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52화 (52/463)

52화: 은자 조달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강환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장부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다. 장부 계산을 좀 해 봐야겠구나. 은자……가 얼마나 있는지.”

강환장은 ‘은자’ 두 글자를 뻣뻣하게 꺼냈다. 어딘가 거북스러워 보였다. 예전엔 이런 일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그가 이런 속물을 혐오하는 걸 잘 아는 이씨가 다 알아서 처리했다. 심지어 이런 아도물과 관한 것을 입에 올릴 일도 없었다. 필요해지면 분부만 했다. 나머지는 관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지금은 그 관사들을 아직 모으지 못했으니, 당분간은 우선 손수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지금 이 시기엔 아직 출세하지 못했고, 권세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그때도 이렇게 난처하고 껄끄럽게 일일이 손수 처리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기억엔 오로지 공부시랑이 된 후의 조정의 중대사로 꽉 채워져 있었다.

저택에 관한 기억은…… 아마도 장자가 태어난 후의 일부터 조금씩 기억하는 듯했다. 모든 지난 기억 중에, 그가 가장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그의 장자에 관한 일이었다. 장자가 붓을 들고 처음으로 써 내려간 첫 글이 꽤 그럴듯해서 글자마다 둥글게 붉은 칠을 해서 칭찬해 주었다. 처음으로 문장을 한 편 지었을 땐, 그 문장으로 과거를 봤으면 당당히 장원이 되었을 거라고 칭찬까지 했었다. 확실히 훌륭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고씨도. 매번 속이 답답한 채 중서 관청에서 돌아와 고씨에게 가면 마음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고씨는 쉰이 되어도 서른 남짓으로 보였고 갈수록 청아하고 우아한 기품이 넘쳤다. 정실이 갖출 덕과 재능을 모두 갖췄는데도 아쉽게도 첩의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서인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하늘이 지극하게 그녀를 후대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고씨는 다름없는 그 고씨였다. 다만 아직 어리고, 원래 겁이 많아서 단련해야 했다. 이번 생에 고씨는 분명 예전보다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강환장의 말에 은자 때문에 부른 걸 깨달은 고 이낭의 눈이 반짝였다. 숨을 죽이고 강환장의 말이 이어지길 빤히 기다리는데, 강환장은 살짝 넋을 놓았다.

“오라버니?”

강환장이 멍하니 앉아서 눈도 깜빡이지 않는 걸 보고 고 이낭은 또 걱정되어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강환장이 정신을 차렸다.

“아! 어제 내가 준 9천 냥, 잘 챙겨 두었지?”

고 이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심결에 앞섶을 쓰다듬었다. 천 냥짜리 은표 아홉장, 건네받은 후로 한순간도 떼지 않고 지니고 있었다.

“우리 저택의 장부에…….”

강환장의 말이 거기서 멈췄다. 장부엔 은자 몇 냥밖에 없다고 전 관사가 그랬다. 어제 그 사고가 없었더라면, 20만 냥이 있었을 텐데…….

고사현! 고유덕!

강환장은 아까워서 이가 갈렸다. 그 축생 한 쌍이 내 손에서, 강가에서 꼬박 30만 냥 은자를 가로채 가?

“장방 관사를 불러올까요?”

은표를 생각하다가 아비와 오라비를 떠올린 고 이낭은 또 조마조마해졌다. 아버지와 오라버니, 대체 얼마나 가지고 간 거야. 자그마치 10만 냥은 넘을 텐데.

오라버니, 정말로 내게 하해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구나!

“아니다.”

강환장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작 30만 냥이다. 이제 시운이 왔고, 앞으로 재물이 쌓일 강가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다.

“이따, 이씨의 혼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살펴보아라. 혼수 단자를 가지고 가서,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하나하나 똑똑히 대조하고 마치면 잘 잠가두어라. 건드리지 말고, 다른 사람도 못 건드리게 해라.”

