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다스리다 一
휘장을 내리고 고개를 돌린 만 어멈은 이동의 놀란 눈빛을 마주하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사전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니까 너무 염려하세요. 아이고! 낭자, 이게 혼인입니까, 원수입니까. 어쩌다가 이런 집과 혼인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만 어멈은 마음 아프고 화가 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이동은 만 어멈 손을 잡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어멈, 별일 아니야.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오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 봐.”
만 어멈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해야 할 이야기 해야죠. 낭자의 혼수 곳간, 눈 뜨고 못 봐줄 꼴이 됐습니다, 병사가 휩쓸고 간 것보다 더 엉망이라니까요. 거기가 무슨 백부랍니까. 도적소굴입니다. 무슨 낯짝으로 백부 편액을 걸어 놓는 건지, 원. 낭자는 못 보셨지만, 관사 어멈들, 하나같이 악독합니다. 직금 비단을 둘둘 품에 찔러넣더라니까요. 감히 그래도 되는 물건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요!”
이동이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강가 안살림을 맡았을 때, 서가아라는 아이가 은자 열 냥 때문에 강환장의 공문을 훔친 일이 일어나면서 대대적으로 기강을 잡았었다. 하지만 그전엔 강가 종복들의 한도 끝도 없는 파렴치함과 계속해서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발목 잡던 비열한 수단 때문에 공연한 화를 얼마나 냈는지 모른다.
그 당시 위엔 진 부인이 아직 있었고, 강완과 강녕이 수시로 그녀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그때 그녀는 그들이 언짢아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들이 언짢아하면, 강환장이 언짢아한다. 게다가 대뜸 무릎을 꿇은 봉운의 일로 돈을 밝힌다는 오명까지 썼는데, 거기에 각박하고 악독하단 말까지 붙을까 두려웠다.
그때는 강환장이 자기를 무시할까 봐 너무나 두려워서 모든 일이 조심스러웠다.
이동은 눈을 감았다. 옛일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을 칼로 서서히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피눈물이 흘렀다.
“아이고! 낭자가 혼수로 가지고 온 능라 주단, 대부분 우리 호주 직방(織坊)에서 특별히 낭자를 위해 지은 것이라서 모두 수녕백부 표식을 티 나지 않게 넣어둔 거랍니다. 아이고, 다 망쳤습니다.
후, 됐어요, 됐어. 그만 이야기하세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태태의 말씀이 옳지요. 돈이 뭐 대단하다고요. 설령 다 쓰고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벌어오면 그만이지요!”
“맞아.”
이동의 그 짧은 대답에 슬픔이 묻어났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피눈물을 흘리다가도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가짜로 만든 주석 금붙이들, 너무 급하게 만들어서 걱정입니다. 낭자의 적금 장신구들, 몇 상자는 되는데. 낭자가 열몇 살 때부터 태태가 준비했잖습니까. 다 훌륭한 것들이에요. 좋은 건 공임이 금값보다 더 들었어요! 부랴부랴 만든 가짜로 어떻게 진짜같이 만들겠어요. 아무리 봐도 진짜 같지 않고 조잡해서 봐줄 수가 없더라고요.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그리고 혹시 누가 눈치챌까 봐 진짜 물건도 꽤 섞었답니다. 아이고, 혹시라도…….”
“혹시라도 뭐? 강가, 고가 위아래 할 것 없이 다 같이 내 혼수를 훔친 거야. 그 물건, 모두 다 장물인 셈이라고. 누가 감히 가짜라고 들고나오겠어? 그리고 강가에 남아 있는 것들도 그래. 그게 내 혼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강도들이 숫자 맞추려고 던져놓은 게 아니고? 설령 강환장이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하라고 한 일이야. 걱정할 것 없어, 어멈. 우리를 의심하진 못해. 그 저택, 그리고 고가에 그가 의심할 만한 사람이 넘쳐. 이 일을 제대로 조사할 주제나 되는지 두고 보고 싶네. 고씨가 안살림을 맡는다며. 잘 되었지. 이 일부터 선물할 테니, 손을 풀어 보라고 해.”
