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추태
대교가 아주 빨리 돌아와서는 고했다.
양 구야 일은 어제저녁에 순조롭게 해결됐단다. 진왕을 모시는 사환 남명이 은표를 가지고 가서 이장을 불러 증인으로 세우고 그 자리에서 은표를 확인하고 마무리했다고.
은표가 어디에서 난 건지는 대교도 알아내지 못했다. 진왕부의 일을 그가 쉽게 수소문해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교가 수소문할 필요도 없이, 독산이 은자의 내력을 들고 돌아왔다.
“왕야는 못 뵈었고, 왕야를 모시는 북망이라는 사환을 만났습니다. 일하러 왕부로 급히 올 것 없고, 일단 집안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와도 된다고 왕야께서 직접 말씀하셨답니다. 그리고 ‘소화에게 전해라. 깊게 생각할 것 없다. 진왕부엔 급한 일이 없다. 수신제가 평천하라고 하지 않나. 제가(齊家)도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도 말씀하셨답니다.”
어젯밤 일을 겪은 독산은 지금 간이 쥐새끼보다 더 작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이야기할 뿐, 전혀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강환장의 시퍼레진 얼굴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에 북망이 또 하는 말이, 양 구야의 일은 마침 묵 승상 댁 칠소야를 마주쳤는데, 묵 칠소야가 통 크게 양 구야의 은자를 대신 갚아주었으니 세자야는 걱정하지 말라고 왕야께서 그러셨답니다. 세자야의 은자가 준비되면, 묵 칠소야에게 보내고 왕야 대신 묵 칠소야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 전해달라 하셨답니다.”
강환장은 머리가 윙윙 울려서 뒷걸음질 치다가 백보각(百寶閣)에 부딪치고 말았다. 선반에 놓인 물건들이 덜컹거렸다.
또 묵칠이다! 그렇게 경계했는데. 황상이 결국 묵칠의 은자를 썼을 줄이야! 바로 이 은자 때문에, 바로 이 은자 때문에! 황상은 흑백을 가리지 않고 평생 묵칠을 총애했다.
강환장의 목구멍으로 단내가 넘어왔다.
어제 어쩌다가 그 난리가 난 거지? 누구야? 누가 내 일을 망치려고 한 것이야? 이씨?
강환장은 목구멍으로 치미는 단내를 꿀꺽 삼켰다.
아니야. 그럴 마음은 있었겠지. 분명 그러고 싶었을 것이고. 고씨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만 바라니까. 분명 그러고 싶었겠지만, 그럴 능력이 어디 있어서!
그럼 또 누가 있지? 이 저택에 누가 또 있어서?
고가?
조금씩 도와주면 당연하게 여기다가 큰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원망하는 법. 금수 같은 두 인간이 10만 냥을 받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더 원한 것이다. 더!
어제 은표를 얼마나 뺏어갔을까? 10만? 15만? 20만? 그리고 물건들도…….
한참이 흐르고, 강환장이 아무런 기척이 없자 독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강환장의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세자야!”
“닥쳐라!”
강환장이 버럭 고함쳤다. 이마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모든 게 고가 탓만은 아니었다. 이 저택, 이 가문, 이 엉망진창에 법도라곤 없는 이 가문,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개돼지 같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안은 어머니 손에서 나날이 퇴락했다. 이 지경까지 퇴락했다. 쓰레기 같은 종복들, 하나같이 감히 주인의 재물에 손을 내고, 감히 주인을 함정에 빠뜨리고, 감히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들!
강환장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피, 시신, 끔찍한 머리통이 쉴 새 없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강환장은 양손으로 멱살을 꾹 움켜쥐었다. 그 분노, 고통, 억울함이 강렬한 자기 연민과 함께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강환장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없이 절규했다.
독산은 강환장의 소리 없는 통곡에 겁에 질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울며불며 엉금엉금 밖으로 기어나갔다. 이유도 모르고 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이 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 세자야가 미쳤으니 얼른 달아나야 했다.
