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조용한 안정
“아이고,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을 땐 또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굴까.”
전 어멈이 오 어멈을 흔들며 나무랐다.
“눈에 딱 보이는 길이 있잖아. 우리 오라버니 일가를 보고 몰라? 우리 올케가 지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복이 굴러왔다고,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모른다고!”
“대내내 말이야?”
오 어멈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내내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대내내 곁엔 뛰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만 어멈만 해도,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해서 자기는 만 어멈보다 훨씬 못하긴 했다.
“대내내 곁에 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무슨 필요가 있어서…….”
“전에는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은 있지.”
전 어멈이 오 어멈을 흘깃 바라봤다.
“고 이낭?”
“왜 아니야.”
전 어멈이 바짝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나도 알아. 대내내 곁에 뛰어난 사람이 많아서, 우리 같은 사람은, 능력을 따지면 두드러질 게 없고, 정을 따져도 정이랄 게 없지. 하지만 지금은 기회가 알아서 굴러왔잖아. 그 고가 계집이 정말로 수녕백부를 잘 다스리면, 대내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체면 문제가 아니라, 늙어 죽을 때까지 성 밖에 살게 되겠지.”
오 어멈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니까! 이럴 때 언니가 도와주면, 얼마나 고맙겠어. 대내내가 돌아오면……. 언니, 언니 나이도 있는데 그때 아예 그만둔다고 하라고. 대내내가 언니를 홀대하겠어?”
“대내내는 혼수를 다 강가로 넘겼는데.”
오 어멈은 동요했다. 좋은 논 2백 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동요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논은 눈 깜빡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다.
“언니, 또 이런다. 이가는 부자로 이름난 집안이야. 장 태태는 호주 재물신이라고 불린다고. 재물신 가문에 돈이 그것밖에 없겠어? 내 이야기 들어. 내가 보기엔, 언니네 대내내가 가진 거 중에 은자가 제일 값어치 없는 물건일 거야.”
전 어멈이 손을 내리치며 하는 말에 오 어멈의 말이 바뀌었다.
“그렇지. 강가도 조만간 대내내 것이 되겠지. 당당한 백부의 안살림을 첩 따위가 맡는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세상에 그런 법도는 없지.”
전 어멈은 오 어멈 입에서 확실한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며 빤히 바라봤다.
“많이도 안 바라. 그냥 전에 만 어멈이 이야기한 대로, 우리 가족이 앞으로 먹고살 좋은 논 2백 묘에 작은 장원이면 돼.”
오 어멈은 결단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언니 대신 다녀올게. 그렇다고 곧바로 대내내를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고, 만 어멈을 찾아갈게. 만 어멈이 확실히 보장만 해준다면…….”
“그럼 내가 반드시 대내내를 도와드리지!”
오 어멈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전 어멈이 활짝 웃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언니 대신 다녀올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날 밝자마자 갈게!”
전 어멈은 화항에서 내려와 인사하고 희희낙락 나가서 마차에 탔다. 이번 일로 은자 50냥을 버는 순간이었다.
깊은 밤, 경성 밖, 언제나 적막한 중운(重雲) 별궁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드문드문 등불이 켜있었다. 당직 태감은 시각을 알리는 딱따기를 두드리며 한참씩 간격을 두고 무기력하게 고함치고는 느직느직 지나쳤다.
중운 별궁 동남 구석에 있는 정안전(靜安殿)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어슴푸레 등불이 켜있고 말소리 없이 고요했다.
정안전은 원래 광화전이었는데 영 황후가 거주한 후로 황상이 직접 붓을 들어 지금 이름을 하사했다. 대전 이름을 주 귀비가 지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안전 정전 동쪽 곁채에 두꺼운 휘장이 꼼꼼히 내린 실내에 등불이 환하게 켜있었다.
영 황후는 하얀 명주 겹옷에 남청 소주(素綢: 포플린) 치마를 입고 탑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탑상 앞에 무릎 꿇은 검은 옷 사내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물을 후드득 흘렸다.
탑상 앞에 서 있던 소심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짜서 건넸다. 수건을 받은 영 황후는 눈 위에 올렸다가 잠시 후 걷어내고 숨을 고르며 울렁이는 마음을 달랬다.
