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59화 (59/463)

59화: 옛 의리

“진왕은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다. 재능과 기량도 있고. 진왕이 강환장을 좋게 보고 진왕부 장사를 맡겼다면 단순히 강환장의 자태가 출중하고 인품이 겸허해서는 아닐 것이다. 재능을 보았겠지. 신중히 지켜보아라.”

“예!”

여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할아버님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정확하고 일 처리는 원활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온 나라 문무백관 중에 할아버님이 둘째라면 첫째라고 나설 사람이 없었다. 묵 승상을 포함해서 말이다.

“고씨 일은…….”

여 승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필시 중간에 연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아직 혼인하지 않아서 부부 사이의 일은 모른다.”

“예.”

여염이 냉큼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매우 세심해서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하는 일에 지극히 능했다. 몇 년을 수련해야 할아버지를 반이나마 닮을 수 있을는지.

“장 태태가 갑자기 이신을 양자로 들인 것은 강환장이 고씨를 총애하고 이씨가 성 밖으로 쫓겨나듯 나가서 요양하는 것과 뗄 수 없을 것이다. 딸이 사람을 잘못 만났음을 깨닫고 이신의 뒷배가 되어주려는 것이겠지. 이신이 있으면 딸과 딸의 친정을 지탱해 줄 수 있을 테니. 휴, 부모 마음이란.”

여 승상은 매우 마음 아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염가아, 네 아비와 숙부, 모두 재능과 기량이 평범하다. 우리 가문은 내 손에서 곧바로 네게 넘어가야만 해. 할아비가 받은 큰 은혜, 너도 함께 갚아야 한다. 그러니 우선, 할아비 대신 이신을 잘 살펴봐다오. 좋은 녀석이라면 만사 다행이다만, 그게 아니라면…….”

여 승상의 눈빛이 어둡고 매서워졌다.

“장 태태와 어린 여식이 적에게 등을 찔리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여염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놓으세요, 할아버님. 며칠 내로 ‘우연히’ 이신을 만나보겠습니다.”

여염이 밖으로 나가고, 여 승상 홀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밤이 깊고 이슬이 맺히고서야 느릿느릿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호가야!”

마흔 남짓한 중년 사내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승상 나리!”

“네가 직접 상원현에 다녀오너라. 성 밖 자등 산장으로 찾아가서, 이신이라는 자를 만나서 밥 벌어 먹고살라고 해라. 내일 아침에 바로 가라고 하고, 나 대신 그 녀석을 살펴보라고 해라. 제대로, 똑똑히 살펴야 한다!”

“예.”

호가라고 불린 사내는 여 승상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명확히 아는 듯이 시원스럽게 대답하고는 뒷걸음쳐서 돌아섰다.

오 어멈은 늦은 밤까지 바삐 움직이다가 겨우 제 거처로 돌아갔다.

싸움이라도 한 듯이 온몸이 쑤셔서 기분이 말이 아니게 안 좋았다.

수운간에서 벌어진 일로 어깨부터 허리까지 온통 멍이 들었다. 여기저기 쑤신 몸 때문에 괴롭고, 전 관사 일가가 팔린 일로 온갖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예전과 달리 오늘은 전혀 흥도 나지 않았다. 부인을 봐도 밉고 눈에 거슬리고, 세자야란 소리만 들어도 속이 쓰리고, 고 이낭을 볼 땐 물어뜯고 싶었다.

잘 살 수 있었던 미래, 작은 장원!

오 어멈의 거처는 그리 크지 않은 이진(二進)짜리로, 중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상방에 불이 환히 켜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또 울화가 치밀 수밖에.

이 늦은 시간에 불을 훤하게 켜놓다니, 기름값이 얼마나 들라고!

식구 중에 철든 사람이 하나도 없어!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생각하지 않고!

어멈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에 손에 넣었던 작은 이득도 오늘부터는 하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는데! 집안이 어느 날 갑자기 우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단 말이다!

오 어멈이 막 욕을 하려는데, 상방 휘장이 열리더니 그녀와 나이가 비슷한 여인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안에서 나왔다.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어머나! 너였니? 웬일이야? 어머나, 나 좀 보게. 너무 반가워서 한 말이다. 언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어?”

