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설계 된 판 二
“이게,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고사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는데, 늑대 울음소리보다 더 비참했다. 고 노야도 벌써 달려들어 손을 버둥거리다가 드디어 고사현 손에서 종이를 잡아채서 떨면서 펼쳤다.
“잉? 폐지잖아. 이게 상자 안에 있었다고? 그럼 은표는? 은표를 어쨌느냐!”
장궤는 슬쩍 뒤로 또 몇 걸음 물러나서 웃으며 공수했다.
“두 분 나리, 상자는 두 분이 들어오셨을 때부터 품에 안고 계셨습니다. 상자를 연 것도 나리고요. 무슨 일인지는, 두 분이 돌아가셔서 천천히 조사해 보셔야겠군요.”
장궤가 구석과 밖에 서 있는 호위를 향해 눈짓하자, 호위들이 조용히 다가와서 두 사람을 전장 바깥까지 쭉 밀어서 내쫓았다.
“제대로 간수하라고 했지 않아! 이 은표……. 10만 냥! 10만 냥이다! 어찌 간수한 것이야? 응? 어쩌다가 바꿔치기 당해!”
고 노야가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가슴을 부여잡는데,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고사현은 눈이 다 시뻘게졌다. 10만 냥 은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백지가 돼? 그 자리에서 미쳐 버릴 것 같았는데 쫓겨나서 찬 바람을 쐬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말도 안 돼!”
고사현이 다시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 상자, 강가에서 나온 이래,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어! 옥묵 그 계집과 즐길 때도 줄곧 상자를 누르고 있었어! 아니야! 바꿔치기 당한 것이 아니야. 강가다! 강환장이다! 그 망할 놈이, 그놈이 우릴 속인 겁니다!”
고사현은 직감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한마디 내뱉은 고사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강환장, 그 환장할 놈이 속인 것이든 아니든 책임은 그놈이 져야 해. 강가엔 돈이 넘쳐나잖아. 책임을 지우고, 10만 냥을 다시 내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받아내야만 해!
“강환장 그 망할 놈이 한 짓입니다!”
결론을 내린 고사현은 다시 생각해 보니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10만 냥을 달라는 대로 내어주다니, 이런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나 싶었습니다. 그때도 분명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럴 생각이었군요. 우리 부자가 착실하다고 업신여긴 겁니다. 백지로 우리를 속인 거라고요. 망할 놈!”
“인간이 할 짓이냐!”
고 노야가 생각해 봐도 맞는 말이었다. 어제 그 역시 강환장이 너무 쉽게 승낙하고, 강가가 너무 통이 크다 싶었었다. 일이 너무 순조로웠다.
역시나, 수지맞긴 무슨. 우리 부자를 속여서 쫓아낼 꿍꿍이였구나!
“갑시다! 가서 따져봅시다! 강환장, 이 망할 자식. 감히 은표로 나를 속여?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 내 누이를 납치해 갔지? 끝장을 보자! 강가를 부숴버리고 말겠다!”
고사현은 상자를 들고서 장삼 자락을 들어 올려 허리띠에 끼우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내내 고함치며 그 길로 수녕백부로 향했다. 온 거리에 할 일 없던 사람들이 주르르 뒤를 따르며 구경했다.
이런 일을 겪고서도 고사현은 제법 머리가 돌아갔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손에 익은 몽둥이, 뒤집개를 들고나오라고 모든 시녀, 시종을 불러 모으고, 자기는 도둑 잡을 때 쓰는 수화곤(水火棍: 관속들이 사용하는 몽둥이. 한쪽은 붉은색, 다른 쪽은 검은색을 칠함)을 들고 나섰다. 그렇게 스무 명을 이끌고 꽥꽥 고함치며 강가가 그에게 빚진 10만 은자를 되찾으려 수녕백부로 직행했다.
사환을 따라 만 어멈을 만나러 간 전 관사는 만 어멈을 따라 우물쭈물 몸을 꼬면서 눈길도 돌리지 않고 청휘원으로 들어갔다.