문턱을 기어나간 독산은 휘장 밖에서 서서 휘장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던 대교의 다리에 부딪혔다. 강환장이 뭘 하는지 제대로 볼 생각에 정신없던 대교는 독산이 기어 나오는 걸 모르고 있다가 별안간 부딪히고는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사람과 부딪히리라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 독산도 꽥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비명을 제대로 지르기도 전에 대교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나갔다.
“쉿!”
대교는 독산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대교인 걸 알아본 독산은 맥이 탁 풀려서 대교 품에 머리를 박고 뒤를 가리켰다. 절구라도 찧을 듯이 손가락질하는 독산을 보면서 대교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아. 알았어.”
대교는 독산을 일으켜서 수화문 아래까지 끌고 나간 다음 상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미쳤어?”
“그렇다니까! 귀신 붙은 거 같아!”
독산은 아직도 두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지만 계속 저렇게 울게 둘 순 없잖아.”
대교도 어쩌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는 사환이 아니라 마부였다. 말 시중은 들어도 사람 시중은 들 줄 몰랐다.
“부인을 모셔와야겠다.”
“부인은 편찮으시잖아.”
독산이 밖으로 달려가려 하자 대교가 대뜸 잡았다.
“그러니까! 대교, 이를 어쩌면 좋아?”
독산은 당황해서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울상이 된 채 도와달라는 듯 대교를 올려다봤다.
“대내내가 계시면 좋을 텐데……. 지금은 나도 모르겠어!”
대내내가 계시면 좋을 텐데. 지금은 대내내가 안 계셔서, 청국이 수시로 전해오는 전언이 없으면 무얼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맞아! 고 이낭에게 가야겠다! 청서도 있지! 대내내가 안 계시지만, 이낭은 있잖아!”
대내내라는 말에 방법이 생각난 독산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고 이낭은 이른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강환장이 있는 자리에서 명부를 보고 종복들을 점호했었다. 강환장이 전 관사를 비롯한 종복들을 팔아치우는 걸 보고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잔뜩 몰려온 사내와 여인 중에 종복 몇몇을 골랐다.
강환장은 대충 마무리된 걸 보고 곡란원으로 돌아가서 독산과 대교의 기별을 기다렸고, 고 이낭은 어멈과 함께 강환장이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골라 준 청월원으로 들어갔다.
고 이낭은 정원 문 안으로 들어가 수화문을 지나 드넓은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꿈인 듯 황홀했다. 십자 모양으로 교차된 넓은 꽃길과 본채 회랑 앞에 무성한 은행나무라니!
고 이낭은 중간에 있는 꽃길을 밟으며 본채 계단 위로 올랐다. 다시 회랑을 따라 옆에 있는 보병문(寶甁門: 병 모양 문)을 통해 마지막 마당으로 들어갔다. 일곱 칸짜리 후조방 앞에, 왼쪽으로 태호석을 쌓은 정교한 석가산이, 오른쪽으로 푸르른 상비죽(湘妃竹: 반죽斑竹, 얼룩무늬 대나무. 순舜이 죽을 때 아황과 여영이 흘린 눈물로 대나무에 얼룩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이 다복다복 솟아 있었다.
고 이낭은 온몸이 굳은 채 뻣뻣한 다리로 후조방으로 들어가서 한 칸도 빠짐없이 하나하나 둘러봤다. 꼼꼼히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와 본채로 돌아가 보병문 옆에 있는 곁채부터 방을 하나하나 다 살폈다. 구석구석, 모든 물건, 모든 창문, 창문에 달린 휘장까지 모두 만져 보았다.
