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54화 (54/463)

54화: 친절을 베풀다

“귀띔해줘서 고맙네, 어멈.”

이신은 고맙다고 인사부터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신발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처지가 어떤지, 어멈도 잘 알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난 태태를 친어머니처럼 여겼네. 태태와 아동 누이에게 도움이 조금이라도 된다면, 나 이신은 바라마지 않네.”

만 어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이거, 이거…… 아직 본론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어멈이 유모와 회랑에서 이야기한 거, 안에서 다 들었네.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것도 알고.”

이신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만 어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양자가 되기 싫어할까 봐, 어멈이……. 아마도 태태가 걱정하셨겠지. 그런데도 태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서 거절하지 못해서 괜히 응어리만 질까 봐 걱정하신 거지? 그럴 리가 있는가. 난 긴 세월 동안 벌써 태태를 어머니로 여기고 이동을 친누이로 여겼네. 내 친부모님도…….”

이신은 살짝 고개를 들고 예전 생각에 씁쓸해져 그렁그렁해진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분명 매우 기꺼이 바랄 것이네. 해마다 부모님 무덤에 찾아가서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 말씀드린다네. 난 이미 날 진짜 가족으로 여기는 어머니와 누이가 있다고.”

“아이고! 가아도 참!”

이신의 말에 만 어멈도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훔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조금 붉어진 얼굴로 이신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가아도 참, 알더라도 모르는 척 좀 해주실 것이지, 굳이 이렇게 대놓고.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이 늙은이 부끄러워서 어쩌라고요.”

이신은 눈썹을 치켜뜨면서 웃음을 얼른 참으며 깊이 장읍했다.

“예, 내 잘못입니다. 사과드리지요.”

“아시면 됐습니다. 다음엔 체면 좀 생각해주세요. 전 이제 늙어서, 앞으로 가아의 보살핌이 필요하답니다.”

만 어멈은 체면 차리지 않고 예를 받으며 활짝 웃었다. 역시 신가아가 좋은 사람이지!

“두 사람, 비밀 이야기는 끝났는가?”

정 어멈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채근했다.

“예, 예! 끝났어요.”

만 어멈은 성큼성큼 다가가 정 어멈을 부축하고는 장 태태의 의중과 이신이 조금 전에 한 말을 소곤소곤 말해 주었다.

오전부터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간 고 이낭의 마음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조금 평온해졌다.

구름을 밟는 것처럼 꿈같은 기분으로 청월원으로 돌아와, 아침에 이미 둘러본 마당을 다시 바라보니 다시 낯선 기분이 들었다.

왕 어멈이 직접 그녀의 점심을 들고 왔다.

왕 어멈은 매우 친절한 모습으로 꿀로 찐 운퇴부터 꺼내 내밀었다.

“이거 좋아하셨지요? 주방에 고급 운퇴가 없길래 점포에서 새로 받아 왔습니다. 우리 가문의 고 이낭이 드실 거라고 일부러 당부했어요.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한다고요. 이낭, 드셔 보세요. 정말 좋은 거더라고요. 계화꿀을 썼어요. 괜찮은지 맛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면 다음엔 다른 꿀로 해 볼게요.”

왕 어멈은 생글생글 웃으며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운퇴를 설명하고는 찬합에서 다른 음식도 하나씩 꺼내서 한 상 가득 차렸다.

“부인이 드실 것도 가져다드렸어? 아침부터 가슴이 쑤신다고 하셔서 점심땐 담백한 음식으로 가져다드리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잘 준비했어?”

고 이낭은 붉은 즙이 가득 뿌려진 운퇴에서 시선을 떼고 왕 어멈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예, 그렇게 분부하셨었지요. 다 기억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부인이 드실 음식도 벌써 보냈습니다. 두 낭자, 그리고 청서와 두 이낭 것도요. 마음 푹 놓으세요. 우리 큰 주방은 이낭의 말씀만 듣습니다. 부인이 심장이 안 좋으니 담백한 것 위주로 하라고 하셔서, 점심엔 제가 직접 양반두부(凉拌豆腐: 두부무침)를 만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두부가 열을 제거하는 데 제일 좋아요. 그리고 구기자 볶음, 갓찜, 가지찜, 이렇게 해서 네 가지에 갓 두부탕을 곁들였습니다. 다 담백한 음식이고 기름 한 방울 쓰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고 이낭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을 들어 운퇴찜으로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버텨냈어!

