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57화 (57/463)

57화: 옛 원한

손에 힘이 빠지도록 인중을 꼬집어도 부인이 깨어날 기척조차 없자, 봉운은 너무 당혹스럽고 두려웠다. 양손을 흔들어대면서 멍하니 보고만 있는 고 이낭이 눈에 들어오자, 두려운 마음이 분노로 바뀌어서 활활 타올랐다.

온 집안 종복의 노후 자금, 자신의 월전, 어머니의 병, 그리고 지금은 부인까지. 또 세자도……. 모두 이 물건 때문이다!

“아!”

봉운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고 이낭은 순간 깨달았다.

그렇지! 난 지금 이 집안의 안살림을 맡은 안주인…… 이낭이었지. 왜 부인을 찾아온 거야. 곡란원으로 갔어야지. 오라버니를 곡란원으로 데리고 가고 의원을 불렀어야지…….

아니, 내 탓이 아니야. 오라버니가 피를 철철 흘렸잖아. 내가 오라버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 오라버니가 다친 거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어.

고 이낭은 아무런 말 없이 돌아서서 밖으로 달려갔다.

봉운이 화를 내며 침을 뱉었다.

정말이지 못된 계집이라니까!

수녕백부는 밤새 뒤숭숭했다.

곡란원으로 뛰어온 고 이낭이 종복들을 깨워서 등롱을 들고 강환장을 찾으러 갔을 때, 강환장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데다가 술까지 취해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그런 그를 곡란원으로 데리고 온 후에야 아직 의원을 부르러 가지 않았음을 떠올린 고 이낭은 막 달려온 관사 어멈에게 욕을 퍼부었다.

세자가 다치고 부인이 혼절했으면 당연히 의원을 불러야지, 그걸 내가 꼭 분부해야 해?

어멈, 시녀들은 끽소리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욕을 들었다. 고함치며 한바탕 욕을 해댄 고 이낭은 호일첩과 손 태의를 모셔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야심한 시간이라 호일첩과 손 태의의 저택 모두 대문이 굳게 닫혔고, 노태야가 나이가 드셔서 야간 진료는 가지 않는다는 문지기의 답만 들고 돌아왔다.

어멈의 보고에 고 이낭은 더 크게 화를 냈다. 이건 대놓고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아닌가. 대내내는 매번 새벽에 호일첩이니 손 태의니 조 의원 할 것 없이 잘만 부르더만! 그땐 야간 진료는 가지 않는다는 규칙을 들은 적도 없는데!

다른 어멈을 다시 보내서 이번에도 세 의원의 집 대문을 다시 두드렸다. 역시나, 나이가 들어서 야간 진료는 가지 않는다는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보고를 들은 고 이낭은 또 한 번 욕을 퍼부었다. 망할 축생들이 자기가 이낭이라고 업신여기고 속인다며, 오라버니가 깨어나면 이 축생들을 싹 다 팔아치우겠다고.

그러나 설사 지금 당장 이 축생들을 팔아치운대도, 이 자리에서 때려죽인대도, 의원은 오지 않는다. 고 이낭은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다행히 오 어멈이 달려왔고, 전에 자주 모시던 의원을 모셨다.

진 부인은 별문제 없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라 의원이 오기 전에 벌써 깨어나서 오 어멈의 손을 꼭 쥔 채 목이 찢어져라 울어댔다.

그런데 강환장의 상처는 의원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달려온 의원은 외상을 처리한 적 없고, 넘어져서 다친 상처가 지극히 심각하고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맥을 짚는 것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어서 처방은 더더욱 내리지 못했다. 방법이 없으니 호일첩과 조 의원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날이 이미 밝았고, 이번엔 드디어 호일첩과 조 의원을 모셔왔다.

그날 강환장은 할 수 없이 휴가를 청했다. 진왕부 장사가 된 둘째 날에 병으로 휴가를 낸 일로 강환장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출사(出師)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순조롭지 않은 시작은 아닐까.

