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신 一
빤히 이동을 바라보던 장 태태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불가에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그 깨달음은…….”
이동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깨달음은 사람을 똑똑하고 현명하게 만들어요. 깨달음이란, 사리, 인정, 세상 이치, 세상 물정 등 모든 도리를 알게 되는 거죠. 반야처럼요. 백정도 칼을 내려놓으면 즉시 불조(佛祖)가 되는 것처럼요. 그 순간 무수한 대자대비한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요. 어머니, 저는 별안간 깨달은 거예요.”
장 태태는 멍하니 이동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알았다, 알았어. 불조께서 널 교화하셨다니, 네가 그렇다고 하니……. 후. 그래, 묻지 않으마. 더는 묻지 않으마.”
장 태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너무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다.
“태태, 태태!”
손 어멈의 기쁨 가득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침묵이 깨졌다.
“무슨 일인가? 왜 또 호들갑이야!”
장 태태가 살짝 타박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요즘 그녀는 조금 예민했다.
“태태, 낭자, 누가 왔는지 보세요!”
“누군데?”
손 어멈이 자박자박 빠르게 달려 들어와서 하는 말에 장 태태가 일어났다. 이동도 따라 일어났다.
“신가아(信哥兒)가 왔습니다. 정(鄭) 어멈도 왔고요!”
손 어멈이 뒤를 가리켰다. 장 태태도 벌써 보고 달음박질쳐 계단으로 내려가 단숨에 정 어멈 앞에 섰다.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그렁그렁했다.
“기별도 없이 어떻게. 마중하는 사람을 보내게 기별부터 줄 것이지. 몸은 어때요? 유모가 아프다고 해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지금은 괜찮아졌고? 보낸 인삼은 잘 먹고 있죠? 언제 왔어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신가아의 내년 춘시(春試) 때문에 온 거예요?”
장 태태의 속사포 같은 물음에 정 어멈은 눈물을 글썽이며 웃음 지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상단의 배를 따라왔어요. 유 대관사가 내내 함께 있어서 평안히 왔어요.”
“유모, 들어와요. 진주는? 수련! 수건을 적셔 오너라. 뜨거운 물도 얼른 한 그릇가지고 오고. 식사는 했어요?”
장 태태는 아직 들떠 있었다. 정 어멈은 그녀의 유모였다. 혈혈단신인 정 어멈은 장 태태를 친딸보다 더 귀히 여겼고, 장 태태 역시 그녀를 어머니로 대접했다.
장 태태가 출가할 때 정 어멈도 배가 시녀로 이가에 들어왔다. 나중에 이신이 저택 밖에서 살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어서 정 어멈을 보내 이신을 돌보게 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다.
“아동, 얼른 유모에게 인사해라.”
장 태태가 이동을 부르는데, 이동은 빤히 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쁜 듯 슬픈 듯한 표정에 걷잡을 수 없는 들뜬 모습이었다.
친척 오라버니, 이신, 이 계상(計相: 나라의 재정財政을 주관하던 관직)!
빤히 이신을 바라보는 동안 무수한 과거의 기억이 한순간 몰려왔다. 이런저런 기억이 몰려와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몇십 년 동안 겪었던 이런저런 일을 떠올린 그 순간, 가슴을 할퀴는 기억에 숨이 턱턱 막혀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비틀거렸다.
이신은 그녀보다 네 살 많다. 그녀가 태어난 그해, 이신의 부친 이의명이 농한기인 겨울을 틈타 장사하러 나갔다가 예상치 못한 폭풍과 폭우를 만났다. 화물, 사람과 함께 배가 전복하여 동정호(洞庭湖)에 침몰했고, 이신의 부친은 의관장(衣冠葬)을 치르지도 못했다. 이씨 일족의 족장 이(李) 노야의 아들 중 가장 변변치 못한 둘째 이의해가 이신 가족의 최상급 논 100묘를 노리고 있던 터라, 이신의 어머니 문(文)씨가 분명 언젠간 재가할 거라는 핑계로 그 논 100묘를 강탈했다.