이동의 입가에 짙은 냉소가 피어올랐다.
만 어멈이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낭자는 낭자가 맞는데, 하지만 낭자가…….
“어멈,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넘어진 그날부로, 우리는 강가와 인척이 아니라 원수가 된 거야.”
“낭자……. 후. 예,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태태가 계시는걸요. 저는 본론이나 이야기하지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 금붙이들, 금붙이들은 그래서 얼마 없습니다. 다른 건, 값나가지 않는 것들이니 언급할 것 없고요. 전 관사 쪽엔, 대요와 대요 댁을 보냈고, 대요 댁이 부릴 수 있는 어멈 몇도 보냈습니다. 대요가 은표 상자를 밟아서 부순 다음에, 대요 댁하고 어멈들이 은표 2백 장을 거의 되찾아 왔습니다. 오늘 하늘이 도와서 바람이 분 덕분에 나머지는 대부분 호수에 빠졌고요. 호수에 떨어진 건 무조건 가라앉게 해두었습니다. 추미를 시켜 진짜 은표 아홉 장을 전 관사에게 찔러주었어요. 그래야 일을 처리하지요. 우리가 나오기 전에, 대요 댁이 은표를 세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모두 백 스무 장 정도였어요.”
이동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의 손실이 크진 않았다.
“빼앗은 은표들은 아마도 며칠 내에 몰래 전장에 가서 은자로 바꾸겠지요. 멀리 나가거나 하지 않고서야 감히 은표를 바꾸겠습니까? 전장 쪽엔, 낭자도 아시다시피 태태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한 건지 태태도 알고 계십니다.”
“이따 어머니를 만나면 내가 이야기할게.”
이동이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계산해 봤는데, 이번 일로 이래저래, 아무리 못해도 우리 은자를 10만 냥은 썼을 겁니다.”
만 어멈은 가슴 아픈 듯이 말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너무 무의미하게 쓴 돈이었다.
“그 정도면 적게 든 거야. 게다가 우리가 은자를 들이긴 했지만, 강환장이 득 본 것도 없고. 혼수 40만 냥 중에, 청휘원에서 쓰던 큰 가구를 빼면 곳간에 30여 만 정도 있었잖아. 그중에 30만을 빼내 온 거니 그만하면 괜찮아.”
이동은 몹시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지요.”
만 어멈은 잠시 이동을 바라보다가 겨우 대답하고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낭자, 조금 전에 고야가 득 본 것만 없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이 그래요. 고야를 원수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차라리 다른 사람이 득 본대도 고야는 득 보면 안 된다는 듯이. 대체 어쩔 생각이신지, 들어야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꾸민 일들, 대부분 태태에게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낭자, 이렇게 소동을 피우는 걸 보면 강가에서 제대로 살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아. 강환장이랑 계속 살 생각이 없어서 이 난리를 친 거야.”
이동은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이제 나왔으니, 다시 들어갈 생각 없어. 당분간은 가산을 나누고 따로 사는 것처럼 살 거야. 어머니는 강환장이 젊어서 철이 없어서 그런다고, 나이 들면 괜찮다고 하셔. 그럼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지, 뭐. 나이 들어서 괜찮아지면, 어리석은 게 나아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고, 계속 그렇게 어리석게 굴면, 나도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적어도 고생은 안 하잖아. 안 그래, 어멈?”
“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낭자가 이 사달을 내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요. 휴,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태태가 계시는걸요. 낭자, 태태와 상의하세요. 태태가 승낙하신다면야……. 어차피 저는 낭자 심부름이나 하면 되지요. 휴, 낭자 팔자가……. 팔자가……. 아이고!”
만 어멈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강환장은 분명 이미 진왕의 줄을 잡았고,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져 출셋길이 열릴 것이다.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오로지 예전의 아쉬움을 만회할 생각만 하는 듯했다.