해가 어슴푸레 밝을 무렵, 손 어멈은 비녀를 품고 마차에 올라 성으로 향했다.

손 어멈은 마차에 앉아서 지명과 인명을 묵묵히 되새겼다. 그 사람이 남긴 지명, 인명, 십여 년 동안 태태는 한 번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찾기 쉬운 곳인지 아닌지, 그 사람이 그곳에 있기는 한지 모를 일이었다. 옮기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모를 일 아닌가.

손 어멈은 그곳과 두어 골목 떨어진 곳에서 마차를 세우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서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

골목 끝에 그 집이 보이는데, 유칠이 얼룩덜룩 벗겨진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집이었다. 장미 넝쿨이 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꽃은 많이 피진 않고 푸른 잎 사이에 장식하듯 핀 것이 꽤 정취가 느껴졌다. 이 작은 저택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손 어멈이 다가가 두드리자, 한참 만에 다리를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 가까워지더니 노쇠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호대라는 분, 여기에 삽니까?”

“호대를 찾으시오?”

문이 열리더니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이 머리를 내밀고 놀란 듯이 손 어멈을 살폈다.

“비녀를 가지고 왔소?”

“예.”

손 어멈은 노인보다 더 놀라서는 서둘러 품에서 비녀와 장 태태의 서신을 꺼내 양손으로 건넸다.

“내게 주고 이만 돌아가시오.”

서신을 받은 노인은 손 어멈을 향해 손을 휘두르고 문을 닫았다. 손 어멈은 문밖에 선 채 다리를 끌며 걷는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듣다가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오는 내내 이런저런 장면을 상상했지만,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다. 너무 평범하잖은가!

마차에 오른 손 어멈은 마부에게 수녕백부로 가자고 분부했다. 비녀를 전하는 것 말고 이신을 양자로 들인 일을 강가에 전하고 오라는 분부도 있었다. 이가에서 양자를 들이고 말고를 강가에서 참견할 수는 없지만, 예법 때문에라도 전해야 했다.

진 부인은 정말로 몸져누웠고, 오 어멈은 울화와 분노가 치민 상태였다. 손 어멈이 몇 마디 만에 양자 일을 이야기하자, 진 부인은 그 자리에서 통곡했고, 오 어멈은 더 조바심이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양자를 들이고 말고는 이가의 일인데, 와서 부인에게 전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부인 편찮은 거 안 보여요? 말을 전하려고 해도 세자야에게 전해야지! 봉운, 사람을 불러 세자야 거처로 보내라. 그리고 아랫것들에게 전해라. 부인이 편찮으신데 왜 무슨 일이든 부인에게 전하는 것이야. 그 여인에게도 대체 안주인이 누군지 물어보고!”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그전까지 일어난 일은 모두 아는 손 어멈이었다. 오 어멈의 태도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은 그녀는 통쾌한 기분으로 일어서서 시녀를 따라 곡란원으로 향했다.

곡란원 안, 고 이낭은 아래에는 제 헌 치마를 입고 상의는 누구 것인지 모를 헌 옷으로 갈아입고는 초췌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힌 채 침상 가에 앉아서 강환장에게 배를 먹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손 어멈은 예를 갖추고 두어 마디 만에 이신을 양자로 들인 일을 고했다. 이신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강환장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손 어멈을 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이신! 그 인간쓰레기를! 자네 태태, 눈이 삐었는가!”

손 어멈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얼굴을 굳혔다.

“말조심하시지요, 고야. 우리 대야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으시지요? 우리 대야의 인품을 어찌 아십니까? 게다가 인간쓰레기든 차 찌꺼기든, 우리 이가 집안일이니 고야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이 늙은이 이만 물러갑니다. 푹 쉬시지요, 고야.”

손 어멈은 예를 갖추고는 돌아섰다.

