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비녀
두 달이 되기 전에 이의경이 횡령으로 조사받았고, 호주성에선 빠른 속도로 그녀의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 노야와 악마 같은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사건이 마무리되던 날, 그 귀신 같은 사내가 다시 나타나서 말을 전했다. 비녀도 같이 주면서 딸을 데리고 경성으로 옮겨 가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비녀를 들고, 모처에 가서 누군가를 찾으라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동동을 안고 경성으로 들어온 그녀는 그 비녀를 한 번도 쓰지 않고 지금까지 십여 년 버텨왔다.
“비녀를 들고 몰래 다녀오게. 신가아 춘시 일을 부탁하게.”
장 태태가 분부했다.
“이게 소용 있을까요?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 사람이 아직 경성에 있을지 없을지, 누가 압니까. 어쩌면…….”
손 어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맺지 않았다.
그녀와 만 어멈은 성격이 달랐다. 그녀는 만사 너무 조심하고 걱정이 많은 반면, 만 어멈은 낙관적으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갔다.
장 태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있지. 그 저택을 줄곧 주시했었네. 우리가 경성으로 온 이래, 저택의 사람이 바뀌지 않았어. 그리고 작년에 순녕왕부 그 난봉꾼이 억지로 우리 동동과 혼인하려던 일, 기억하지?”
“기억하다마다요! 염치없는 것!”
손 어멈이 혀를 찼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자, 말을 얼마나 모질게 하던가. 그러더니 며칠 만에 찾아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지. 뜬금없이 사람이 변한 것처럼 굴었지. 보살이 감화하셨겠나?”
“보살이 그런 인간까지 신경 쓰시겠어요? 태태 말씀은, 그것도 그 귀인이 도와주신 거라는 건가요?”
“음.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때, 경성으로 옮기라고 한 것도 그 귀인이 경성에 오래 머물 예정이거나, 집이 경성이라서 우리를 보살피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하고 어머니에게 말했었지.”
“태태,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 처리만 보면, 그 귀인이 정말로 태태와 동저아에게 좋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비밀스럽게 굴까요? 남몰래 말입니다.”
“저마다 고충이 있는 것 아니겠나.”
장 태태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귀인이 대체 누구인지, 경성으로 들어온 이래 어머니와 함께 주시했었고, 조금 짐작이 잡혔다. 그 고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어머니에게 들었다.
“우리가 경성에 뿌리내린 지 십여 년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로웠네. 암암리에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는 걸 확실히 느꼈어.”
“태태, 알아본 적 있으세요?”
손 어멈이 주변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며 묻는 말에 장 태태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호의로 우리 일가를 돌봐주는 사람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굳이 알아보는 건 지나치지. 그저 우리가 잘 지내길 바라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네. 길게 말할 것 없으니 내일 일찍 다녀오게. 춘시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 혹시 그분이 도움이 안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세.”
“예. 내일 일찍 바로 가 보겠습니다.”
등화원으로 돌아온 이동은 오늘부터 친척 오라버니가 진짜 오라버니가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방에서 나와 회랑에 선 채 잠시 멍하니 있다가, 회랑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다시 뜰로 나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높은 하늘의 신불(神佛)이 그녀를 깨우치게 해서 돌려보낸 거라면 분명 그녀를 애틋이 여긴 것이리라. 그러니 이번엔 아마도 살길이 생길 것이다.
“녹매는?”
회랑을 따라 몇 바퀴 더 돌면서 마음을 다잡은 이동은 결심을 굳히고 소리 높여 불렀다.
“녹매는 지금 당직이 아니에요. 제가 불러올게요.”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르던 문죽이 치맛자락을 들고 녹매를 찾으러 사뿐사뿐 달려갔다.
자등 산장으로 온 이래 시녀들도 활발해졌다.
잠시 후, 녹매가 문죽을 따라 들어왔다. 이동은 문 앞 의자에 앉아서 옆에 앉으라고 눈짓한 다음 문죽에게 분부했다.
“녹매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 넌 밖을 지키렴.”
문죽은 그녀의 의중을 알아듣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저 멀리 수화문 밖으로 나가서 지켰다.
이동은 이미 심각한 표정을 짓는 녹매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너만 알아야 해.”
녹매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들었어요. 전 아무것도 못 들은 거예요.”
“응. 이따 대해더러 상원현에 데리고 가달라고 해. 상원현에 도착하면, 문씨, 문도라는 사람을 찾아가.”
이동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열심히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깐, 그 사람 이름이 문도라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 다들 문 이야라고 부르니까. 문 이야를 찾아. 어차피 쉽게 알아볼 수 있어. 서른, 아마 서른 남짓일 거야.”
이동은 처음 문 이야를 만났을 때 상황을 애써 떠올렸다. 그때 그의 나이가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 서른이라고 해도 되고, 쉰이라고 해도 될 모습이었다. 지금 서른 남짓일 것이라는 건 그녀의 추측이었다.
문 이야는 생일을 한 번도 지내지 않았다. 하나뿐인 누이가 그가 쉰넷일 때 세상을 떠났다. 강환장이 마흔 생일을 지냈을 때인데, 누이가 세 살 더 많다고 문 이야가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못 생기고,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야. 얼굴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얼굴을 몰라도 알아볼 수 있어. 왼 다리를 조금 절어서, 걸으면서 왼발을 디딜 때 주춤주춤해. 하다가 안 되면 오른발로 바꾸고. 그런데 걸음은 느린 편은 아니야. 매우 못생기고, 키도 작아. 키가 너랑 비슷할 거야. 그런데 못생겼어도, 인파 속에 있으면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어. 그리고 문 이야는 눈이 매우 크고, 눈동자가 밝아. 무서울 정도로 까맣게 빛나.”
