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스리다 三
처음엔 물건을 내놓고 후회하다가 이제는 다행스러워하던 어멈 몇은 말로 할 수 없이 흥분했다. 다들 달려가서 강환장이 가리킨 어멈을 휙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팔을 잡고, 나머지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한 모습으로 옷을 잡아챘다.
그 어멈이 비명을 지르자마자 강환장이 싸늘하게 입을 막으라고 분부했다. 한 어멈이 서둘러 옷을 구겨서 그 어멈의 입에 쑤셔 넣었다. 오 어멈은 도저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종복들이 하얀 맨살을 드러내고 한 줄로 늘어섰고, 바닥엔 옷과 비녀, 팔찌가 한 무더기 쌓였다. 그리고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를 뭉치도 있었고.
“다들 여기에 꿇고 있어라. 내 분부 없이는 아무도 일어나선 안 된다! 거기 너희, 물건과 옷을 다 치워라!”
강환장은 발가벗고 맨살을 드러낸 여자 종복들에게 다시 옷을 입으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발가벗은 채 발발 떠는 여자 종복들을 노려보다가 독산에게 잘 지키라고 분부했다.
독산은 겁에 질려 털썩 무릎을 꿇었다가 겨우 일어나 알겠다고 대답했다.
“부인은 연세가 많아 기운이 약하시고, 대내내는 병이 들어 고생하면 안 된다. 이미 대내내를 성 밖 장원으로 보내 요양하게 했다. 오늘부터 이 저택의 중문 안의 모든 일은 고씨가 맡아서 관리한다.”
강환장은 아직 서 있는 모두를 향해 매섭게 분부했다.
“다들 잘 들어라! 오늘부터, 지금부터, 이 저택에서 일하려면 최선을 다하고, 법도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매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 정각, 고씨가 의사청에서 점호하고 일을 시작할 것이다! 잘 들어라, 고씨가 안살림을 맡았으니 오늘부터 게으르고 태만한 그 마음을 거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와 고씨, 모두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청서는 무심결에 귀를 파고 또 파고 쉴 새 없이 팠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잘못 들었겠지?
춘연은 놀라고 두려운 듯이 추미를 바라봤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추미의 입가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낭자가 역시 귀신 같게 예상하셨네. 이분, 정말로, 진짜로, 완전히 정신 나갔어!
오 어멈은 얼어붙은 채 강환장을 바라봤다.
세자야, 오통신(五通神)이라도 달라붙은 겁니까?
(※오통신五通神: 남의 아내, 딸을 유린한다는 요괴)
고 이낭은 고씨라는 두 글자는 똑똑히 들었지만, 나머지는 환청을 들었다고 여겼다.
내가 이번엔 정말로 기절한 건가? 이건 분명 꿈이야!
강환장은 완전히 넋이 나간 고 이낭을 향해 다가가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나란히 섰다. 그러고는 냉랭한 눈빛으로 모두를 훑어보고는 다시 눈빛을 거뒀을 땐 부드럽고 애틋한 눈빛이 되었다. 그는 고 이낭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어깨부터 훑어내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오늘부터 네 재주를 보여주어라. 나 대신 이 저택을 잘 다스려다오. 네 능력을 안다. 지금 있는 인원뿐만 아니라, 열 배가 더 늘어도, 백부가 아니라 왕부라고 해도, 넌 수월하게 관리할 수 있다.”
강환장에게 잡힌 고 이낭의 차가운 손에 따스함이 전해졌다. 고 이낭은 가슴이 쿵, 쿵 뛰고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 감동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고 이낭은 눈물을 흘리며 강환장의 품을 파고들어 헐떡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나는……. 오라버니…….”
그동안 생사를 얼마나 오갔는지 모른다. 목놓아 우는 와중에 나오는 말이라고는 ‘오라버니’뿐이었다.
청서는 양손을 꾹 쥐었다. 화가 나서 온몸을 벌벌 떨면서 고 이낭과 강환장의 한데 얽힌 네 다리를 죽어라 노려봤다. 이대로 달려가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추미는 놀라서 눈썹이 다 날아갈 지경이었다. 망할 놈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 지경으로 망할 놈은 처음이었다.
