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58화 (58/463)

58화: 옛 은혜

강당항(講堂巷) 뒤 여(呂) 승상 저택.

여 상공의 장손 여염(呂炎)이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사환이 다급하게 맞이했다.

“대소야, 상공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음? 할아버님이 벌써 돌아오셨나?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지?”

여염은 모래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아직 유시(酉時: 오후 5-7시)도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일찍 돌아오는 날은 지극히 드문데, 당장 오라고까지 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여염은 순간 심각해진 표정으로 쥘부채를 탁 접고서 여 상공의 안채 서재로 곧장 향했다.

안채 서재, 반백의 여 승상이 홍니로(紅泥爐: 붉은 진흙으로 빚은 화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작고 정교한 부들부채로 찻주전자를 부치고 있었다. 찻자리가 준비된 걸 본 여염은 크게 안도했다. 아무래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망중한을 즐기려고 일찍 돌아오신 모양이다 싶어서.

“오늘은 무슨 차입니까?”

여염은 몇 걸음 만에 다가가 일단 찻자리부터 둘러보며 물었다.

“할아버님, 갈수록 찻자리가 운치 있습니다.”

“불효막심한 놈! 네 할머니가 자주 꾸미던 찻자리인데, 몰라보는 것이냐?”

여 승상이 부채로 손자를 툭 때렸다.

“그럴 리가요!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요. 제가 너무 어릴 때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습니까.”

여염이 얼른 얼버무렸다. 사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겨우 5, 6년이었고, 그때 그는 이미 열서너 살이었다.

“휴, 그렇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6년이 흘렀구나.”

여 승상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홍니로에 물이 끓자, 여 승상은 주전자를 들어 올려 찻잔을 데웠다.

“물로 두 번 적시면 차 맛이 제일 좋다고 네 할머니가 그러더구나.”

여염은 얼굴을 내밀고 열심히 차향을 맡을 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며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옛일을 그리워하다니, 좀 이상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할머님 생신? 아니야! 할머님 기일? 그건 더 아니야! 할머님과 할아버님이 혼인한 날? 그것도 아니야. 매우 더운 날이었다고 자주 말씀하셨거든.

그럼 무슨 날이지?

“염가아, 내년 춘시, 자신 있느냐?”

“예? 아!”

여염은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자신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고, 삼갑(三甲)에 겨우 들까 봐 걱정입니다. 아, 제 말은…….”

“나도 네가 그럴까 봐 걱정이구나.”

뭐라고 덧붙이면 좋을지, 여염이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여 승상이 느릿느릿 말을 받았다. 여염은 얼떨떨해졌다. 할아버지는 겸손하고 자세를 낮추는 분이었다. 온화하고 경쟁하는 법이 없어서 자손들이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꼴을 제일 못 보신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의 귀를 잡고 한바탕 혼쭐을 내셨을 것인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내년 춘시까지 1년도 남지 않았다. 글을 많이 읽고, 문회에도 자주 나가거라. 다른 지역의 재주 있는 사람들, 천재를 많이 만나보고. 저마다 장점이 있는 법이다.”

여 승상은 찻잔의 찻잎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여염은 할아버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예민하게 감지했다. 매우 달랐다. 그는 변함없이 미소 지으면서도 갈수록 진지해지는 눈빛으로 할아버지의 말에 집중하고 할아버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호주에 이신이라는 소년 천재가 있다. 지금 성 밖 자등 산장에 묵고 있지. 수녕백 세자 강환장의 처 이씨의 족형(族兄)이다. 이씨의 모친이 양자로 삼았다더구나. 기회를 보아서 안면을 터서 자주 교류해 보아라. 할아비 대신 그자의 인품을 살펴보고, 인품이 괜찮고 사귈 만하다 싶으면 깊이 사귀어 보아라.”

여염은 깜짝 놀랐다.

“수녕백 세자요? 우리랑 수녕백부는…….”