“기억이 난다. 소칠과 함께 무술을 배우던 아이 중에 네가 가장 빨리 배웠지.”
“마마, 과찬이십니다!”
유월(六月)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도 유월이라고 부르느냐?”
“예! 칠야 말씀이, 소인의 성이 육(陸)이니 유월이라고 부르는 게 제격이라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영 황후를 바라본 유월은 못 견디게 씁쓸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런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 대낭자의 모습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화려한 복장으로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던 모습. 모습이 보이기 전에 호탕한 웃음소리부터 들렸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메말라 보이는 중년 여인은 우리 대낭자가 아니다!
“소칠은 지금 어디쯤 있느냐? 경성엔 왜 오는 것이야?”
영 황후가 눈살을 단단히 찌푸리고 물었다.
“사흘이면 경성으로 들어오실 겁니다. 후야께서 칠야가 너무 장난이 심하고 말썽을 피운다고 몇 년 동안 황상 곁에서 시위를 하라고 경성으로 보내셨습니다. 황상을 향한 영씨 가문의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며, 또한 칠야의 성격을 잘 단속할 방법이라고요.”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아룁니다, 마마.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유월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다만, 칠야가 데리고 올 수 있는 인원은 데리고 왔습니다. 길 위에 있는 인원들도 포함해서요.”
영 황후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소칠을 경성으로 보냈다는 아버지의 서신을 받았을 때부터 이상했다. 집으로 서신을 보내는 게 쉽지 않고,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아서 이야기는 소칠을 만나서 하려고 했다. 반드시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면서.
나 하나면 됐어. 영씨 가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온 가문이 멸문당할지도 모르는 큰 위험이야.
“소칠은 무슨 일로 널 보낸 것이냐.”
“아룁니다, 마마. 칠야가 경성으로 들어와도 당분간은 마마를 뵈러 오지 못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경성에서 자리 잡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면 찾아뵙겠다고 했습니다.”
영 황후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소칠이 철이 들었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칠야는 요즘 매우 잘하고 계십니다.”
유월은 등에서 크고 검은 자루 두 개를 풀어서 양손으로 바쳤다.
“이 개암을 마마께 드리고 오라고도 하셨습니다. 올해 저희 뒷산에 열린 개암입니다. 칠야가 직접 주워오신 걸 부인께서 손수 볶으셨습니다.”
영 황후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우는 듯 웃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칠은 항상 이런 장난을……. 집엔 아무 일 없지?”
“예!”
유월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집안일을 물으면 무조건 좋다고만 하라고 칠야가 분부했었다.
“그럼 됐다. 이만 돌아가거라. 만사 조심하고 스스로 잘 지켜야 한다고 소칠에게 전하고.”
“예! 마마, 오황자께 안부 여쭙고 돌아가면 안 될는지요. 마마께 여쭤보라고 칠야가 분부했습니다.”
영 황후는 멈칫하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소심에게 분부했다.
“오가아(五哥兒)를 데리고 오렴.”
소심이 나갔다가 금세 일고여덟 살쯤 된 매우 준수하고 아름다운 어린 사내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오황자는 정전 서쪽 별원에 살고 있었다.
오황자는 자다 깬 보송보송한 눈으로 유월을 바라봤고, 유월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오황자 앞에 무릎을 꿇고서 유심히 오황자를 살폈다. 위에서 아래로 재빨리 훑어본 다음 오황자의 손목을 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핏줄은 못 속인다더니, 참으로 칠야와 닮으셨습니다.”
“오가아는 잘 지낸다고 소칠에게 전하렴.”
영 황후는 오황자의 손목을 잡은 유월의 손을 조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칠야가 신신당부하셔서…….”
유월은 서둘러 손을 풀고 난감한 듯 뒤로 물러나 영 황후를 양해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영 황후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휴. 내가 어서 만나고 싶어 한다고 소칠에게 전해라.”
“예!”
“일곱째 외숙이 보낸 사람인가요? 외숙은 언제 도착하나요?”
오황자가 별안간 물었다.