이 여인은 전 관사의 사촌 누이로, 전에 함께 진가에서 종복으로 일했었다. 어릴 때 맞은편에 살아서 같이 자랐고, 함께 진가로 들어갔다. 오 어멈은 진 부인을 모시다가 함께 강가로 들어왔고, 전 어멈은 진가 노태태 거처로 갔다가 은혜를 입어 혼인했다. 전 어멈은 시어머니를 따라 관가 매파 자리를 물려받았고, 지금은 꽤 신분이 높아져서 경성 대갓집 혼사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 보살피며 깊은 친분을 맺어왔다.

“오후 내내 기다렸지.”

전 어멈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싫지 않은 영리한 느낌이 온몸에서 풍겼다.

“강가에 큰일이 났다는 말을 오늘 아침에 들었지 뭐야. 소식을 듣고, 일단 성 밖에 볼일 보러 갔다가 곧장 이리로 왔지. 점심, 저녁 다 얻어먹었어.”

“아이고, 그러게, 일이 났을 뿐만 아니라 큰일이 났지. 전 관사네는 어때? 소식 있어? 온 가족이…….”

오 어멈은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다. 정말로 전 관사 일가의 일로 슬펐다.

“괜찮아, 괜찮아.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안으로 들어가서 화항에 앉았다. 오 어멈의 며느리는 간식을 내오고 새로 차를 끓인 다음, 시어머니가 부르면 바로 달려오려고 곁채로 가서 아이를 재우고 바느질했다.

전 어멈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네는, 내가 보기엔 전화위복이 되었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땐 일가족이 벌써 다 팔려 갔더라고. 어휴,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다니까. 얼마나 슬프던지…….”

“그러니까 말이야!”

오 어멈은 지금 강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느 날 자기 가족도 전 관사 일가 같은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만 해도 걱정되고 두려워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누가 사 간 건지 몰라서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소식 하나 없지 뭐야. 슬퍼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울었어! 그런데 오늘 아침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소식을 보냈더라고. 다 무사하다고. 성 밖 5리 떨어진 어느 장원에 있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지. 갔더니, 어땠는 줄 알아? 오라버니네가 삼진짜리 새 저택에 살고 있더라고. 안팎 싹 다 새로 지은 저택이야. 내가 갔을 때, 오라버니 진료하러 의원들이 도착했는데, 누구였는지 알아? 세상에, 호일첩의 큰아들, 호대 선생이야!”

“어머나! 신선이라도 만난 거래?”

오 어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신선을 만난 건 아니고, 자네 대내내가 오라버니 일가를 다 사들여서 친정 장원에 있을 곳을 마련해 주셨대. 호대 선생 말이, 대내내를 모시는 만 어멈이라는 사람이 모시러 왔다더라고.”

전 어멈은 조금도 꾸물거리지 않고 시원스럽게 모두 털어놓았다. 오 어멈은 더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 대내내? 이 대내내? 무슨 생각이래?”

“오라버니가 날 보자마자 얼마나 울던지. 세자야가 직접 거간꾼에게 분부하는 걸 들었대. 몸값은 상관없으니 반드시 멀리, 땅끝으로 팔아버리라고 했대. 온 가족을 살려두지 않겠다고. 대내내가 아니었다면, 온 가족이 다 죽었을 거라잖아. 아이고!”

전 어멈이 한숨을 푹푹 쉬며 허벅지를 철썩철썩 내리쳤다.

“도저히 모르겠더라고.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대체 무슨 이유로 세자야 눈 밖에 날 일이 있어. 오라버니 말이 다 거짓말 같지 뭐야. 그 말이 사실이면, 세자야가 그렇게까지 화를 냈겠어? 그 말이 맞다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더만! 다들 그 집 세자야가 겸손하고 너그럽다고 하더니. 아니, 겸손하지 않고 너그럽지 않아도 그렇지, 고작 그런 일로. 장 몇 대 치면 그만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러니까! 고작 그런 일로!”

오 어멈이 생각이 많은 듯 전 어멈의 말을 잘랐다.

