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첫 만남 一
“은표는 또 무슨 일이야?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대?”
“예. 최야도 이상하답니다. 자세히 알아본 바로는, 그날 밤에 고사현이 그 상자를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않은 게 맞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덕융 전장에 갔을 땐 은표가 다 백지가 되었고요. 최야 말씀이, 생각으로는 10만 은자가 사라진 게 맞을 것 같답니다. 고가 부자가 숨기고 다시 강가를 협박한 게 아니라요. 그런데 어떻게 감쪽같이 바꾼 건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답니다.”
“이씨의 혼수 중에 가짜가 얼마나 된대?”
“최야 말이 적지 않을 거랍니다. 최야가 손에 넣은 것만 해도 서른 가까이 된다고요. 고사현이 끌어안고 돌아간 것 중에 진짜가 두어 개 있고, 최야가 강부 하인에게서 서너 개 얻었고요.”
“이씨와 이가를 제대로 조사하라고 최신에게 전해. 재물신이라는 장 태태, 그리고 장 태태가 최근에 양자로 들은 이신도.”
영원이 한쪽 눈썹을 잔뜩 치켜뜨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그 이씨, 재미있네. 지금까지 벌어진 사소한 일들, 분명 그녀가 수완을 부린 거겠네. 강가와 고가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군. 강환장이 자기에게 잘못한다는 이유로? 성깔 있네. 나는…….”
마음에 든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 반응이 빨라서 재빨리 집어삼켰지만. 갓 혼인한 신부를 아무렇지 않게 마음에 들어 하면 안 되지!
장 태태와 이신은 아주 늦은 시간에야 자등 산장으로 돌아왔다. 장 태태는 화색이 가득했다. 불전 앞에서 점대를 뽑고, 이신의 사주도 진지하게 점쳐보았는데, 모두 대대대길이었다. 두어 달 동안 쌓인 울적한 마음이 그 대대대길 덕에 훨씬 가라앉았다.
이동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불러서 온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문 이야도 왔고, 희색 가득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장 태태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일가 세 사람이 즐겁고 유쾌하게 식사를 마친 후, 이동은 차를 마시며 문 이야 이야기를 꺼냈다.
“문 이야는 재능이 뛰어난 분이에요. 지난 달에 강환장이 손님을 대접할 때, 마침 지나다가 몇 마디 엿들었어요. 마침 상원현 문 이야라는 사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세도가 출신이고, 문 이야의 부친과 숙부 모두 대단하대요. 부친은 형명(刑名: 법률. 형법)을 배우고 숙부는 전량(錢糧: 재정)을 배웠는데, 문 이야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절었고, 여덟 살쯤부터 숙부 밑에서 전량을 배우고 열다섯 즈음엔 숙부를 넘어섰대요. 그때 그의 숙부는 하도총독 관아에서 일했고요.”
“어느 하도총독?”
이신이 놀라서 물었다.
“그건 못 들었어요.”
이동은 너무 자세히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야기한 것만으로 어머니는 벌써 의심할 것이다.
“문 이야는 전량 공부를 끝내고 부친에게서 형명을 배웠대요. 양회(兩淮: 강소성 회하淮河 이남과 이북을 통틀어 부르는 말) 헌사(憲司) 관아에서 일하면서 몇 년 더 배웠는데, 헌사가 죄를 지어서 부친이 휘말렸대요. 압송해서 경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병들어 죽었고요.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인지, 어찌 됐든 숙부도 옥에 갇히고, 가산을 몰수당하고. 나중엔 숙부 집안까지 통틀어서 온 가문에 문 이야 혼자 남았대요.”
이동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누님 하나뿐이더라고요. 친누님인지 사촌인지는 몰라도 벌써 혼인했고요. 문 이야가 형명, 전량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 대사에도 밝대요. 학식도 넓고요. 문 이야를 강환장에게 추천하려고 말을 꺼낸 것 같아요. 오라버니가 내년에 진사가 되면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될 텐데 우리 가문엔 관리 출신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오라버니 곁에 문 이야처럼 형명, 전량에 정통한 선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녹매를 보냈어요.”