“이따 어미가 자세히 말해 주마.”
영 황후가 온화하게 대답한 다음 유월을 돌아봤다.
“얼른 돌아가라. 만사 조심하고.”
“예.”
유월은 일어서서 영 황후와 오황자를 향해 장읍하고서 소심을 향해 공수한 후 휘장 뒤로 사라져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녁 무렵 자등 산장 밖에 문 이야가 나타났다. 늙은 나귀에서 내린 그는 나귀를 끌고서 아름답게 핀 자등을 한 바퀴 돌며 감상하다가 자등을 지나쳐 계단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반쯤 열린 대문을 올려다볼 뿐 계단을 올라가지도 않고 목소리 높여 고함쳤다.
“거기 누구 없소?”
문지기가 소리를 듣고 나와서 누구를 찾는지 묻자, 문 이야가 잇몸을 보이며 물었다.
“이 집 주인이 이씨인가? 이신이라는 사람 있는가?”
“어르신, 우리 대야를 찾아오셨습니까?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소인, 기별을 드려야 해서요.”
문지기가 변함없이 공손하게 물었다. 태태는 법도를 지키는 분이라, 손님이 아무리 무례해도 공손히 대해야 했다.
“할 말이 있으니 나오라고 하게.”
문 이야는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이신과 아는 사이가 아니고, 이신도 자신이 누군지 들어본 적도 없을 테니 이름을 말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대야가 태태를 모시고 절에 향을 올리러 가셨습니다.”
“집에 없다면서, 내 이름은 왜 묻는가? 기별한다며? 기별은 개뿔!”
문 이야가 버럭 화를 내자, 문지기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어르신, 어르신도 대야가 집에 계신지, 묻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대야와 태태는 안 계셔도 고내내는 계신걸요. 성함을 말씀해 주셔야 소인이 고내내에게 기별하지요.”
“됐네. 의자 하나 주게. 문 앞에서 앉아서 기다리겠네!”
문 이야는 언짢아 죽을 것 같았다. 새벽에 호 영감이 깨우더니 이 망할 곳에 와서 누구를 만나라고 했다.
과거 시험을 볼 예정이 거인이라는데, 와서 무얼 하라고? 무얼 보라고? 내가 망할 팔고문(八股文: 명청明淸 시대에 관리 등용 시험 과목으로 채택된 특별한 형식의 문체)을 쓸 줄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치국평천하라는 큰 학문을 배운 사람이거늘, 승상께서는 나를 죽어도 막료로 들이지는 않으시고 다른 큰일에 쓸 거라고 달래기만 하시니…….
문지기 둘이서 얼른 의자를 내오더니 낮은 탁자 몇 개를 들고 와 차를 끓이고 간식을 놓았다. 그중 문지기 하나가 이동에게 고하러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의 묘사를 들은 이동은 멈칫하고는 다급하게 녹매를 불렀다.
“그 문 이야, 어제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어? 똑똑히 들은 것 맞니?”
녹매가 들어오자마자 이동이 다짜고짜 물었다.
“네.”
녹매는 얼떨떨했다. 어제 명확하게 보고드렸는데, 왜 갑자기 물으시는 건지.
“낭자의 부분대로 했어요. 박학다식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라고 들었다, 우리 대야의 선생으로 모셔서 종종 가르침 받고 싶다,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누군지, 대야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묻지 않고 대뜸 손을 저으며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저를 밖으로 내몰았고요.”
녹매는 얼른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래서 쫓겨나기 전에 서둘러 이야기했죠. 우리 대야는 소년 천재라고. 스물에 벌써 거인이 되었다고. 내년 춘시도 꽤 자신 있다고요. 그랬더니 어린애 달래는 일은 못 한다잖아요. 그러고는 말도 못 꺼내게 하더라고요. 얼마나 사나운지, 손을 휘두르면서 절 쫓아냈어요. 가라고,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잖아요. 아이를 달랠 줄도 모르고, 또 개똥 같은 팔고문도 쓸 줄 모른다면서 얼른 가라고 난리였어요. 제가 입만 뻥긋하면, 가라고 소리를 쳐대서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