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신 二
“어머니, 내게, 내게…… 오라버니가 있으면…… 앞으로 날 함부로 하지 못할 거예요……. 내게 오라버니가 있어요!”
상황을 모면하려는 말이었지만, 가장 진실한 말이기도 했다.
전생에 이신이 친정 오라버니였다면, 어머니와 단둘뿐인 이가를 지탱하는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이렇게 사리에 밝고, 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어쩌면…….
장 태태는 가슴이 철렁해서 이동을 일으켜 앉히고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이신을 바라봤다.
“신가아, 누이가 이런다고 웃지 마라. 휴, 말하자면 길다……. 일단 짐을 풀고, 푹 쉬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
장 태태가 손 어멈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자죽원이 조용하고 경치가 좋아. 출입하기에도 편하고. 대야를 자죽원으로 모시게. 자네가 직접 둘러보고, 바꿀 것이 있으면 바꾸고, 새로 들일 것이 있으면 들이고. 서둘러 지시하게. 그리고 얼른 힐수방에 사람을 보내서 대야가 입을 옷 열몇 벌 가지고 오게. 침선방(針線房)에도 다른 건 잠시 내버려 두고 일단 대야가 쓸 물건부터 만들라고 하게. 또…… 내가 생각하지 못한 건, 자네와 진주, 그리고 만 어멈이 살펴 주게. 보탤 것 있으면 보태고. 넘치는 건 괜찮아,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게.”
장 태태가 쉬지 않고 지시하자 이신은 눈시울이 붉어져서 정중하게 읍을 했다.
“숙모,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것 없이 돌봐주셨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네가 착한 아이라는 거, 안다. 정 어멈이…….”
“태태, 신경 쓸 것 없어요. 필요한 건 알아서 손 어멈에게 말할게요.”
정 어멈은 장 태태의 길고 긴 지시에 놀라고 말았다.
10여 년 만에 만났더니, 잔소리가 나보다 더 심해졌네요!
이동은 이신과 정 어멈이 멀어지는 걸 배웅하고 얼굴을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장 태태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살폈다.
“아동, 네가 이리 우는 걸 보고 생각난 것이 있단다.”
“어떤 거요?”
“네가 어릴 때, 데릴사위를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데릴사위를 업신여기잖아. 몇 대가 지나도 거론하는 사람이 있고, 자손이 관리가 되어도 이력에 조상이 데릴사위라고 기록되거든. 그럼 사위에게 좋지 않고, 사위에게 좋지 않으면 네게도 좋을 게 없지. 게다가 이가가 자손이 있든 말든, 우리 모녀가 알 바냐? 그래서 데릴사위 일은 잠깐 생각하다가 곧바로 접었다.”
이동이 어머니를 흘겨봤다.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요?
“나중엔 이렇게 생각했지. 우리는 모녀 둘뿐이지만, 어미가 아직 젊지 않니. 길게도 볼 것 없이 쉰, 예순까지는 어찌 됐든 살 것 아니냐…….”
“어머니!”
이동은 가슴이 철렁해서 저도 모르게 나무라듯 고함쳤다.
“쯧쯧. 이게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생로병사 아니냐. 됐다, 되었어. 이야기하지 않으마. 어쨌든 내 말은, 내 딸이 못난 것도 아니고 설사 변변찮은 사위를 얻는대도, 내가 뒤에서 10여 년은 돌볼 것 아니냐. 그 정도면 네가 누구와 혼인했대도 아이 몇 낳고 자리 잡겠다 싶었지. 혹시 좋은 혼처라면……. 휴, 이건 됐고. 어쨌든 그래서, 친정에 널 지지해줄 사람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동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 없이 찻잔의 맑은 찻물을 바라봤다.
“네가 강환장과 혼인하겠고 했을 때, 처음엔 싫었다. 아동, 널 탓하는 게 아니다.”
장 태태가 이동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강환장이 어때서 싫은 게 아니었다. 그건 나중이었지. 가장 큰 문제는, 그때 네가 강환장에게 지나치게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빠지면, 마음이 쉽게 흐트러진단다. 그런 지나친 마음 때문에,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것을 잃는 사람도 많거든. 휴, 그때 내가 모질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탓이다.”
“저를 너무 아껴서 그런 거죠. 제가 슬퍼하니까, 그게 싫어서.”
이동은 다가가서 장 태태의 팔에 얼굴을 비볐다.
“얘 좀 보아! 휴우, 그 말도 맞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고통을 알아서지. 가슴에 묻어두면 평생 아프다. 그래서 그땐 도저히……. 아이고! 이런 이야기 하지 말자. 너는 이 어미랑 닮았고, 어미는 내 어머니를 닮았고, 다 팔자가 사나운 것이다! 이런 상황까지 됐는데, 예전에 어쩌고저쩌고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신 이야기하지 않으마. 앞날 이야기하자. 아동, 아까 네 덕분에 떠오른 게 있구나. 아동, 신가아를 양자로 들이면 어떻겠니?”
이동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먼저 이야기할 줄 몰랐다.
“신가아가 밖을 두루 둘러보는 세월 동안, 관사와 장궤에게 그를 유념해서 살피라고 했었다. 신가아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어미가 이야기했었지? 학문만 따지면 내년 춘시에 반드시 급제할 것이다. 하지만 진사는 학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운명이 있어야 한다. 휴, 이 운명이라는 게…….”
장 태태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신가아 팔자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오라버니 팔자가 어때서요.”