녹매는 이동의 묘사를 열심히 들을수록 무서워졌다.
낭자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냥 아는 게 아니라 분명 만난 적 있어. 한두 번 만난 게 아니야.
넘어진 후로 사람이 변하셨어…….
낭자가 지금 하는 말, 지금 모습, 일부러 당부하지 않아도 마음 깊이 담아둘 수밖에 없을 듯했다.
“나도 어디에서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에게 누이가 있어. 학후항에 살고, 자형이 이씨야. 상원현에 도착하면, 우선 누이부터 몰래 알아봐. 그곳에 자리 잡고 지켜. 문 이야에겐 누이가 하나뿐이고, 매우 친해. 누이 집만 지키고 있으면, 며칠 안에 분명 만날 수 있어. 기억해. 상원현에 도착하면, 네가 찾아야지 여기저기 묻고 다니면 안 돼. 네가 문 이야를 찾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문 이야를 찾는 걸 들켜선 안 돼.”
“알겠어요! 그럼 찾은 다음엔요? 뭐라고 해요?”
녹매는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낭자가 사람이 변한 것 같긴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니잖아. 낭자는 여전히 낭자야. 예전의 낭자가 아닐 뿐.
이런 느낌을 남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낭자가 분명 원래 낭자가 아니라는 걸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낭자는 여전히 낭자였다.
어쩐지 지금 낭자가 예전의 낭자보다 좋았다. 지금 낭자는 매우 침착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예전의 낭자는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서 내내 불안했었고.
“문 이야를 찾으면, 네가 모시는 주인이 보냈다고 해. 인품과 학식 모두 뛰어나단 말을 듣고 어느 학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한다고. 아니, 학생이라고 하면 안 되겠다. 그냥 신진 진사를 보좌해주면 좋겠다고 해. 그리고, 네 주인 집에 뛰어난 찬모들이 있다고 해.”
“그 문 이야라는 분, 음식 솜씨를 중시해요?”
녹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응. 먹는 걸 제일 좋아해. 맛있는 걸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사람이야.”
이동은 문 이야를 떠올렸다. 그 당시, 문 이야를 잘 모시려고 유명한 요리사를 온 천지로 찾아다녔다. 장호수에서 파는 씨육수도 사 온 적 있었다.
“예. 그럼 지금 바로 갈까요?”
“응, 지금 바로 가.”
녹매가 일어서며 묻는 말에 이동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원현은 경성에서 그리 멀지 않고, 자등 산장에서는 더 가까웠다. 이가 마차는 모두 최고급이라서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분명 도착하리라.
“가서 짐 챙기고, 수련에게 가서 은자 2백 냥을 받아 가. 대해에게는 문죽을 보낼게. 사람을 많이 같이 보내주지 못하니까, 네 안전은 네가 잘 챙겨야 해. 누가 물으면 내가 상원현에 간식 심부름 보냈다고 해.”
“네!”
녹매는 일어서서 예를 갖추고 물러나 짐을 챙기러 갔다. 이동은 문죽을 불러서 녹매를 데리고 상원현에 간식 사러 가라고 대해에게 전했다.
큰 주방으로 돌아간 왕 어멈은 느릿느릿 점심을 먹은 다음 직접 만든 간식을 가지고 고 이낭의 명대로 오 어멈을 만나러 갔다.
왕 어멈은 그길로 감감무소식이었고, 고 이낭은 해 질 때까지 기다려도 왕 어멈의 보고와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곳간 열쇠를 얻지 못했다.
저녁 식사는 허드렛일하는 어멈 둘이 왕 어멈의 전언과 함께 들고 왔다. 풍한이 들어서 저택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고. 옮을 수 있으니 내일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모레는 올 수 있을지는 내일 상황을 봐야 안다고.
고 이낭은 점심 먹고 진 부인의 거처로 향했었다. 이모와의 관계는 반드시 풀어야 했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진 부인은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통곡해서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다가 마침 강완, 강녕을 만났고, 강녕에게 뺨을 맞았다. 그래서 한창 슬퍼하고 우울해하던 참인데 왕 어멈의 전언에 분통 터져서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날 강환장은 매우 늦게 돌아왔다. 거나하게 취해서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청월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오늘부터 진왕부 장사 일을 시작했다. 벼슬길에서 몇십 년 굴렀고, 부승상 자리에도 거의 십 년 가까이 있었던 그로서는 장사 업무는 식은 죽 먹기였다. 오래도록 쌓여 있던 대소사를 반나절 만에 깔끔하게 처리한 다음 법도를 세우고 규정을 만들었는데 익숙한 일이라서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웠다.
진왕이 오늘 종일 갈수록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걸 생각하면 삼복에 빙수를 먹는 것처럼 속이 후련하고 편안해졌다.
청월원으로 들어간 강환장은 문틀을 붙든 채 눈살을 찌푸렸다. 청월원 정문부터 수화문까지 등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것이, 수화원 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고 상방 쪽에만 도깨비불 같은 작은 등불이 보였다.
강환장은 휘장을 젖히고 실내로 들어갔다.
그 작은 등불에 의지해서 자기가 가진 재산을 일일이 살펴보던 고 이낭은 화들짝 놀랐다.
“오셨어요. 왜…….”
“거처를 왜 아직 정리하지 않고? 시녀는? 마음에 드는 시녀를 몇 명 고르라고 하지 않았어? 저택에 있는 아이 중에 쓸 만한 사람이 없으면 거간꾼을 부르면 되지, 어째서 거처에 너 혼자 있는 것이야?”
저택으로 돌아와서, 특히 이 뜨락으로 들어오자마자 번화하고 떠들썩하고 흥겹던 마음이 순간 퇴락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런 가시방석 같은 느낌에 몹시 거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