강환장은 천천히 분부했다. 그녀는 아직 어려서 경험이 없고 식견이 부족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잘 가르쳐야 한다.

“네.”

고 이낭은 매우 온순하게 대답했다. 이제 마음도 진정되었다. 오라버니가 지금 차근차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휴, 정말로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오라버니처럼 정 깊고 의리 있는 사람을 만났는지 모르겠네.

“독산 있느냐? 송 대장궤를 모셔와라. 급한 일이 있으니 서둘러라.”

강환장이 문밖에 있는 독산에게 분부하자, 독산은 재빨리 대답하고 달려 나갔다. 강환장은 고 이낭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당부했다.

“송 대장궤는 장사 수완이 뛰어나다. 법도를 아는 사람이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장부는 너도 꼼꼼히 단속해야 한다.”

강환장은 언젠가 이씨가 했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고 이낭에게 당부했다.

“연말의 장부만 보면 안 된다. 명확하지 않단다. 매년 달마다 점포 하나를 골라서 세부 장부를 달라고 해서 살펴야 한다. 점포마다 1년에 두어 번은 뽑아서 살펴봐야 해. 그리고 장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장부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장부를 통해서 장궤의 수완과 인품을 볼 수 있지…….”

강환장은 말을 할수록 얼떨떨해졌다. 분명 이씨에게 들었던 말이리라. 이 저택에서 구리 냄새 풀풀 풍기는 아도물을, 그 장부를 질리지도 않고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볼 사람은 그 여인뿐이었다.

“네 본성이 청아하고 속되지 않은 걸 안다. 이런 서무를 너더러 처리하라고 하다니, 고생시키는구나.”

강환장은 열심히 자기 말을 듣는 고 이낭을 미안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난 오라버니만…….”

고 이낭은 애틋한 강환장의 눈빛에 수줍고 달콤해졌다. 싫지 않았다.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다 나 때문이라는 걸 안다. 나 때문에 이런 아도물을 손에 대는 것이지.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

강환장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진심으로 애틋했다.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그녀의 본성을 아는 건 자기뿐이었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잘해주니까, 난…….”

고 이낭은 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강환장을 바라봤다. 이렇게 잘해주고, 집안도 맡기고, 점포, 전장의 재산도 관리하라고 넘기고, 은표까지 넘겼다. 아까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차근차근 알려주기까지 하는데 고생일 게 무엇일까.

“음, 나를 생각해주는 네 마음, 나도 다 안다.”

강환장은 정이 뚝뚝 떨어지는 고 이낭의 얼굴에, 요 며칠 쌓인 울분과 맺힌 응어리가 금세 풀렸다.

이번 생엔, 황상에 관한 일은 이미 선수를 잡았다. 집안일은, 이씨가 저택에서 나가서 앞으로 이 집은 고씨가 관리한다. 이씨의 악습이 사라졌으니 이 집안은 분명 전보다 더 질서 있고 부귀해질 것이다. 예전처럼 어디를 가도 이씨가 내뿜는 돈 구린내가 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일단 큰 국면을 먼저 보자. 소소한 부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강환장과 고 이낭이 ‘나한테 참 잘해줘요.’ ‘네가 더 잘해주지.’ 어쩌고 정다운 말을 주고받으며 애정 어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어느새 송 대장궤가 도착했다.

“방택, 일단 아무런 말 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라. 잘 보고, 배워라. 명심해라, 첫째는 사람을 보는 눈이다. 사람부터 꿰뚫으면 앞으로 장부를 맞출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온다.”

강환장이 나긋나긋하게 말하자, 고 이낭은 잔뜩 의지하는 눈빛으로 강환장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응, 하고 대답했다.

독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송 대장궤는 강환장을 향해 장읍했다. 그러고 가만히 있자, 강환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 이낭을 가리켰다.

“고씨일세. 앞으로 강부의 안주인으로 여기면 되네.”

“예.”

송 대장궤는 지극히 시원스럽고 빠르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고 이낭을 향해 장읍했다.

