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해는 저물고, 이낭은 아름답다
“아직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강환장의 기분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 고 이낭은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잔뜩 조심스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편찮으신 거, 오라버니도 알잖아요. 난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생각했어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부인을 뵈러 갔는데……. 부인이…… 문제가 아니라……. 아녕이…….”
고 이낭은 아녕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원망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데, 거짓말을 못 해서 난처한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환장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정신이 흐트러진 바람에, 고 이낭의 선량함과 난처해하는 모습만 보이지 얼굴 한쪽을 가린 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금세 괜찮아지실 거다. 성격을 알지 않으냐. 당분간 상대할 것 없다. 금세 좋아지신다.”
취기가 올라서 조금 웅얼거리는 말투였다.
“네.”
고 이낭은 여전히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얻어맞기까지 했는걸요.
고 이낭은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이 눈물이 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강환장을 올려다봤다. 목소리에서는 더욱 서러움이 느껴졌다.
“둘째가…….”
고 이낭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후드득 흘렸다.
“다 내 잘못이에요. 아녕이 서러움을 겪었잖아요. 아녕의 혼수가 다 나 때문에……. 아녕이 날 미워해도 난 탓하지 않아요. 다 나 때문에……. 난 그 은자만 생각하면…….”
고 이낭은 지극히 난감한 듯이 어렵게 은자라는 말을 꺼냈다.
“아녕이 널 괴롭혔어? 때렸어?”
강환장은 드디어 고 이낭이 줄곧 한쪽 얼굴을 움켜잡고 있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을 치켜떴다.
“아무, 아무렇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둘째 탓이 아니에요. 둘째는 올곧은 애예요. 분명 누가 이간질한 거예요. 전 정말로 조금도 그 애 탓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아녕을 나무라지 말아요. 아녕은……. 아프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
고 이낭은 아프지 않다고 하면서도 더 심하게 눈물을 흘렸다. 순결하고 고상하게 이간질하는 것, 고 이낭의 타고난 재능이었다.
“편들 것 없다! 내가 널 모르겠느냐? 그 아이를 모르겠어?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있어. 너는 나, 강환장이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런 너조차 감싸지 못하면 온 문무백관이 날 얼마나 비웃겠느냐.”
강환장은 분노와 술기운이 함께 올라와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고 이낭은 얼떨떨했다. 문무백관이 비웃다니? 문무백관이 수녕백부를 왜 비웃어?
얼떨떨한 건 얼떨떨한 거고, 되물을 수는 없어서 그저 말을 이어갔다.
“다 내 잘못이에요. 오라버니가 집안일을 맡겼는데, 하루가 지났는데 아무것도 못 했어요.”
“하루 만에?”
강환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쉴새 없이 치미는 술기운을 다스리며 조금 남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려 애썼다.
“네가 신선도 아니고, 몇십 년 동안 흐트러진 저택을 어떻게 하루 이틀 만에 정리한단 말이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라.”
강환장은 딸꾹질하고 일어서서 고 이낭을 일으켜 허리춤을 끌어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 뜨락 좀 보아라. 귀신 집 같구나. 가자, 곡란원으로 함께 가자. 내일 가장 먼저 이 뜨락을 정리하고 꾸며야겠다.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넌 시녀부터 골라라. 이씨가 갖춘 규모로…….”
강환장은 비틀거리며 말이 꼬인 듯 잠시 멈칫했다.
“이씨보다 조금은 낮추는 게 좋겠구나. 오늘 진왕이 네 얘길 묻더구나. 내가 널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과하면 오히려 너에게 안 좋다. 걱정하지 마라. 내 말 들어라, 너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선 아들을 낳아라. 음, 하나는 안 된다. 많이 낳아라. 방택, 네 아들은 하나같이 뛰어나다. 그러니 많이 낳아다오. 아들을 많이 낳아다오. 많을수록 좋다.”
고 이낭은 달콤해서 죽을 것 같아서 수줍은 얼굴로 웅얼거리다가 얼굴을 감싸고 부끄러운 듯 투덜거렸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 정말 너무 다정해요!