마침 이의명은 외아들이었다. 그 당시 이 노야의 큰아들 이의경이 이미 과거에 급제해서 관리가 되어 있었다. 이가에서 유일한 관리로, 이씨 일족은 이 노야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워서 하나같이 눈 감고 귀 닫고 모르는 척했다. 문씨 친정에도 나서줄 사람이 없었다. 현 관아로 가서 고발했지만, 관아에서는 집안에서 처리하라고 되돌려보냈다.
성격이 불같은 문씨는 매우 분노해서는, 춘절 제사를 올리기 전날 밤 아들 이신을 사당에 꿇어 앉혀 놓고 자기는 밧줄로 사당 입구에 목을 맸다.
이신은 제단으로 기어 올라가 위패를 들고 미친 듯이 모두를 향해 집어 던졌다.
이 노야는 이신이 위패를 던진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다며 꽁꽁 묶어서 연못에 던졌다.
장 태태가 이가에 들어간 지 2년째 되던 해로, 제사를 지내려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동을 안고 세 가족이 호주에서 시골로 내려갔다가 그 끔찍한 비극을 목격했다.
이동의 부친이 사람을 시켜 이신을 연못에서 건져 몰래 호주로 데리고 갔고, 장 태태는 유모 정 어멈을 보내 그를 돌보게 했다.
그때 이신은 이(李)라는 글자에 이를 갈았고, 오얏나무만 보아도 걷어차고 침을 뱉을 때라, 장 태태 부부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가 사람이 자기를 돌보는 걸 알았다가 분노한 끝에 이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였다.
한 해가 흐른 뒤 초여름, 이동의 부친은 역병이 옮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의 조부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친정에 의지하여 외아들을 홀로 기르던 조모는 아들이 병들어 죽자 너무 상심하여 보름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단맛을 한 번 본 이 노야와 이의해는 서둘러 호주성으로 달려와 이씨 일족에서 가장 큰 이가 재산에 손을 뻗었다.
상인 집안 출신인 장 태태의 친정은 식솔이 단출한 반면, 이 노야의 큰아들은 그때 이미 지현을 두 번 거쳐 승관을 앞둔 그야말로 떵떵거리던 때였다.
장 태태는 어린 이동을 안고, 어머니 엄(嚴) 노태태의 지지하에 이 노야와 온 이씨 일족에 맞서서 목숨을 건 재산 분쟁 송사를 시작했다.
갈수록 일이 커진 이 송사는 1년 넘게 이어졌다.
다음 해 가을, 이 노야의 장남이 지부로 승관했는데, 한 달 후 횡령을 한 것으로 밝혀져 면직되면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만에, 줄곧 건성으로 대응하던 호주 지부가 별안간 맹렬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서 온 호주에서 주목하던 이 송사를 벼락같은 속도로 마무리 지었다.
이의해는 대당(大堂)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고, 곤장 100대를 맞은 이 노야도 집으로 실려간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이 송사로 이 노야는 패가망신했고, 이동의 어머니는 참담하게 이기기는 했으나 재산 절반을 잃었다.
송사가 종결된 그달에 장 태태는 이동을 안고 모든 종복을 거느리고 호주 노택을 걸어 잠근 다음 경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때부터 이씨 일족과 왕래를 끊었다.
장 태태가 이동을 데리고 경성에 막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 때, 호주 지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륜에 벗어난 사건을 저질러 파직당하고 다시는 등용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재산 분쟁 송사가 종결된 그 날, 정 어멈은 이신을 데리고 이동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신은 장 태태 앞에서 맥이 빠질 정도로 울면서 이마가 깨질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장 태태는 원래 이신도 데리고 경성으로 가려고 했으나, 나이가 어려도 주견이 뚜렷한 이신은 절동성과 절서성의 문풍(文風: 문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이 가장 두터워서 좋은 스승, 도움 되는 벗이 많으니 호주에 남아 글공부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과거를 볼 때도 긴 거리를 왔다가 갔다가 할 필요도 없어서 더 좋다고.