강환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이신! 묵칠보다 더 나쁜 것! 이신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이신은 내년 춘시에 급제했을 텐데. 그래, 내년이 춘시이니 올해 경성에 왔겠군. 방심했다. 내년 춘시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마가 꾹꾹 쑤셔서 심장까지 아팠다. 강환장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면서 폭발할 것 같은 화를 겨우 다스렸다.

이마에서 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쳐서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이신, 벌써 경성에 왔나? 그런데 어쩌다가 이가 양자가 된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오라버니?”

고 이낭은 폭발할 듯이 얼굴이 뒤틀린 강환장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휴, 오라버니가 화가 난 것도 당연하지.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멀쩡히 양자는 왜 들여? 게다가 이미 성인이 된 양자를?

이렇게 되면, 대내내의 지참금 말고 다른 이가의 재산은 앞으로 그 양자 것이 되는 거 아닌가? 장 태태는 무슨 생각인 거지? 누구를 경계하는 거야?

힐수방은? 앞으로도 강가 것이 되지 않는 건가? 오라버니가 조금 전에 힐수방에서 옷을 고르게 해준다고 했는데…….

“오라버니, 여인네와 똑같이 굴 것 없어요. 설사 양자를 들인대도…….”

“그것 때문이 아니다!”

강환장의 목소리에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가득 묻어났다. 양자라면 누구를 들이든 상관없었다. 이가의 푼돈을 안중에 둔 적도 없었다. 강가의 운수가 이미 풀리고 있으니 앞으로 산처럼 바다처럼 은자가 쌓일 텐데, 이가의 은자가 뭐 중요하다고! 언제 은자를 안중에 둔 적이 있었나?

이신! 이신은 꿍꿍이 가득한 소인배다. 승상까지 단 한걸음 남았을 때, 계략과 음모로 그를 영흥군로로 떨어뜨렸다. 하마터면 그 혹독하게 추운 망할 곳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

이신 때문에, 중서성으로 들어갈 기회를 계속해서 놓쳤다.

바로 이신 때문에, 승상 자리를 한 걸음 앞에 두고 끝내 오르지 못했다.

바로 이신 때문에, 그와 태자와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졌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환장의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묵칠이 원망스러워서 처참히 짓밟아주고 싶다면, 이신은 생살을 뜯어 먹고 산 채로 피를 마시고 싶었다.

귀신처럼 뒤틀린 강환장의 흉악한 얼굴에 고 이낭은 겁에 질려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강환장은 울화가 계속해서 치밀어서 이마의 상처가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처럼 욱신욱신 쑤셨다.

“의원을…… 모셔와라. 조 의원을 모셔와. 머리가 아프다…….”

강환장이 머리를 부여잡고 침상에 쓰러지자, 고 이낭은 비명을 지르고 목놓아 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손 어멈은 산장으로 돌아와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가슴이 쑤셨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강환장의 반응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다.

“태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을까요. 말씀 좀 해 보세요. 우리 대야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우리 양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런 말을 하다니. 인간입니까?”

이동은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장 태태 곁에 앉아 있었다.

그자로서는 이신 오라버니라면 이가 갈릴 테니, 인간쓰레기라고 욕한 건 심한 것도 아니지. 아무래도 이신 오라버니 곁에 사람을 안배해야겠어. 강환장이 해치고 싶어도 해칠 수 없게 경계해야 해. 지금 상황을 보면 오라버니를 죽일 생각도 할 수 있어.

녹매가 문 이야를 설득할 수 있으려나. 문 이야가 오라버니 곁에 있으면, 강환장이 아무리 오라버니를 해치고 싶어도 쉽지 않을 텐데.

장 태태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환장이 언짢아할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거리낌 없고 방자하게 굴 줄은 정말 몰랐다.

동동과 혼인하면 우리 모녀의 목숨을 쥘 수 있다고 정말로 생각했단 말인가? 제 하고 싶은 대로 우리 모녀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내가 눈이 삐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동동을 이런 쓰레기에게 보냈을 리가.

아무래도 이 혼사, 제대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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