“또 하나, 걱정하지 말아라, 이번엔, 아들을 위해서, 너를 위해서, 걱정하지 말아라, 이씨가 고명을 받을 때, 너도 받게 해주마! 이번엔 절대로……. 끅!”
강환장은 별안간 딸꾹질하며 다음 말을 삼켰다.
술이 과해서 말이 너무 많았군. 그 나이 든 민머리가 뭐라고 했었더라? 더 이야기하면 안 되지.
술이 과했어.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오라버니?”
강환장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고 이낭은 또 조마조마해졌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오라버니의 총애에 달린 것을!
“괜찮다. 조금 취했다. 취했어! 해장탕은? 해장탕을 넉넉히 가지고 오라고 해라.”
강환장은 고 이낭에게 기댄 채 비틀비틀 걸으며 손을 휘둘러 분부했다.
근래 몇 년 동안, 진 부인은 검소하게 집안을 다스렸고, 온 저택에 사람 사는 뜨락 말고 다른 곳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고 이낭의 거처도 상방에서 나올 때 불을 꺼서 안뜰, 바깥뜰 할 것 없이 어두컴컴했다.
강환장은 취기가 올라 걸음이 비틀거렸고, 달콤함과 행복감에 취한 고 이낭은 오라버니를 올려다보기 바빴다. 마당 문 앞에 도착하자, 강환장은 성큼 문턱을 넘었는데 고 이낭은 문턱을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렸다. 강환장에게 안겨 있던 상반신이 그대로 꼬꾸라졌고, 깜짝 놀란 고 이낭이 꺄악 소리를 지르며 강환장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비틀거리던 강환장은 다리가 고 이낭의 다리에 막혀 있는데 이렇게 잡아채니 고개를 뺀 채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렀다. 고 이낭은 다시 꺄악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본능적으로 강환장을 앞으로 떠밀고 중심을 잡았다. 다행히 그녀는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았지만, 강환장은 더욱 확실하게 마당 문밖 돌계단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고 이낭은 바닥에 쓰러진 강환장을 놀라고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청석 바닥에 쿵 하고 머리를 박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내가 넘어뜨렸어! 내가!
고 이낭은 겁에 질려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오로지 본능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달려가 강환장 위로 털썩 자빠졌다.
같이 넘어져야 해. 그러면 내 탓이 아니야!
양손으로 바닥을 지탱하며 일어나려던 강환장은 고 이낭이 묵직하게 떨어지자, 쿵 소리와 함께 다시 이마를 청석 계단에 박았다.
“여, 여봐라!”
강환장은 머리가 윙윙 울리고 눈앞에 별이 보였다. 등을 고 이낭이 누르고 있어서 양팔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고 이낭의 거처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강가엔 원래 종복이 적은 데다가 오늘 아침에 강환장이 반 이상을 팔아치웠다. 돌멩이를 집어 던져도 맞을 사람 없을 정도로 저택이 비었는데, 강환장이 부른들 달려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강환장이 쉰 목소리로 몇 번이고 불러봐도, 벌레 소리뿐 대답 하나 들리지 않았다.
고 이낭은 온몸에 힘을 풀고 강환장의 등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후회했다.
오라버니가 처음 불렀을 때 눈을 떴어야 했는데.
아까 눈을 뜨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눈을 뜨면 기절한 척한 걸 들키지 않을까? 기절한 척한 걸 오라버니가 알게 되면 큰 화를 입을 거야. 아직 깨면 안 돼. 하지만 오라버니가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목소리까지 쉬었어…….
고 이낭은 골이 깨지도록 고민했다.
눈을 떠? 뜨지 마?
강환장은 머리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죽을 듯이 아팠다. 오히려 술이 깨면서,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등은 고 이낭이 누르고 있고 손은 덜덜 떨려서 버티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단 몸을 틀어서 고 이낭을 밀어내고 기어 일어나서 비틀거리다가 고 이낭이 기운 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걸 보고 후다닥 쭈그리고 앉았다.
“방택! 방택! 괜찮은 것이냐?”
드디어 유유히 깨어날 기회를 찾은 고 이낭은 눈썹을 파르르 떨고서 천천히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괘, 괜찮아요?”