이신은 내년 춘시에 진사가 되고 벼슬 운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배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벌써 계상이 되어 천하의 재물을 관리했다.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팔자였다.
“고된 운명은 어릴 때 다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분명 순조로울 거예요. 평생 높은 관직에 많은 녹봉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릴 거예요.”
이동이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장 태태가 웃음 지었다.
“음, 그래, 네 덕담대로 될 것이다. 그럴 재주가 있는 아이지. 우리도 경성에서 꽤 살았고, 연줄을 어느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자가 드는 일이니 내년에 급제하는 게 제일 좋지.”
장 태태는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건 다 아무것도 아닌데, 다만, 아이고!”
장 태태는 말을 멈추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 아이는 효성 지극한 아이다. 정 어멈이 그러는데, 해마다 부모 생신, 기일엔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반드시 무덤을 찾아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다고 하는구나. 몇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것도 아마 부모의 고봉(誥封: 5품 이상 문무관의 가족에게 토지나 작위를 내리는 것)을 받으려고 한 것이겠지.”
“어머니, 사람을 보내 속을 떠보는 게 좋겠어요. 좋다면 좋은 거고, 혹시 싫다면…….”
이동도 그건 장담할 수 없었다. 이신은 진사에 급제한 후에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의 봉작을 청했다. 똑똑히 기억났다. 그 일로 그의 신세가 사람들 입에 올랐고, 강환장은 장 태태가 그에게 베푼 은혜를 여기저기 퍼트렸다. 한때 온 경성이 그 일로 떠들썩했고, 그녀를 붙들고 이신의 신세, 그리고 그녀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문중에서 벌인 그 송사를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안심해라. 적당한 사람을 보내 떠볼 테니. 정 어멈은 안 되지. 만 어멈을 보내자. 만 어멈이 고향으로 돌아가 제사를 지낼 때 가장 많이 따라가서, 신가아와 친하다. 그런데 또 거절 못 할 정도로 친하진 않아. 의중을 잘 물어야 하는 일이다. 싫다면 그만이고, 혹시 좋다면……. 양자로 들이는 문서, 그리고 문중 문제도 다 잘 처리해야지. 소문부터 나면 안 돼.”
“강환장이 오라버니 춘시 때 손을 쓸까 봐 걱정하는 거죠?”
이동의 지극히 빠른 반응에 장 태태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동을 바라봤다.
“음, 네게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이부에서 강환장을 진왕부 장사로 임명하는 부전(附箋: 관리가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서에 내각 대신의 의견을 적어 첨부하는 쪽지)을 보냈다는구나.”
이동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강환장은 가장 먼저 진왕부 장사로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엔 올해 말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지금 생엔 분명 더 빠르고 더 좋은 시작을 손에 넣은 것이다.
“설사 진왕부 장사가 된대도, 춘시 같은 일에 손을 대려면 멀었어요. 진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처지에 춘시에 손댈 여력이 있겠어요?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이동의 목소리는 냉혹할 정도로 침착했다.
지금 그녀는 강환장도 자기처럼 돌아온 것을 완전히 확신했다. 과거의 기억이 있으니, 강환장의 성격에 이신은 가장 먼저 죽여 없애야 할 원수로 여길 것이다.
대놓고 움직여야 강환장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못한다. 안 그러면 이신이 더 위험해진다.
그러나 그 말은 어머니에게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 다만…….”
장 태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것도 좋지. 당당하게 양자로 들이자. 이 일로 강환장의 위인이 어떤지 보는 것도 좋겠지. 진심으로 신가아를 도와준다면, 적어도 인품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겠지. 인품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만 않으면, 부부로 살아도 된다. 중간에 수작을 부린다면,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경성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다. 자기 명성만 해치는 게지. 우리는……. 아이고,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네.”
이동은 내심 한시름 놓았다.
행동파인 장 태태는 결심을 하자 곧바로 만 어멈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진지하게 당부했다.
“잘 듣게, 우리는 친분을 맺으려는 것이지, 원수지려는 것이 아니야! 반드시 완곡하게 해야 하네. 넌지시 이야기하기만 해. 그리고 양자가 되든 말든 우리 사이는 변함없다는 걸 알려야 하네. 내가 그저 슬쩍 언급한 거라고 하게. 그 아이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게 있어서 행여 이 일이 틀어지면 오히려 응어리로 남을 걸세. 그럼 화근이 돼. 굳이 그럴 이유가 없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걱정하지 마세요. 태태.”
만 어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도 잠시 주저하다가 당부했다.
“어멈, 오라버니는 매우 뛰어난 인재야. 어멈도 여러 번 이야기했었지. 재능 있는 사람은 하나같이 고고하고 예민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은혜를 베풀고 강제로 보답을 바란다는 느낌을 주면 안 돼. 양자가 되든 안 되든 중요하지 않아. 그냥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보살펴 주는 마음 위주로 말해. 오라버니는 고아니까, 분명 우리 집을 자기 집으로 생각할 거야.”
“알아요.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만 어멈은 장담하며 물러나서 밖으로 나가면서 속으로 셈을 했다.
그녀와 손 어멈도 양자 문제를 뒤에서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었는지 모른다. 양자로 들이면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어서 전에는 뭐가 좋은지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가가 그 꼴이라서 낭자의 친정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있다. 안 그래도 요즘 한가할 때마다 속으로 태태가 진작 이신을 양자로 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지.
어떻게든 잘 해내야 해. 어디서부터 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