작은 측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모녀는 향객이 쉬어가는 작은 정자에 가서 잠시 앉았다가 법회가 시작되면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신과 문 이야 일행은 뒷산에서 경치 구경하며 보림사 뒷문에 도착했다. 환가아를 내려보내서 법회가 아직 멀었다는 소식을 들은 문 이야는 이신에게 주위를 살펴보라고 했다.
“근래 보림사 주변에 운치 있는 정자가 꽤 생겼네. 정자 안에 석탁과 의자가 있고, 주변에 찻주전자도 두었지. 산이라 땔감은 얼마든지 있고. 이런 편의가 있어서, 보림사 주변은 문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 되었네. 아침 종소리와 유유한 독경 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음미하며 풍경을 감상하는 것, 그야말로 그런 가짜 은둔 거사들의 입맛에 딱이지.”
“이야, 너무 각박한 말씀입니다.”
이신이 헛웃음 지었다.
종복을 데리고 경치가 좋은 정자를 찾아낸 영해는 정자 앞에 서서 종복과 사환을 지휘해서 불을 때고 저 멀리서 샘물을 길어서 차 끓일 준비를 했다. 정자 안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지고 온 세마포도 탁자 위에 깔고, 의자에도 세마포 방석을 두었다. 환가아와 서가아는 자등 산장, 그리고 복음각에서 가지고 온 간식들을 줄줄이 올려놓았다.
준비가 적당히 된 걸 보고, 영해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이신과 문 이야를 부르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