“환장도 문 이야를 점찍었고?”
장 태태의 눈빛에 짙은 의문이 감돌았다. 그녀가 가장 마음 쓰는 건 역시 강환장이었다. 어찌 됐든 이동의 지아비니까. 장 태태 물음의 속뜻을 알아차린 이신은 눈을 내리깔다가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어머니,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문 이야 일이 아니더라도, 강환장은 오라버니…… 어머니가 양자로 들인 사람이 누구든 다 미워할 거예요.”
이동은 티 나지 않게 장 태태의 본의를 왜곡했다.
“저는 그게 걱정이라서 다급하게 문 이야를 모신 거예요. 오라버니는 막 호주에서 와서 경성을 잘 몰라요. 곁에 사람이 필요해요. 유능한 사람이 시시각각 오라버니 대신 상황을 주시해줘야 해요. 아니면…….”
장 태태는 대답 없이 슬프고 답답한 얼굴로 이동을 바라봤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지아비를 원수같이 여기다니. 강환장을 적대하는 딸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동, 강환장과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니. 이런저런 언짢은 게 있어도…….”
장 태태와 이동의 각자 다른 속내를 예민하게 알아차린 이신이 장 태태보다 먼저 나서서 이동을 설득하려 했다.
이동은 이신의 말을 잘랐다.
“언짢은 게 아니에요. 그는 우리 이가의 은자를 원해요. 모든 재산을 원하면서 나는 필요 없어 해요. 심지어 내가 죽길 바라요. 어머니도요. 지금은 이제 오라버니까지 죽이고 싶을 거예요!”
이동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과장하는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도 그를 만나보면 알아요. 물론 잘 감추겠죠. 하지만 오라버니가 마음 써서 살펴보면 분명 알 수 있어요. 보면 딱 알아요. 오라버니, 조심해야 해요. 절대로 조심해야 해요. 강환장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에요.”
장 태태와 이신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동을 바라봤다. 너무나 두려운 말이었다. 이동은 두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내린 채 찻잔을 문질렀다.
고심하고 고심해서 문 이야를 모셨다. 문 이야를 그녀가 손에 넣으면, 강환장이 그녀도 자기와 같은 상황인 걸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황량몽에서 함께 돌아온 것을 말이다.
그런데 강환장이 여기저기 문 이야를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대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문 이야의 고향이 상원현이라는 걸 강환장이 왜 모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왜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모르더라도 얼마든지 금세 문 이야를 찾아낼 것이다. 강환장이 다시 문 이야를 찾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문 이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미 똑똑히 겪었었으니까.
그해, 강환장이 공부상서 자리에 있을 때, 호부를 관리하는 계 상서와 중서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문 이야가 그녀를 불러 도움을 청했고, 두 사람이 같이 그해 가을 곡식에 손을 썼다.
양곡의 시세를 올리고, 흉년에 쓸 곡식을 사들이고, 공정매매 시세를 올렸다. 그는 물품으로 납부하는 조세를 돈으로 환산하고, 세금과 같은 금액의 양식을 백성에게 구매하고, 조정에 물건과 돈을 납부하고, 남는 군량을 사들여 축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곡식을 확보했고, 호부의 전량법에서 허점을 찾아내고 그 허점을 이용했다. 그 기상천외한 수단, 정확한 안목, 확실한 결단, 강렬한 수완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그해 가을, 그녀는 그를 도와 시장의 곡식을 뒤집어 놓았다. 강남의 풍부한 수확물을 성공적으로 거두어 와서 기근을 무사히 넘기고 큰 난리를 막았다. 계 상서는 그 일로 완전히 실패하여 모양새가 말이 아니게 되었고, 강환장과 경쟁할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그녀는 진이 다 빠져서 큰 병을 앓았다. 어머니의 병, 어머니의 죽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몽사몽,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거창한 장례로 어머니를 보냈다고 나중에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강환장은 이제 중서성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 곧 이 나라에서 가장 젊은 승상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신의 탄핵서 한 장에 중서성에서 튕겨 나와서 춥고 황량한 북으로 쫓겨났다.