밥을 먹고 장방 먼저 정리해야 하나, 아니면 그 혼수 곳간부터 살펴봐야 하나…….

이동의 혼수를 떠올린 고 이낭은 다시 주워온 혼수를 모두 곳간에 쌓아두었고, 곳간의 열쇠를 오 어멈이 가지고 있는 걸 떠올렸다.

“오 어멈이 몸이 많이 안 좋은데, 지금은 어떤지 사람을 보내 봤어?”

고 이낭이 운퇴를 입에 문 채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물러가려던 왕 어멈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얼떨떨해졌다. 주방 관리하는 사람이지 인사 관리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걸 왜 묻지?

게다가 오 어멈 몸이 좋은지 안 좋은지, 정말로 모른다. 오 어멈이 몸이 안 좋다는 것도 묘시 점호 때 알게 되었다. 정말로 아픈지 꾀병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저택에 새로운 관사가 생겨서 바짝 신경 쓰고 있었다. 오전 내내 심부름하느라 바빠서 오 어멈 일을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이따 자네가 한 번 가 봐.”

오늘 오전 일로 오라버니의 깊은 정을 제대로 가늠한 고 이낭은 자신감이 생기고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얼마나 몸이 안 좋은지 가서 보고, 저택 일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라고 전해줘. 그리고 곳간 열쇠를 받아서 와. 세자야가 분부하셨어. 전 관사가 그렇게 분별없이 구는 걸 보면 하루 이틀 일이 아닐 거야. 장방, 그리고 곳간을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어. 오 어멈은 아프다니까, 그런 일을 신경 쓰면 안 되지.”

왕 어멈은 함부로 대답할 수 없어서 침만 꼴깍 삼켰다.

고 이낭이 지금 내가 사람 눈 밖에 날 일을 시키는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오 어멈이잖아. 이낭이 아니라 대내내의 분부였대도 가늠해보고 해야 할 일인데!

그녀가 끽소리도 하지 않자, 고 이낭은 흘깃 쳐다보고는 재빨리 운퇴를 삼키고 다시 흘겨봤다.

“그럭저럭 괜찮네. 주방을 오래 관리했는데, 잘해온 것 같아. 꽤 유능한 것 같은데 주방 관리만 하긴 좀 아깝군. 우리 가문은, 이제 오라버니가 임무를 맡은 몸이라 예전과 달라질 거야. 앞으로 사람 쓰는 것도, 은자 쓰일 곳도 갈수록 많아지겠지. 무슨 심부름이든 열심히 하도록 해. 마침 사람이 필요한 때인 것도 그렇지만, 설령 아니라고 해도, 나와 오라버니가 자넬 홀대할 일은 없을 거야.”

“예. 이따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그렇게까지 하는 이상, 일단 눈을 질끈 감고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왕 어멈은 청월원에서 나와서 조급하게 부채질했다.

내가 미쳤지. 왜 굳이 직접 와서는. 보라고, 괜히 내 발목 내가 잡았지?

정말 미쳤지! 뭐에 씌었나!

왕 어멈은 자기 머리를 내리치고는 뺨도 때렸다.

미쳤어! 미쳤어! 고 이낭 곁에 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생각했었어야지! 알아서 들이대는데, 덥석 잡지 않을 리가 있어? 아이고 나도 참……. 세자야가 오통신에 씌었다는데, 왜 오통신은 우르르 몰려온다는 걸 잊었지? 분명 나도 오통신에 씐 거야!

어휴. 그래, 곁에 쓸 사람이 없는 걸 알고 잘 보이려고 가긴 했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덥석 잡긴 했는데 대뜸 오 어멈을 보러 가라고 하다니. 가지도 않고 보고할 순 없잖아. 됐다, 다녀오지, 뭐.