청휘원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상방 입구에 멈춰 섰다. 상자를 안고 기다리던 수련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 아경의(鵝頸椅: 문 앞에 세워두는 길쭉한 의자) 앞에서 바로 상자를 열었다. 만 어멈은 은표를 꺼내 전 관사와 함께 한 장씩 확인하고 상자를 닫은 다음 상자를 전 관사에게 넘겨주고 나란히 청휘원에서 나갔다.
만 어멈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한숨부터 쉬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에효, 전 관사가 남도 아니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어요.”
만 어멈의 심각한 표정을 본 전 관사는 흠칫해서 재빨리 대답했다.
“어멈, 무슨 일이든 말씀하세요.”
“우리 대내내가 심하게 편찮은 건, 전 관사도 분명 아시겠지요. 어제 손 태의 말이, 대내내의 병은 아무리 빨라도 연말까지는 정양해야 낫는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 관사도 봤겠지만, 이낭을 들이는 건 둘째 칩시다. 대내내는 대범한 분이지만, 혼수 곳간 일에, 보따리 싸서 온 일에, 납치했다고 사기 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라도 화가 날 일이지요. 이러니 어찌 정양합니까. 제대로 요양하지 못하면 연말에……. 어휴.”
만 어멈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정말로 마음이 아파졌다.
“세자야가요, 대내내의 병이 줄곧 낫지 않는다고, 그런데 안살림을 맡을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고, 대내내가 관리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고 이낭에게 맡기겠다고 하시네요. 앞으로 대내내를 대신해서 고 이낭이 수녕백부를 관리할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내내를 설득해서 은자를 전 관사에게 맡긴 거랍니다.”
전 관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이낭이요? 일개 이낭이요? 그럼 부인은요? 부인도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은 연세도 있는 데다가, 항상 골골하셔서 안 된답니다. 부인이 대내내 대신 집안일을 맡고, 안살림을 맡을 수는 없다고요. 그러는 법은 없답니다. 세자야가 이대로 말씀하셨어요.”
만 어멈이 혀를 찼다.
“세자야, 정말 정신이 나가셨군요!”
전 관사는 만 어멈보다 더 화를 내며 따라서 혀를 찼다.
만 어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전 관사는 영명한 분이지요. 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자야가 정신을 흐리시면……. 아이고!”
만 어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모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고, 말을 할수록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듣고 웃으시겠지만,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 대내내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제가 다 목놓아 울고 싶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후, 그만하지요. 본론을 이야기합시다.”
만 어멈이 눈물을 훔쳤다.
“전 관사가 영명한 분이라서, 나머지 20만 냥을 전 관사에게 맡기라고 제가 대내내를 설득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속이 좁습니다. 첫째, 앞으로 고 이낭이 우리 대내내가 돈으로 각박하게 대했다고 불평하는 걸 막고 싶습니다. 돈으로 고 이낭을 휘두른다는 말을 듣기 싫어요. 고 이낭이 집안일을 제대로 못 하면, 대내내가 뒤에서 괴롭힌다고 할 것 아닙니까. 고작 은자 몇 푼으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이유가 없어요. 제가 속이 좁아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멈이 속이 좁은 게 아니라, 고 이낭이 소인배가 맞지요! 불여우지요! 집구석 전부 소인배, 날강도지요!”
전 관사는 논 2백 묘 딸린 전장만 생각하면, 앞으로 고 이낭을 상대해야 할 걸 생각하면 속이 터지고 부글부글 끓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세자야, 정말 홀려서 혼이 빠지신 게지!
만 어멈의 화나고 걱정 많은 얼굴은 모두 진심이었다.