고 이낭이 장자를 낳은 날부터, 그의 마음속엔 고 이낭이 정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들이 적장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그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잎을 무성하게 피우고 내내 자라나는 걸, 그녀는 똑똑히 봐왔다.
이동은 냉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는 그를 십수 년 동안 사랑했고, 그 후론 냉랭하게 그를 바라봤었다. 몇 년 정도였더라? 10년 가까이? 아니면 20년 가까이? 그 시절의 회한이 사람을 갉아먹는 개미처럼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회한이 매일매일, 깊은 밤이면 찾아와 그녀를 맴돌며 갉아 먹었다. 너무 후회스럽고 아파서 과거로 돌아가서 강환장을 너무 사랑해서 눈을 떼지 못하던 자기를 목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
강환장이 돌아왔으니, 고 이낭을 정실로 만들고 싶어 하던 그 마음도 함께 돌아왔을 것이다.
고 이낭이 그의 정실이 되면……. 하하! 나도 당신처럼 기대해. 아니 그 모습을 볼 수 있길 당신보다 내가 더 원해.
다시 강가로 돌아가지 않아. 그 목표는 분명 강환장의 목표와 일치하겠지. 난 다시 강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강환장은 내가 다시 강가에 발을 들이는 걸 더더욱 바라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강환장이 아주 노력하겠지. 나보다 훨씬 더.
강환장의 악랄함을 조심해야 해. 그는 출세하려 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려 하니, 그러려면 좋은 명성이 필요해. 작위가 있는 사람이 처를 버린 전례가 없는 건 물론이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는 그러지 못해. 그는 명성을 버릴 수가 없고, 화리는, 더 고려할 필요가 없어.
강환장이 철저히 내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는 거야. 강환장은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동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난 안 죽어. 그렇게는 못 해.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지켜야 해. 내 사람들을 지켜야 해. 살 거야. 우리 모두 살아야 해. 잘 살아야 해. 강환장보다 오래, 강환장보다 편안하게!
아주 잠깐 사이, 청휘원은 텅 비었다. 강환장이 넋이 나간 채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달이 뜨고 벌레가 즐겁게 울어댔다.
강환장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청휘원에서 나왔다. 계단에서 내려와 돌아서서 달빛 아래 청휘원을 올려다봤다. 원락 문을 닫으라고 독산에게 눈짓하고 몇 걸음 물러서서 청휘원의 하얀 벽, 푸른 기와, 붉은 문을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원락의 문은, 역시 닫아놓는 게 더 보기 좋군!
휙 돌아선 강환장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고 밝게 빛났다.
저택을 떠나 정양하겠다니, 마음대로 하라지! 잘 되었어! 아주 잘 되었어!
황상께서 안심하고 집안일을 처리하라 하셨다. 참으로 영명하시지. 이 집안, 제대로 다스려야 할 때가 되었다.
강환장은 성큼성큼 전원으로 향하면서 매서운 목소리로 독산에게 분부했다.
“모든 이를 전원으로 불러와라. 하나도 빠짐없이! 명부에 이름이 있는 자들은 모두 불러와라! 그리고, 명부도 가지고 와라!”
독산은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다리를 떨면서 달려갔다. 명부를 가지고 오라고 하다니. 세상에, 큰일이 터질 모양이다!
강환장은 전원으로 곧장 달려가서 정청 계단 위에 섰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계단 아래로 점점 모이는 종복들을 냉랭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누가 이야기할 것도 없이, 다들 큰일이 났음을 알고 상전이 벌을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세자가 나설 줄은 몰랐다.
계단 아래 모인 종복들은 강환장의 서늘한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한기에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부인은 무위이치(無爲而治)로 종복을 다스리며 교화하길 우선으로 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기껏해야 한 시진, 반 시진 무릎 꿇고 도리를 외울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세자야가 나선 이상 무릎 꿇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