이낭이 한 말은 하나도 하지 말고, 나도 아무 소리 안 하면 돼. 그런 이야기는 절대로 못 하지. 하지만 열쇠는…….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말을 안 하면 돌아가서 뭐라고 해.

왕 어멈은 가는 내내 후회하고 가는 내내 난감해하며 뺨을 때렸다.

정말이지 어떻게 됐었지. 멀쩡하게 무슨 친절을 베푼다고. 잘 됐다! 큰 사고 쳤구나!

자등 산장.

점심때 술 두어 잔 마신 장 태태는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손 어멈과 이야기 중이었다. 손 어멈은 매우 기분 좋아 보였다.

“신가아는 참 좋은 아이예요. 전부터 양자로 들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낭자의 일이 아니더라도 양자로 들이면 좋지요.”

장 태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짝 취해서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이지. 신가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뛰어난 아일세. 동동은 그 아이가 흔하지 않은 뛰어난 인재라고 하지.”

장 태태는 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넘어진 이래 딸의 변화가 너무 컸다. 다른 사람은 모를지 몰라도, 자신은……. 동동은 그녀가 배 아파 낳은 아이였다. 그녀 배에서 나온 아이라서, 조금만 언짢아해도, 머리카락 한 올 빠져도 그녀는 다 느낀다.

동동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동동을 지나치게 아낀 바람에 너무 감싸기만 했다. 동동은 같은 나이대 여자아이보다 천진하고 어렸다. 성격이 급하고, 애증이 모두 얼굴에 드러났다. 일을 천천히 도모해야 하는 것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지켜볼 줄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지났다고 사람이 변한 것처럼 그런 걸 해낸다. 자신보다 더 잘 해낸다.

눈빛마저 예전보다 훨씬 예리해졌다. 신가아가 흔하지 않은 뛰어난 인재라는 말,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에는 그런 말을 꺼내는 건 모두 그녀였다. 풀어서 차근차근 딸에게 설명해줘도 모든 걸 다 잘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다.

“태태.”

장 태태가 넋을 놓고 있자, 손 어멈이 살며시 불렀다.

“아, 손 어멈, 내일 말이야, 자네 그 비녀를 가지고 다녀오게.”

장 태태가 정신을 차리고 하는 말에 손 어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녀라니요? 그 비녀요? 태태, 그 비녀 말씀이세요?”

“응, 바로 그 비녀 말일세.”

장 태태는 오매탕(烏梅湯: 오매를 달인 탕)을 달라고 해서 천천히 머금었다.

동동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도, 지금 그녀에겐 조력이 필요했다. 그 힘은 클수록 좋고, 많을수록 좋았다.

“그 비녀를 쓴다고요? 신가아를 위해서요?”

손 어멈이 숨을 죽인 채 나직이 묻자, 장 태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어머니가 그녀와 함께 호주에서 온 이씨 일족을 상대로 재산 분쟁 송사를 하던 중, 족장의 큰아들 이의경이 지부로 승관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그날, 이 노야와 악마 같은 그의 아들, 그리고 콩고물 얻어먹겠다고 호주성에 눌어붙어 있는 이씨 일족까지 전부 속여서 집으로 들인 다음, 인간성까지 버리고 손에 넣으려고 군침을 흘리는 바로 그 저택 안에서 다 같이 타 죽을 준비를 모두 마쳤다.

바로 그날, 온몸을 검은 옷으로 두른 음습한 그 사내가 돌연 나타났다.

‘누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으니 잘 들으시오. 두려워할 것 없소. 길어야 두 달, 반드시 눈이 녹고 꽃 피는 봄이 찾아올 것이오.’

귀신처럼 나타난 그 사내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귀신처럼 사라졌다.

귀신을 본 줄 알았다.

그 귀신 본 것 같은 사건, 그리고 어여쁜 동동을 위해서, 그녀는 온 저택에 놓아둔 동유를 치우고 이를 악물고 두 달 버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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