그가 떠날 때 그녀는 몸져 누워 있었다. 버티지 못할 줄 알았다. 버티고 싶지도 않았다.
이동은 마음이 먹먹해졌다. 예전에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질렀었나.
문 이야를 이가로 모셨으니, 강환장이 그녀도 자기처럼 돌아온 걸 눈치챌 것이다. 어떻게 나올까? 분노? 두려움? 경악? 뭐가 됐든 분명 죽이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를 계산해 봐도, 차라리 강환장이 사실을 아는 한이 있어도 문 이야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 걸 막아야 했다. 그의 곁에서, 그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와 대립하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은 강환장이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다. 하지만 문 이야는 두려웠다. 그녀 자신은 문 이야의 상대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왔대도, 어머니, 오라버니가 있대도, 문 이야와 대립할 자신이 없었다.
이동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영 대조봉 아들, 영해요. 조봉 일을 배우기 싫다고 경성에서 이런저런 잡기를 배우며 살고 있어요. 만 어멈이 저번에 영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제법 자리 잡고 사는 것 같더라고요. 차라리 오라버니 곁에 두는 게 나아요. 경성에 꽤 이름이 알려졌고, 거의 토박이처럼 산대요. 오라버니 곁에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강환장이 아는 게 두렵지 않으니 영해도 데려다 써도 그만이었다.
“그래.”
장 태태가 멍하니 대답했다. 딸은 ‘깨달았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입을 열지 않았고,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상상을 뒤엎는 무수한 사람과 일이 있지 않은가. 그녀도 겪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문 이야가 잘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밝아 있었다. 밖을 지키던 두 사환은 문 이야가 깨자, 한 사람은 준비해 둔 입 헹굴 소금물과 향편을 들고 들어가 시중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후다닥 달려가 세수할 뜨거운 물을 들고 왔다.
개운하게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은 문 이야는 체면 차리지 않고 침상 머리맡에 있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켜며 두 사환을 향해 손짓했다.
“여긴 됐다. 볼일 보러 가라.”
“저희는 이야를 모시러 왔습니다. 이야, 아침 식사 하시겠습니까?”
“음?”
문 이야는 휘둘러대던 팔을 멈추고 뒷짐 지고 돌아서서 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말끔한 눈매, 맑고 또렷한 눈빛. 대단히 영리해 보이진 않아도 아둔해 보이진 않았다. 사환으로 딱 적당했다.
“나를 모시러 왔다고? 이름이 무엇이냐? 나이는?”
“아룁니다, 나리. 소인 장가, 이름은 환입니다. 다들 환가아라고 부릅니다. 올해 열여섯입니다.”
아까 대답한 사환부터 자기 소개했고, 다른 사환이 말을 이었다.
“소인은 유이서입니다. 열넷이고요. 관사 어르신들은 이서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고, 서가아라고 부릅니다.”
“이서라, 그럼 형님이 있느냐?”
“예!”
서가아는 명백히 놀란 얼굴로 문 이야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유대서라고 합니다. 소인보다 세 살 많습니다. 지금 약방에서 일하는데, 벌써 처방대로 약을 지을 줄 압니다.”
말투에 뿌듯함이 가득 느껴졌다. 문 이야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웃음이 나왔다.
“형님이 약을 지을 줄 안다고 뿌듯해하는 것 좀 보게! 너는 서가아고, 그럼 네 형은? 뭐라고들 부르느냐?”
“아룁니다, 나리. 유대라고 부릅니다.”
서가아가 흘깃 문 이야기를 쳐다보는데, 말해야 아느냐는 눈빛이었다. 문 이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놈! 내가 네게 말려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