저자는,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춘연은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추미와 서럽기 짝이 없는 듯 우는 고 이낭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가 고 이낭을 안고 부드럽게 위로하는 강환장을 바라보고 또 청서를 보다가 마지막에 다시 추미를 바라봤다. 돌연 기이한 느낌이 몰려왔다. 귀신 나오는 잡극(雜劇)을 보는 기분이었다. 잠깐 사이에 검은 연기가 사방에 치솟고 귀신 잡는 대목이 나오는 게 아닐까.
온 뜰 가득히 서 있거나 무릎 꿇은 사람들이 모두 넋이 나가서, 통곡하는 고 이낭과 그녀를 얼싸안은 강환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의 모든 이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느리게 움직인 이동의 마차는 야심하고 고요한 밤이 되어서야 영수암을 지났다. 이제 방향을 틀면 저 앞이 자등 산장이었다.
자등 산장 대문 앞은 등불이 환하게 켜있고, 대문 안에서 대문 밖까지 뻗은 백년 자등 나무는 한창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길고 촘촘히 드리워진 자등꽃이 대문 아래 등불을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수련은 벌써 마차 양쪽 창의 휘장을 높이 들어 올렸고, 만 어멈은 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을 뒤덮을 듯한 자등꽃을 보며 감탄했다.
“올해 자등꽃이 참으로 예쁘게 피었구나.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까! 이렇게 아름다운 자등꽃을 오랜만에 보네.”
이동은 노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아름다운 자등꽃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자등 산장은 그녀가 낭자 시절 가장 아끼던 장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산장은 강가 재산이 되었다. 강가 재산이 된 해였던가, 아니면 다음 해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멀쩡하던 이 자등 나무가 메말라 죽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 후로는 이 장원에 오지 않았다.
그 후 이 장원은 고 이낭의 장자 강대랑이 가장 아끼는 곳이 되었다. 자등을 뽑아내고 곳곳에 능소화를 심었다고 들었다. 구름 높이 올라간다는 이름, 능소가 좋다고.
이곳에서 자등꽃이 활짝 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낭자!”
수련이 얼른 젖은 손수건을 짜서 이동에게 건넸다.
휴. 낭자의 운 얼굴을 이따 태태께서 보시면 또 얼마나 슬퍼하실까.
“울지 마세요. 눈물처럼 쓸데없는 것이 없습니다!”
만 어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등꽃 아래, 손 어멈이 유리 등롱을 들고 잰걸음으로 달려와 맞이했다.
“낭자다! 낭자가 오셨다고, 얼른 태태께 고해라!”
산장 문 앞이 순간 어수선해졌다. 빗장을 열고, 등롱을 치켜들고, 말고삐를 건네받고, 마차를 밀고, 받침대를 놓고…….
“어머니는 별일 없지?”
이동은 손 어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없어요. 휴, 마음 아파하셔서 그렇지, 다른 일은 없답니다. 낭자만 괜찮으면 태태는 괜찮아요.”
손 어멈이 이동을 부축해서 내릴 때, 옆에 있는 가마의 휘장이 이미 젖혀졌다. 이동이 가마에 올라타니, 수련, 만 어멈, 손 어멈이 가마를 붙잡고 서둘러 자하원(紫霞院)으로 향했다.
자하원 상방 문 앞에 서서 수화문을 바라보던 장 태태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이동을 보고는 눈물이 솟구치려 해서 재빨리 손수건으로 눌렀다.
“머리는? 아프지 않니?”
장 태태는 달려오는 이동을 붙잡고 이마부터 살피면서 물었다.
“안 아파요. 난 괜찮아요, 어머니. 그 사람한테 화내지 않았어요. 나오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화를 왜 내요. 어머니, 별일 없었죠?”
이동은 장 태태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네가 별일 없으면 나도 별일 없다.”
장 태태는 속이 미어터졌다. 딸이 강가로 들어간 지 몇 달 만에 이런 난리가 나다니. 얼마나 애가 타는지 모른다.
“어머니, 나는……. 너무 기뻐요! 나는…….”
이동은 몇십 년 동안 고생한 끝에 겨우 수녕백부를 탈출한 느낌이었다. 살아나서 자유를 얻은 그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제야 메말라가고 죽어가던 늙은 몸뚱이가 아닌, 스물도 안 된 젊은 여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단 제비집 죽을 먹고 목욕부터 하려무나. 그리고 약을 먹고 한숨 푹 자자. 이야기는 내일 천천히 해도 된다.”