“수녕백부 때문이 아니다.”

여 승상은 찻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여 승상이 말을 그치고는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여염은 추억에 잠기는 듯한 여 승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할아비가 어렸을 때,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네 증조부는 세상을 일찍 떠나셨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여씨 일족은 이 할아비 대가 되어서야 가문을 일으키고 사당을 세웠다. 할아비가 어렸을 때 여씨 일족은……, 일족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가난한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 그때 네 증조모께서 홀로 나를 키우셨지. 진정한 고아에 혈혈단신이셨다. 네 증조모께서 대갓집 삯일을 하며 겨우 먹고 살았다.”

여염은 가슴이 쓰려서 의자를 들고 할아버지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할아버지 어린 시절 일은 처음 들었다. 혼인하기 전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셨다. 가끔 이야기할 때도 몇 마디뿐이었고, 할아버지가 가난한 서생 출신인 것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고된 줄은 몰랐었다.

“그때, 자주 네 증조모께 삯일을 맡기던 집 중에 엄씨 가문이 있었다. 상인 가문으로 매우 부자였는데, 그 집 태태가 그렇게 자비롭고 총명한 분이셨지. 한번은, 내가 일고여덟 살 때였는데, 네 증조모와 함께 일거리를 들고 엄가에 함께 갔었다.”

여 승상은 말을 멈추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봤다.

그날 일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날 그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신선이 사는 것 같은 실내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우뚝 선 책장 앞에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소녀가 앵초색 노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 소녀가 완두황(豌豆黃)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이거 완두황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야. 너도 먹어 봐. 정말 맛있어.’

“그때 엄가 태태를 처음 뵀지.”

여 승상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엄가 태태가 내 눈빛이 맑은 것이 글공부할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하시면서, 글공부를 시키라고 네 증조모에게 말씀하셨다. 은자는 자기가 내준다고 말이다.”

여염은 놀라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다음 날, 나는 학당에 들어갔다. 그 학당에서 1년 반 동안 공부했고, 그해 겨울, 새해가 되자마자 엄가 태태가 나를 부르셨다. 글선생이 자기 학문에 한계가 있어서 더는 가르치지 못하겠다고, 앞길을 가로막게 될 거라고 그러셨다면서, 현에는 더 좋은 글선생이 없으니 택원 서원에 가서 공부할 생각이 없는지 물으시더구나. 그렇게 나는 택원 서원에 들어갔다.”

여 승상은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았다. 한참 만에 다시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택원 서원에서 장원항이라는 부잣집 자제를 알게 되었다. 장원항은 서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글공부는 잘하지 못했다. 우린 사이가 매우 좋았고, 그가 함께 세상을 둘러보자고 하더구나. 나는 그와 함께 세상을 누비며 문회에 참석했다. 내가 문장과 시를 짓고, 그는 은자를 뿌렸지. 우린 그렇게 지기가 되었다.”

여염은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다. 할아버지와 이런 친분이 있다는 분을 왜 오늘에야 처음 듣게 되었을까.

“나중에, 내가 거인이 되기 1년 전, 장원항은 엄가 낭자와 혼인했다.”

“할아버님을 도와준 그 엄가요?”

여염이 놀라서 물었다. 너무 공교로운데!

“그래, 장원항이 택원 서원에 들어왔을 때 이미 엄가와 정혼한 상태였다. 그가 나와 친분을 맺은 것도 엄가 태태의 당부 때문이었단다. 내가 경성으로 들어와 춘시를 본 그 해, 장원항은 장사하러 떠났다가 광풍을 만나 동정호에 빠져 죽고 말았다.”

여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장원항이라는 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더라니.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셨군.

“장원항은 유복자를 남겼다. 바로 수녕백 세자 강환장의 처 이씨의 모친, 장 태태다.”