소복은 양손을 배 앞에 가지런히 놓고 뒤를 따르며 그런 그녀를 흘겨봤다. 계속 입을 비죽이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삼진(三進) 마당의 구석구석까지 다 살펴보고, 모든 물건을 다 만져 본 고 이낭은 본채 입구 십자 길 정중앙에 서서 사방을 둘러봤다. 이제야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라버니가 정말 대내내랑 같은 크기의 마당을 주셨어. 집안일도 관리하게 하고, 나를 정실로 대하고 있어. 오라버니, 정말로 내게 정이 깊고, 은혜가 깊구나…….
아까부터 지친 소복은 기둥에 기댄 채 맥없이 서 있었다. 하지만 감히 앉을 수는 없었다.
세자야가 어제 얼마나 화를 냈던가. 오늘 아침엔 또 사람들을 잔뜩 팔았다. 이 저택은 이제 세상이 변했다. 속셈이 깊진 않지만, 이렇게 큰일이 벌어진 이상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리 언짢아도 고 이낭을 언짢게 할 수는 없었다. 고 이낭이 언짢아지면 세자야가 언짢아질 것이고, 세자야를 언짢게 한 자신은 살아갈 길이 없어진다. 그 점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고 이낭은 까치발을 하고 빙그르르 돌았다. 돌고 또 돌고. 치맛자락이 활짝 핀 꽃처럼 펄럭였다. 고 이낭은 꽃처럼 펼쳐진 치마를 고개 숙여 바라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청월원 안으로 대뜸 들어온 독산은 마당 중앙에 서서 빙글빙글 돌면서 옥구슬 굴러가듯 까르르 웃는 고 이낭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낭! 어서 곡란원으로 가 보세요! 세자야가 위험합니다!”
독산은 휙 돌아서서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외쳤다.
“저는 청서 이낭을 부르러 갑니다!”
고 이낭의 웃음소리가 목구멍에 턱 걸렸다. 목이 막힌 그녀는 목을 길게 뺐다.
세자야가 위험해? 오라버니가 위험하다고? 오라버니가…… 위험해?!
고 이낭의 머릿속이 윙 울렸다.
설마 오라버니가…….
고 이낭은 울음을 터트리며 치맛자락을 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오라버니가 위험해. 오라버니가 죽는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복을 누리다니, 꿈만 같았어!
한바탕 생사 대난을 막 겪고 마음이 뒤숭숭해서 화살에 놀란 새처럼 작은 일만 봐도 파드닥거리던 강부 종복들은 고 이낭이 울며불며 오라버니를 부르며 달리는 처참한 모습에 겁에 질렸다.
세상에. 이낭이 오라버니를 부르며 저렇게 울어대다니. 오라버니라면 세자야잖아. 세자야가 왜? 급환에 걸린 거야? 아니면 귀신에 씌어서 죽은 거야?
막 자기 업무로 돌아간 종복들은 또다시 당황해서 발을 굴렀다.
시원스럽게 울어버린 다음, 전생에서 가지고 온 울분, 공포, 돌아온 내내 마음에 응어리진 불만, 분노, 초조함을 반쯤 털어낸 강환장은 일어서서 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혼자 정방으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구리 거울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골랐더니 온몸이 개운해졌다.
일이 틀어져서 또 묵칠이 진왕의 눈에 들었지만, 어찌 됐든 그가 묵칠보다 빨랐다. 그는 이미 진왕부 장사인 데다가, 진왕이 묵칠에게 은자를 보내라고 명했다.
강환장은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서히 뱉었다. 얼굴에 미소가 드러났다.
아까는 너무 다급했다. 진왕이 한 말만 들어도, 진왕은 묵칠보다 자기를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것이다. 묵칠의 은자는 얼른 갚으려 해도, 자신의 은자는 아직 가타부타 말이 없지 않은가. 진왕은 자신을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묵칠은 아니고!
강환장은 거울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울어서 벌게진 눈을 바라봤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조심스럽게 눌러봐도 여전히 붉었다. 이대로 출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분을 좀 발라야 할 듯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이렇게 죽으면 나는 어째요!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