장 태태는 이동의 말을 자르고 대시녀 진주가 건넨 죽을 받았다. 그녀는 이동이 먹는 걸 지켜보다가 정방에 목욕할 준비를 하라고 연신 분부했다.
이동이 잠든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던 장 태태는 살금살금 상방 문을 닫고 나와서 진주에게 분부했다.
“수련과 다른 사람들은 종일 시달리느라 지쳤을 것이다. 오늘 밤엔 네가 이곳에서 지켜라. 혹시 낭자가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거든 얼른 나를 부르고. 의원 두 분이 바로 전원에 묵고 계시니 얼른 모셔야 한다.”
진주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다른 시녀에게 이불은 됐으니 바늘과 실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바깥채에서 밤새 바느질할 생각이었다.
고 이낭은 강환장을 따라 비몽사몽간 곡란원으로 돌아가서는, 강환장이 목욕하고 나왔을 때까지 변함없이 넋이 나간 채 침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온통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했다.
“왜 그래? 내가 그 천것들을 벌준 걸 보고 놀란 것이야?”
강환장이 고 이낭을 끌어안고서 얼굴을 그녀 얼굴에 비볐다.
“오라버니, 오늘 일…… 난 정말 몰랐어요…….”
고 이낭은 강환장에게 안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나도 안다.”
강환장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는 그녀를 품에 안아 쓰다듬으면서 애틋한 듯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눈길 하나 온화하기 짝이 없었다.
“딱한 너를 내가 왜 탓하겠어.”
강환장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녀를 탓하겠나. 그는 그녀가 겪는 고초를 제가 겪은 듯이 공감했다. 가문과 가족 문제는 그라고 그녀보다 나을 게 하나 없었다.
“오라버니!”
고 이낭은 이제 정말로 한시름 놓고 정신을 차렸다.
오라버니는 정말로 나를 탓하지 않아. 한숨 돌린 다음 나를 혼내려는 게 아니었어. 정말로 나를 탓하지 않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나는……. 오라버니…….”
고 이낭이 강환장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슬픈 목소리에 어리광과 수줍음이 물씬 묻어났다.
어쩌다가 그런 부모, 그런 오라비, 그런 여동생들을 만났을까. 전생에 무슨 업을 지어서. 차라리 고아이길 너무나 바랐다. 부모, 형제자매 다 없고, 외사촌 오라버니만 있길 바랐다.
“울지 마라. 이것 좀 봐라, 울어서 눈이 다 빨개지기는.”
강환장은 시녀에게 따듯한 수건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 수건을 받아서 고 이낭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날 향한 이…… 은혜와 정…….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없었으면 난 차라리 머리 박고 죽었을 거예요……. 나는…….”
고 이낭은 고개를 든 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강환장을 바라봤다. 정말로 너무 감격해서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몰랐다.
“방택, 너와 나는 부부다.”
시녀를 물린 강환장은 고 이낭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방택, 네가 얼마나 좋은 아인지, 내가 너무 잘 안다. 너의 재능, 너의 고결함, 난 다 안다. 나는 널 처로 맞이하고 싶었다……. 다만…….”
고 이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를 처로 맞이하려 했다고?
예전에 그를 한두 번 떠본 게 아니었다. 그는 분명 알아들었고, 강가를 지탱하려면 반드시 힘 있는 처가를 얻어야만 한다고 확실히 말했었다. 그녀를 처로 들일 수 없다고. 그와 그녀는 이번 생엔 인연이 없다고.
“방택, 날 원망하지 말아라.”
강환장이 고 이낭의 뺨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직 한 걸음 남았지만, 방택, 마음 놓아라. 그 여인과 너는, 명분 하나 차이 날 뿐 다른 건 다 똑같이 누리게 해주마. 명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녀보다 나을 것이다. 네가 그녀보다 모든 것이 나은 것도 맞고. 너는 하늘 같은 구름이고 그 여인은 진흙만도 못하다.”
“오라버니.”
고 이낭은 이번엔 조금 힘겹게 오라버니를 불렀다.
오라버니, 귀신 들린 건 아니겠지? 어떻게 이런 헛소리를. 나랑 새언니가 어떻게 비교가 돼?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도 없고, 돈도 한 푼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