“머리가 심하게 아프다. 심하게 어지러워. 넌 괜찮으면 얼른 사람을 불러오너라. 머리에…… 피가…….”
강환장이 이마를 훔치자 선혈이 묻어났다. 흐릿한 달빛 아래, 고 이낭은 덜덜 떨며 강환장의 손에 가득 묻은 피를 바라봤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자마자 돌아서서 달리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오라버니, 내가 부축하면…….”
“어서 가서 사람을 불러라! 네 힘으론 안 돼!”
강환장은 머리가 징징 울려서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아 짜증스러운 듯 손을 휘저었다. 이러다가 성질을 낼 것 같았다.
강환장이 피를 흘린 걸 보고 이미 겁에 질려 있던 고 이낭은 그의 화난 목소리에 손발까지 다 서늘해졌다.
오라버니가 화가 났어. 내가 넘어뜨린 걸 아는 거 아니야? 내가 기절하지 않은 걸 아는 거 아니야?
“어서 가라고!”
고 이낭이 넋이 나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본 강환장은 초조해졌다. 이렇게 피를 흘리다간 죽는다!
“네, 네!”
고 이낭은 펄쩍 뛰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달렸다. 단숨에 청휘원까지 달려간 그녀는 어두컴컴한 청휘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대내내가 성 밖으로 나가서 저택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 이낭은 다급하게 방향을 틀어 진 부인의 정원을 향해 내달렸다. 지금은 진 부인이 자신을 미워하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진 부인은 진작 자리에 누웠고, 정원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 이낭은 탕탕 문을 두드리며 처참하게 외쳤다.
“문 열어! 어서 문 열어! 오라버니가 다쳤어! 어서 문을 열어! 오라버니가 술에 취해서 혼자 넘어졌어! 오라버니 혼자 넘어졌어! 어서 문 열어!”
문은 꽤 빠르게 열렸다. 어멈 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내밀다가 고 이낭인 걸 보고 화가 치밀어서 혀를 찼다.
“재수 없게! 무슨 할 말이 없어서, 이 새벽에 세자야를 저주해요! 귀신 본 거예요? 세자야는 저택에 안 계신데! 세자야가 언제 돌아오셨다고요! 세자야가 돌아오셨으면, 부인께 문안도 드리지 않으실 리가 있어요? 고함은 왜 질러요! 저기요, 이낭, 부탁입니다. 제발 소란 좀 그만 피워요. 제발! 숨 좀 쉬고 삽시다!”
어멈이 말을 마치고 문을 닫으려고 하자, 고 이낭은 초조해져서 후다닥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소맷자락에 피가 묻는 걸 보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저주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넘어졌어. 술을 많이 마셔서 혼자 넘어졌다고! 얼른 부인께 고해! 오라버니는 지금 청월원 문 앞에 있어. 피를 많이 흘렸단 말이야. 이러다가 죽어! 얼른 부인을 깨워!”
고 이낭의 소매 가득 묻은 피를 본 어멈은 화들짝 놀랐다. 지체할 겨를이 없어서 서둘러 문을 열자, 고 이낭은 문틈으로 들어가서 치맛자락을 들고 상방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진 부인은 몸져누워 있었다. 오 어멈도 곁에 없고, 정말로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누워있던 진 부인은 아들이 다쳤다는 말과 피로 물든 고 이낭의 소맷자락의 피가 아들의 것이라는 걸 듣고는 울기도 전에 눈을 까뒤집고 혼절했다.
고 이낭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져서는 손을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얼른 오 어멈을 불러와! 어서! 서둘러! 이번에도 안 오면 부인이 돌아가신다고 해. 세자야도 돌아가신다고 해! 그럼 이 집안은 끝장나!”
봉운은 진 부인의 인중을 힘껏 꼬집으며 어서 오 어멈을 불러오라고 날카롭게 고함쳤다.
부인에겐 오 어멈이 있어야 해!
“얼른 의원을 모셔와요! 뭐 하는 거예요? 이낭이 안주인 아니에요? 안주인이 될 거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