“대장궤, 예 거두세요.”

고 이낭이 아리따운 얼굴로 자기 쪽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걸 본 강환장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씨는 이토록 고상한 사람이었다.

“요즘 지출할 곳이 몇 군데 있네. 일단 점포에서 10만 냥을 조달해서 고씨에게 전해주게.”

강환장의 분부에 송 대장궤의 얼굴이 굳더니 곧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아룁니다, 세자. 지금 소인은 강부의 점포 네 곳을 관리합니다. 그중 하나는…….”

“다 아는 일이니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것 없네.”

강환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송 대장궤의 말을 잘랐다. 돈 냄새 나는 이런 일이 치 떨리고 싫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면……. 후유!

“예. 그럼 소인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총 네 점포 중 비단 점포는, 여름용 비단을 실은 배 두 척이 강이 진흙으로 막힌 상황 때문에 저주(滁州) 일대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미 4월인데 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약방에서 유동할 수 있는 은자를 끌어서 물건을 채웠습니다. 지금 비단 점포와 약방은 전혀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 점포는…….”

“강이 진흙으로 막히는 상황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어째서 일찍 운반하지 않았는가? 설령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저주에 짐이 묶여 있으면 얼른 방법을 생각했어야지. 사람을 구해 진흙을 파서 길을 내던가, 아니면 화물을 육로로 옮겨 오던가. 누가 이번 화물 담당인가? 어째서 이 정도 고민도 하지 않는 게야?”

송 대장궤의 말에 속뜻을 알아들은 강환장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송 대장궤는 난감한 얼굴로 웃음 지었다.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화물이 돌아오면 소인이 관사를 제대로 훈계하겠습니다. 다른 두 점포에서도 기껏해야 오천 냥을 뺄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빼가면 점포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힐수방도 우리 가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강환장은 삐딱하게 송 대장궤를 바라봤다. 힐수방도 강가 사업이라는 말을 들은 고 이낭은 순간 들떠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힐수방이라니!

“아룁니다, 세자.”

송 대장궤가 고개를 숙였다. 강환장의 물음에 더 난감해졌다. 자기가 난감한 게 아니라, 난감해질 강환장 생각에 난감해진 것이다.

“힐수방은 이가 가업입니다. 지금 장 태태 명의로 되어 있고, 대내내의 혼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강환장의 얼굴이 살짝 퍼렇게 떴다.

힐수방이 아직 강가 것이 아니었나 ? 잊었군. 이런 돈 냄새 나는 서무를 신경 쓴 적이 있었어야지…….

고 이낭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장 태태 명의의 재산이었다니. 어쩐지 대내내가 힐수방에서 이것저것 가지고 오더라니. 조금 전에 갈아입은 옷도 힐수방에서 올해 새롭게 나온 양식이었다. 아쉽게도 한 벌뿐인데, 앞으로 힐수방에서 옷 몇 벌 가지고 온다면 그 계산은 누가 하게 될는지…….

“이씨가 혼수로 가지고 온 점포는? 거기에선 자금을 얼마나 뽑을 수 있나?”

오늘 반드시 4만 은자를 손에 넣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게다가 묵칠에게 주어야 하는 돈이라 강환장은 초조하고 또 초조했다.

송 대장궤의 목소리가 묘하게 딱딱해졌다.

“아룁니다. 대내내가 혼수로 가지고 온 점포는 총 여섯 개로, 소인이 관리하지 않습니다. 자금을 움직이시려면 조 대장궤를 부르셔야 합니다. 다만 조 대장궤는 대대로 이가의 장궤라서, 자금을 움직이시려면 아마도 대내내의 말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혼수를 모두 강가에 넘겼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넘긴 것이 넘긴 것인가?”

강환장은 화가 나기보다 초조함이 더 컸다. 화를 낼 겨를이 없다고 해야 좋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은자를 모으지 못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4만 냥은 모아야 한다. 이 세상에 그 4만 냥보다 더 큰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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