“아이고! 전 관사, 내 한마디 할게요. 잔소리라고 타박하지 말아요. 은자를 맡게 되면, 앞으로 누가 가지고 가든, 누구의 말이든, 누가 가지러 왔든, 어디에 쓴 건지, 누구를 거쳤는지 다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건건이, 은자 한두 냥이라고 해도 반드시 똑똑히, 정확히 기억해야 해요. 그뿐만 아니라, 주루, 다관, 기방, 홍루, 그리고 힐수방 같은 옷방, 금은포는 월말에 결산하니, 누가 쓴 건지, 누가 외상 한 건지 건건이 다 세세히 살펴야 합니다. 외상에 서명한 단자, 한 장도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하나 다 챙겨야 합니다.”
전 관사는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만 어멈은 간곡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전 관사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거라, 솔직히 말씀드려요. 우리 태태는 호락호락한 분이 아닙니다. 대내내도 어느 정도 수완은 있어서 마찬가지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병이 너무 깊어서, 마음이 있어도 여력이 없어요. 더 속을 끓이다간, 우리 대내내, 죽습니다. 그래도 연말까지 정양하면 추스를 거예요. 대내내의 병이 다 나으면, 분명 가장 먼저 20만 냥의 행방을 조사하실 겁니다.”
전 관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가 금세 내려왔다.
“알아들었습니다. 어멈, 안심하세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전 관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만 어멈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한마디 더하지요. 이건 우리 종복끼리 하는 말입니다. 우리 태태도 그렇고, 대내내도 그렇고, 첫째, 분별 있습니다. 둘째, 남에게 후한 분입니다. 전 관사가 애를 써주면, 다른 건 장담하지 못해도 좋은 논 2백 묘 딸린 장원은 내가 보장하지요.”
전 관사는 순간 활짝 미소 지었다. 기뻐서 걸음도 날아오를 듯했다.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멈, 정말이지…… 정말이지 좋은 분이시군요! 대내내께 전해주세요. 무조건 안심하시라고요. 이놈에게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20만 은자, 한 푼이라도 허투루 관리하지 않겠다고요. 깔끔하게 쓰겠습니다. 소인도 눈이 있고, 분별 있는 놈이라고 전해주세요. 앞으로 저도 어멈처럼, 주인은 우리 대내내 한 분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체면 차리지 않고 말씀드리겠어요. 전 관사도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이 저택 일이든, 전 관사 집안일이든 체면 차리지 말고 날 찾아오세요.”
“좋습니다!”
전 관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바 아니고, 상관할 수도 없지만, 그가 보기에 수녕백부 위아래를 통틀어서 진정한 주인 모양새를 갖춘 건 대내내뿐이었다.
한 어멈이 뜨거운 주전자를 들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다가, 만 어멈을 향해 눈을 찡긋하면서 치마 옆에서 손가락으로 슥슥 손짓했다. 만 어멈은 전 관사와 웃고 이야기하며 슬쩍 그 어멈의 손짓을 바라보고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걷느라 걸음이 느려서 한참 만에야 이동의 혼수 곳간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수운간(水雲間)에 도착했다. 전 관사가 장방에서 청휘원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인데, 지금 수운간은 여간 떠들썩한 것이 아니었다.
진 태태는 아들을 안고, 뒤에 이낭자부터 칠낭자, 딸들을 주르르 거느리고 수운간 공터에 서 있었다. 진 태태는 계단에 서 있는 고 이낭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고, 고 이낭은 창백한 얼굴로 진 태태와 뒤에 주르르 딸린 어린 낭자들을 에워싸고 손가락질하는 어멈, 시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 이낭자와 고 삼낭자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핏대를 세우고 어멈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이고! 저것 좀 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전 관사는 고 이낭과 밥 동냥하러 온 거지 같은 고가 모녀들을 번갈아 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세자야가 정말 뭐에 홀렸지, 홀렸어!
만 어멈도 당황하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야. 며칠 전에 오 어멈이 혼수 곳간 문을 부수면서 빗장이 다 부러졌는데! 문이 멀쩡해 보여도 밀기만 하면 열린다고! 바람이 조그만 세게 불어도 넘어갈 텐데! 오 어멈도 빤히 알면서, 어째서 여기를 골라 연회를 여는 것이야!”