여염은 쉴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한 끝에 그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더러 잘 사귀어 보라는 그 이신이, 할아버님의 은인인 엄가 태태의 여식과 장 노선생의 후손, 아니, 후손의 양자인 것이지요? 왜 이런 이야기를 이제야 하십니까?”

“그래, 무슨 말인지 안다.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엄 노태태와 장 태태 모두 외로운 신세였지…….”

여 승상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차를 홀짝였다.

“이 할아비는 진사가 된 그해에 네 할머니와 혼인했다. 그때 안원후부 소 노야가 한창때라 추밀원 차사를 이끌고 있었지. 소가의 가세가 가장 왕성한 때였다. 할아비는 한발 한발 올라서면서 쉰에 중서성에 들어가서 거의 20년 동안 승상 자리에 있었다. 모두 소가와 소가 노야의 든든한 지지로 그 기초를 쌓은 것이다. 소 노야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그 은혜가 네 할아비, 우리 여가의 모든 이에게도 미쳤다. 여씨 일족이 오늘날에 이른 건, 우리 여가, 너희들이 오늘처럼 부귀해진 건, 모두 네 할머니 덕이었다. 이 할아비가 네 할머니와 혼인한 덕이었다.”

“할아버님도 할머님댁을 도왔잖아요. 그때 할아버님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오늘날 소가가 있겠습니까.”

여염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 승상의 얼굴이 곧바로 흐려졌다.

“그게 무슨 배은망덕한 말이냐! 휴, 할아비 말이 심했다. 오늘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리는구나.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이런 식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그 당시 소가를 도울 수 있었던 건, 소가에서 나를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운 덕분이다. 기억해라. 네 할머니가 없었다면 우리 여씨 가문은 없다. 너는 네 할머니를 경애하고 존경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할머니가 나 때문에 상심하고 슬퍼해선 안 된다. 조금도 안 돼.”

여염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아! 엄가와 장가의 큰 은혜로 할머니가 슬퍼할 일이라면……. 아!”

여 승상이 가장 아끼는 손자인 여염은 영리하고 총명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깨달았다.

“설마 할아버님 그 말씀은, 엄가의 그 낭자가 할아버님을……. 아! 엄가에서 그 당시에 할아버님이 가난한 게 싫어서……. 응? 그건 아닐 텐데……. 그러면…….”

거참, 막장 같은 상황이군. 그나저나, 할머니가 그 일을 어찌 아셨을까?

“무슨 헛소리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여 승상이 여염의 머리를 톡 내리쳤다.

“할아비 말을 똑똑히 들어라! 할아비는 그해 진사가 되었고, 진사가 된 그 날 바로 서신을 써서 그 밤 안에 바로 서신을 보냈다. 엄씨에게 구혼하는 서신이었지.”

여 승상은 무수히 많은 생각이 드는지, 목소리가 지극히 낮고 말이 느렸다.

“엄씨는 승낙하지 않았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어. 그녀는 장 형과 정이 매우 깊었다. 휴.”

“아!”

여염은 이번에야말로 깨달았다. 이런, 이런……. 이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수녕백부에 관한 일, 너도 들었느냐?”

여 승상은 담담했고, 여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많진 않지만, 꽤 알 만큼은 됩니다. 강환장이 진왕의 장사로 낙점되었다기에 얼른 사람을 보내 수녕백부에 관해 알아봤지요. 수녕백부, 정말 웃긴 일이 많습니다만, 강환장은 평판이 꽤 괜찮습니다. 자태도 출중하고, 성품은 겸허하고 온화하고, 꽤 재주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절제하는 편이고요. 혼인하기 전엔 나쁜 소문이 전혀 없었습니다. 혼인한 후엔 풍문에 조금 안 좋은 소리가 돕니다. 특히 혼인한 후에 갑자기 외사촌 누이 고씨에게 빠져서 꽤 소란을 피웠습니다. 할아버님도 아시겠지만, 고가는 구제 불능인 집구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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