“정말로 네 오라버니 잘못이 아니라니까! 하,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생각만 해도 괴롭다. 있잖아, 우리 나리, 오통신에 씐 건 같다. 옛날의 그 나리가 아니야. 말도 안 되게 고약해졌다니까!”

그 일만 생각하면 오 어멈은 가슴이 답답하고 쑤셨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정말로 네 오라버니 탓은 하나도 없어. 네 오라버니는 재수 없어서, 오통신에게 걸린 거야! 그런데 대내내가 어째서 네 오라버니 일가를 도왔을까?”

오 어멈은 가장 궁금한 일을 물었다.

“대내내의 배가 어멈, 만 어멈? 마침 내가 나올 때 그 어멈을 마주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어. 걱정하지 말라더라고. 오라버니가 대내내의 혼수를 지키려다가 다리가 그 지경이 되고, 나리가 발작해서 팔아버린 거라서, 따지고 보면 이가가 빚진 거라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이가는 충성스러운 종복을 저버리는 법이 없다고, 오라버니 다리가 다 나으면 점포 하나를 내주고 장방을 맡기겠대. 오라버니 두 아들도 나이가 찼는데 집에서 놀기만 하면 되겠냐고, 자기가 걔들을 데리고 점포 몇 군데를 둘러보겠대. 들여보낼 만한 곳이 있는지 말이야. 이게 전화위복이 아니고 뭐야?”

전 어멈은 오라버니가 겪은 일이 몹시 흡족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이 대내내처럼 정 깊고 의리 있는 데다가 통 큰 부자를 만났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오늘만 해도, 말 몇 마디 전하러 온 것이고 어려운 것 하나 없는 일인데 만 어멈이 거마비로 열 냥이나 턱 하니 내놓았다.

“세자야가 화를 내고 내쫓은 사람을 몰래 데리고 가다니. 대내내, 간도 크네.”

오 어멈은 대내내가 무슨 생각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머나,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대내내는 세자야가 삼매육빙을 거쳐서 정식으로 혼인한 정실이야. 예법으로 따져도 부부는 일체고, 집안에서도 부부는 남주인, 여주인이라서 누가 더 존귀하고 낮은 구별이 없어. 죽어서 사당에 들어가도 왼쪽, 오른쪽에 나란히 위패를 놓는다고. 완전히 동등한 존재야!”

전 어멈은 그 자리에서 오 어멈의 말을 반박했다. 그런 쪽으로는 그녀가 전문가였다.

“대내내가 뭐하러 세자야를 무서워하겠어. 게다가 아내가 현명하면 지아비가 화를 입을 일이 없다잖아. 언니네 나리는, 언니도 말했잖아, 오통신이 씐 것 같다며. 그런 사람이 한 일이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나? 세자야가 적절하지 않은 일을 했으니, 대내내가 뒤에서 수습한 거지. 진정으로 현명하고 어진 여인이야.”

전 어멈은 허투루 전문 매파 노릇을 한 게 아니었다.

“그렇긴 한데…….”

오 어멈은 세자야와 대내내의 거북한 부부관계를 떠올렸다. 세자야는 대내내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고, 대내내는…… 예전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대내내도 별 감정 없어 보이는데. 그런 대내내가 정말로 세자야를 위해 뒷수습을 한 걸까?

“강부는,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 거야? 고 이낭이 집안일을 맡았다며?”

전 어멈의 재주 중에 말발은 둘째고, 눈치 살피는 일이야말로 일등이었다.

“아이고!”

그 물음이 뱃속 가득한 푸념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정곡으로 찔렀다. 오 어멈은 전 어멈을 붙들고 시작부터 끝까지, 안에서 밖까지 침을 튀기며 다 털어놓았다.

“아이고! 그 고 이낭, 그야말로 상문살이네!”

“어머나, 어머나, 어쩌면 그런 일이!”

“미쳤구나. 어떻게 그런 짓을…….”

전 어멈은 때를 잘 맞춰 일일이 추임새를 넣다가, 강 환장이 고사현에게 10만 냥을 정말로 주었다는 대목을 듣고 더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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