이신이 남겠다고 하자, 그동안 그를 돌봐 오며 정든 정 어멈은 홀로 그를 남겨 둘 수가 없어서 함께 남게 되었다. 그렇게 정 어멈과 이신은 줄곧 호주에 남았다.
타고난 재능이 출중한 이신은 글공부도 지극히 근면히 하여 열여섯 되는 해에 수재(秀才)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장 태태는 아직 나이도 어리니 조바심 내지 말고 몇 년간 세상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라고 권했다.
이신은 장 태태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이가 상단을 따라 남북 각지를 돌며 식견을 넓혔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야 호주로 돌아가 다시 글공부에 매진하다가 다음 해 가을에 거인(擧人)이 되었다.
전생에도 이 시기에 경성에 들어왔던가?
전생에 그녀는 줄곧 강부에 있었고, 강환장에게 온 마음이 쏠려 있었다. 더럽고 저속하기 짝이 없는 강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서, 이신이 언제 경성에 들어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몰랐다.
그는 내년 춘시에서 진사(進士), 이갑(二甲) 칠 등이 된다.
이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고 이낭이 막 강부에 들어온 때로, 강환장이 집으로 돌아오면 진 부인 거처에 들른 다음 반드시 먼저 고 이낭의 거처에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때 그녀는 질투와 씁쓸함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그날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진 부인에게도 가지 않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더니 이신의 지난날, 어머니가 어떻게 이신을 돌봤는지 물었다. 어머니가 없었으면 이신의 오늘날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냐고 이신의 인품이 어떤지도 물었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다정했고, 놀라고 기쁜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경멸이 어렴풋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똑똑히 깨달았다. 자신이 눈만 멀었을 뿐 아니라 마음도 멀었었음을.
그 후로 10년 동안, 이신은 강환장의 벼슬길에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그랬다.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였다. 그해 이신이 갑자기 탄핵 상주서를 올려서 과거 10여 년 동안 남에게 드러낼 수 없었던 강환장의 모든 일을 대중에게 드러냈다.
중서성이 눈앞까지 왔던 강환장은 그 탄핵 상주서 한 장에 영흥군로(永興軍路)로 쫓겨났다. 그는 모래바람이 부는 혹한의 영흥군로에서 4년 고생한 끝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강환장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 이신은 이미 도지사(度知使)에 전임되어 계상이 되었다. 그 후로 10여 년, 이신은 강환장의 반대파에 서서 상극이 되었다.
그 10여 년 동안 강환장은 거의 매일 이신을 저주하고 욕했다. 금수라고 욕하고, 소인배라고 욕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욕하고, 간교하고 악랄하다고 욕했다. 그러나 배은망덕하다고 욕하진 않았다.
이동은 이신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고, 꿰뚫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모든 일이, 지금은 모든 위선을 벗겨내니 낱낱이 보였다.
이 친척 오라버니가 유일하게 나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나서준 사람이었어.
이동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이신 앞에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이신은 화들짝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부축하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고,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놀라기도 했고 다급하기도 해서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다.
장 태태가 달려가 이동을 안았다.
“딸아! 내 딸, 왜 이러는 것이냐? 이게 무슨……. 딸아, 울지 마라. 아이고, 얘야. 계속 이렇게 울면 어미 가슴 찢어진다!”
“나는…… 괜찮아요.”
이동도 자신이 추태를 보이고 있음을 알지만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오라버니를 만나서……. 나, 기억해. 오라버니를 기억해. 오라버니 기억해……? 분명 못할 거야. 나는 그냥 오라버니를 보니까…… 서러워서…….”
이신은 이동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이동의 행동, 말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해서 눈물이 솟구쳤다. 자신의 추태를 느낀 이신은 허둥지둥 돌아서서 도와달라는 듯이 정 어멈을 바라봤다.
“어멈, 누이가…….”
“괜찮다, 괜찮아.”
장 태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었다. 그런데 또 묘하게 가슴이 시렸다. 사촌오라비가 있으니 이제 강환장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